권경안 / 호남취재본부장

▲ 권경안 호남취재본부장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15일 오후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새날교회. 도로변 상가 2층 30평도 되지 않는 곳에 고려인 300여 명이 몸을 잇대고 예배를 보고 있었다. 건물 입구와 계단에도 고려인들이 서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모세가 이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서 살고자 했지요. 그러나 장벽이 많았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얼마나 어려움이 많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 힘들게 왔습니다. 이젠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천영 목사는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며 "함께 헤쳐나가자"고 거듭 말했다.

고려인들은 일요일마다 모여 우리말을 배우고 함께 기도한다. 월곡동은 이제 고려인촌(村)이 됐다. 3000여 명이 함께 의지하며 '조국(祖國)의 땅'에서 정착을 시도하고 있다. 민족의 명절인 설을 앞둔 이날 예배는 특별한 듯했다. 유치원생들은 한복을 입고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하는 동요를 불렀다.

이곳엔 매달 100여 명씩 고려인이 새롭게 찾아오고 있다. 국내의 대표적 외국인 거주지가 된 경기도 안산에 이어 지방 대도시에도 고려인 거주지가 형성되고 있다. 고려인들이 모여 살기는 하지만 조국의 땅에 영주(永住)하리라는 꿈은 멀기만 하다. 그들은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거주를 지속하는 상태이다. 신분과 생활상 불안정이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정부의 비자 정책이다. 중앙아시아 국적 고려인은 방문취업비자(H2)를 받아 3년마다 출국해서 다시 절차를 밟아 갱신해야 입국할 수 있다. 일정 기간 이상 취업 사실을 인증 받아야 한다. 신분이 불안정하니 산업체에서 근로자로 등록하는 것을 기피해서 불법 체류자로 몰리고, 저임금에 시달려 생활이 불안정한 상태가 대부분이다. 눈물을 머금고 '추방'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청소년 자녀들도 비자 문제로 꼬이면 중도에 학업을 잇지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 언어와 문화의 혼란 속에서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이들은 재미·재일 동포들이 받는 재외동포비자(F4)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재미·재일 동포들은 3년마다 한 번씩 기간 연장으로 체류가 가능하다. 고려인 중에서도 러시아 국적은 F4를 받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신조야씨는 "우리는 독립운동가의 후예이자 민족과 국가로부터 버려졌던 동포 아닌가"라며 "똑같은 동포로 할아버지 나라에서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이 내국인 근로자 중 취약 계층의 일자리를 잠식할 수 있다는 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독립한 뒤 고려인을 배척하면서 이들의 유랑은 1990년대에 다시 시작되었다. "우리는 어느 나라 사람도 아니다"고 고려인들은 자조한다. 이들이 언제까지 유랑해야 할 것인가. 독일은 소련 해체 이후 독일계 재외 동포들에게 영주권을 주었다. 자민족의 역량을 극대화하려는 뜻이었다. 우리가 배워야 할 모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