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혜 / MBN ‘뉴스&이슈’ 앵커

▲ 김은혜 MBN '뉴스 & 이슈' 앵커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인천 바다로 갔다. 방송일 하는 엄마이니 주말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와 시간을 보내자고 다짐하던 터다. 저무는 겨울 볕이 축축한 모래밭 자락에 드리운 섬에서 우리는 조개 캐기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런데 명색이 엄마인데 자식보다 나은 게 없다. 굽은 모양에 반색하며 주워도 앙상한 조개 껍데기만 쥐어질 뿐 입을 다문 조개는 단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만선’의 꿈을 안고 따라 나왔던 아이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어깨가 처진 아들을 그 자리에 두고 썰물이 보이는 곳까지 수 ㎞를 걸어 들어갔다.

아이스박스를 끌고 가며 숙련된 솜씨로 조개를 캐는 50대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비껴 닫은 뚜껑 사이를 힐끔 보니 한껏 영근 조개가 수북이 쌓여 있다. 저 멀리 까만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아들을 한번 더 쳐다본 뒤 주먹을 쥐었다. “저….” 땀으로 반쯤 젖은 수건을 젖혀 들고 나를 쳐다보는 아저씨 얼굴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저… 저쪽 애 엄마인데요. 죄송하지만 조개 하나만 어떻게 안 될까요?” 까무잡잡한 얼굴에 날카로운 그의 눈빛이 영 호의적이 아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홍합 하나라도 안 내줄 재간이 없을 것이라는 기자 본능이 엄마라는 숙명과 뒤섞여 나를 지켜준다. 그분, 한동안 시선이 내 빈 어망에 머물더니 이윽고 그 어렵게 캔 자기 수확물을 뒤적이다 정말 거짓말처럼 어른 주먹만 한 대형 백합조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어? 아저씨! 이렇게 큰 건 아니고요. 저는 그냥 조개 형상만 갖춘 조그만 조개 하나만 주시면 되는데….” 그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동안 이어진 승강이는 그의 이 말 한마디로 정리가 됐다.

“이보게, 남에게 선물을 줄 때는 자기가 가진 가장 소중한 걸 주는 거야.”

예수가 어부로 환생하지 않는 한 그 벽지에서 이렇게 정수리가 서늘해지는 메시지를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얼어붙은 상태로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내게 선물이란, 밑질 것 같아도 마음 한구석 진심으로 떼어주는 것이 아니라 잉여의 개념으로 다뤄졌다. 그런데 나를 내놓으라니…. 오랜 기다림 끝에 조개를 받아든 아이의 환호성, 사연 많았던 그날 하루의 도전과 보람 이전에 지금까지 내가 갖고 있던 배려와 진심의 개념이 한번에 뒤엎어졌다.

요즘 다시 방송을 시작하면서 다루는 사건들은 진심의 타이밍을 놓치거나 배려의 우선순위를 혼동한 데서 사단이 난 것들이 대부분이다. 사과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 아니라 사과를 제때 못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라는 걸 김현 의원은 몰랐다. 아마 사과 자체가 남기는 ‘기록’이 두고두고 경력에 멍에가 될 것이라는 강박관념이 그를 지배했을 것이다. ‘내 부덕입니다’라는 말 한마디가 주는 진심의 부메랑 효과를 그는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뺨에 스치는 바람마저 서늘하게 보였던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도 부와 명예, 권력에 흠집이 날 것 같은 두려움이 덜 가진 사람에 대한 배려를 압도했을 것이다.

궁벽한 어촌 촌부가 갈라진 손마디 사이로 건넨 선물은 있는 사람들의 인색한 ‘자기 지키기’에 경종을 울린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성벽을 허물고 마음을 내어줄 수 있다면, 아니 ‘가장 소중한 것’까지 주지 않아도 ‘내가 아닌 남의 소중함’만이라도 깨달을 수 있다면 그들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훨씬 많을 것이다.

아쉽게도 뉴스를 진행하며 그 반대인 사례를 자주 보아온 나는 을미년 양띠 해, 살아서나 죽어서나 자연과 사람에 보탬을 주는 양처럼 속 깊은 내공의 ‘한 수’를 보여줄 사람들을 찾으려 한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도 향기를 묻힌다던데, 그런 사람들의 향기로 가득할 을미년, 상상으로만 그치지 않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