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송 / 목수·문화평론가

▲김진송 문학평론가

숲 속에 작은 집을 짓는다. 굴참나무와 졸참나무가 빽빽한 숲. 한겨울을 위해 사철 푸른 소나무와 편백나무들이 섞여 있다. 숲을 둘러 찔레나무가 자라고 그도 모자라 새들은 가시 많은 청미래덩굴의 붉은 열매를 곳곳에 뿌려 놓는다. 죽은 나무를 찾아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조용한 아침 식사를 직박구리들이 시끄럽게 방해하기 시작하면 새벽 노을을 비집고 아침 해가 떠오른다. 거기에 다시 높은 담장을 두를 것이다. 키다리 아저씨가 되고 싶다. 단절의 공간이 깊을수록 절망을 견뎌내기 쉬울 것이라는 어리석음에 기대어….

그곳에 봄은 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 봄을 기다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태 전 이맘때, 추위는 그 어느 해보다 드셌다. 12월부터 광화문에 부는 바람은 차갑기 그지없었고 한번 시작된 추위는 수그러들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겨울에 시작된 한파는 봄이 와 물러나기 시작했지만 마음의 한파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처음엔 그저 체감온도가 조금 낮을 뿐이라고 애써 자위했던 추위는 한 해, 두 해가 지나도록 물러나지 않고 더욱 맹렬한 기세로 위협하고 있다. 추위는 대문을 두드리고 급기야 단단히 걸어 잠근 걸쇠마저 동강내 안방까지 쳐들어왔다. 썰렁한 창밖을 바라보다가 지레 놀라 방안에 틀어박혔지만 마냥 그렇게 움츠러들 수 없다는 걸 몸이 먼저 느끼고 있다. 그해 겨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관심조차 자괴감을 가져야 하는 시대, 우리는 점점 할 말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산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삶을 살아왔고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공간에 놓여 서로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을 오롯이 다 볼 수는 없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자신의 현실만이 진실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단지 누구든 말할 수 있으며 누구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세상에 말이, 이야기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말을 섞으며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조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게 우리가 말하는 자유로운 세상이다. 그 세계에서 말하려는 사람들을 제도 밖으로 내쫓고 굴뚝으로 올려 보내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의 세계는 내가 인식하는 현실과 다른 공간이다. 그곳은 나의 현실로 다가설 수 없다는 의미에서 비현실적 공간이자 상상의 영역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다른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상상의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일방적인 제도나 강권적인 법률 따위로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른 세계의 문은 이야기로 열린다. 말하고 듣는 공감 속에서 타자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만이 다른 사람의 세계를 나의 현실로 끌어들일 수 있다. 자신이 믿고 있는 현실의 원칙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땅콩 회항’과 같은 터무니없는 일은 언제든 일어난다. 자신의 원칙 앞에 제도와 법을 앞세우며 개인을 적대적 관계로 만드는 집단들이 저지르는 오류가 그런 것이다. 그들은 부와 권력을 내세워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현실인 양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닫으려 한다. 타자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에서 세상을 향한 침묵의 늪은 더욱 깊어간다.

나도 이야기를 하고 싶다. 숲의 담장을 헐고 세상사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의 끝에 서고 싶다. 혹시 아는가. 어딘가를 끊임없이 지향하지만 그 끝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정치판 이야기들, 절박하게 오르내려도 여전히 나와 어떤 연관도 찾을 수 없는 주가 동향, 야박하지 않은 전망을 한 번도 내놓은 적이 없는 경제수치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드라마의 초현실적 주인공들, 언제나 상상의 영역을 벗어나 벌어지는 사건들과 그걸 재빨리 소비의 아이템으로 낚아채는 현란한 매체 속에 나와 다른 현실이 숨어 있을지. 그렇게라도 봄이 올 수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