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희 /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도입부가 도발적인 이 시는 미당 서정주가 스물세 살에 쓴 ‘자화상’이다. 중반부쯤 가면 요즘도 글에 자주 인용되는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의 시어는 노래처럼 착착 감기는 맛이 있다.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어리냐.(花蛇)’‘눈물 아롱 아롱/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귀촉도)’ 같은 문장에서도 언어 감각이 빛난다. 우리말을 부리는 솜씨는 조선시대로 치면 송강 정철, 근대 이후로 보면 김소월, 정지용 급이다.

그러나 황홀한 그의 언어를 마냥 칭송하기에는 목구멍에 걸리는 것이 있다. 친일, 전두환 군사정권 찬양 등 그의 삶의 행적이다. 1936년 등단해 2000년 타계할 때까지 1000여 편의 시를 발표했지만 그의 문학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진행형인 것도 그것 때문이다. 탐미주의적 시어에 열광하는 이들은 그를 거장으로 받들지만 그의 세계관을 비난하는 이들은 ‘말당(末堂)’이라며 폄하한다. 서정주 문학에 대해 비판의 물꼬를 튼 것은 미당이 세상을 떴을 때 ‘시(詩)의 정부(政府)가 스러졌다’며 애도했던 시인 고은이었다.

‘시와 시인의 삶은 과연 분리할 수 있는가’ 라는 관점에서 보면 미당에게 점수를 주기 힘들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조지훈, 한용운은 민족 시인으로서 자존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탐미주의적이고 초월적인 시 세계를 구축했다는 것은 무책임한 현실 외면, 역사의식의 부재로 해석될 만하다. 그러나 그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시인의 이념을 보지 말고 시만 봐달라” “미당이 지사형의 시인이었다면 그의 놀라운 시편들은 탄생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국어 교과서에 40년간 실렸던 ‘국화옆에서’는 친일파 논란으로 1990년 초 퇴출됐다. 후대엔 미당 시가 잊힐 수 있다.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파시즘에 경도돼 2차대전 때 미국에 적대적인 방송을 했지만 미국은 그의 시를 부정하지 않았다.

올해는 미당 탄생 100년이 되는 해다. 그의 제자들이 습작 노트에서 찾아낸 미발표 시 100여 편을 공개하기로 했고, 절판된 미당 전집이 새로 출간되는 등 미당 연구가 활발해질 듯하다. 사실 한국 문학사는 그의 시를 빼놓고는 얘기하기 힘들다. 위대한 시인이자 나약한 인간이었던 그는 질곡의 현대사가 남긴 유산일 수 있다. 그의 작품을 배척할 게 아니라 더 활발한 연구로 수용하고 비판해야 현대 문학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