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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동포 영주귀국자 양윤희 회장을 만나다!-사할린 동포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한다-
고선윤  |  oktim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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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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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윤희 회장.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안산시 고향마을을 찾았다. 1990년 한·소 수교가 이루어지고, 1994년 한·일 정부가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시범사업’을 시작하면서 사할린 동포 4천여 명이 고국의 품으로 돌아와 현재 3천여 명이 인천·안산·파주·남양주·광주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안산시 고향마을은 사할린 한인 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정착촌이다. 10층짜리 아파트 8개 동에 사할린 동포만 700명 가까이 모여서 산다.

사할린 억류, 그리고 귀환

11월 8일 사할린 한인영주귀국 추진운동의 대부로 꼽히는 고 박노학(1914~1988) 사할린 억류 귀환 한국인회 회장의 동상 제막식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고 박노학 회장은 사할린 한인의 존재를 한국과 일본에 알리고 이산가족 상봉과 영주 귀국에 헌신한 분이다. 이분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 업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 흉상을 세웠다.

일본열도의 최북단 홋카이도에서 북쪽으로 가늘고 긴 얼어붙은 땅 사할린이 있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이 땅을 욕심낸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와 동시에 할양받아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식민통치를 했다. ‘검은 강으로 들어가는 바위’라는 뜻을 가진 머나먼 이 땅에 우리의 조상들이 머물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사할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면서 필요한 노동력을 한반도에서 강제 동원했기 때문이다. 그 숫자는 당초 15만 명에 이르렀으나 이중 10만 명은 다시 일본으로 전환 배치되고 해방 당시에는 약 5만 명에 가까운 한인이 사할린에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비극은 전쟁이 끝나고 다시 시작되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사할린은 구소련의 땅이 되었고 일본인은 철수를 시작했는데, 일본은 조선인들을 버려두고 떠났다. 일본호적을 가진 ‘일본인’만이 귀환대상자였던 것이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합병하면서 한인을 모두 일본국적자로 처리했지만 호적만은 달리 구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될 당시 ‘일본국적자’였던 그들은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구소련 국적법에 따라 ‘무국적자’로 처리되었다. 일본은 그들을 버렸고, 조국은 그들을 잊었다.

고 박 회장 역시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되었던 분인데, 부인이 일본인이라 1956년 요행히 사할린을 떠날 수 있었다. 일본에 도착한 그는 1988년 죽는 그날까지 사할린 억류 한인의 처지를 알리고 귀국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에 호소했다. 1980년 초에는 사할린과 고국의 가족을 일본으로 불러 이산가족 상봉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 가족사진. 양윤희 회장(앞줄 가운데)과 유즈지노사할린스크에 사는 아들(뒷줄 왼쪽),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는 딸(뒷줄 오른쪽) 그리고 세명의 손녀들.
이런 노력의 결과, 1997년 한·일 적십자사 주도로 사할린동포의 영주귀국의 길이 열렸다. 한국정부는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지급되는 생계비와 의료비 등을, 일본정부는 귀국 항공료와 생활용품 구입비 그리고 사할린 역방문 비용을 매년 지급하기로 했다. 거주하고 있는 국민임대주택은 일본이 30년 임대료 27억 엔을 미리 지불했다. 단 영주귀국 대상은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로만 한정됐다. 그것도 2명씩 짝지어 와야 임대주택에 입주할 수 있다.

사람이 모여서 살면 좋은 일도 싫은 일도 한 두 가지겠는가. 쓰라린 긴 역사를 뒤로 하고 그리고 그리던 조국의 품에 안긴 그들이지만 고국에서의 삶도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을 것이 분명하다.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를 1세라 규정하고 그들만 영주귀국이 허락되었으니, 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은 평균연령 여든에 가까운 고령자들의 마을이다. 혹자는 ‘21세기의 고려장’이라는 고약한 말을 한다. 자손들의 영주귀국이 허락되지 않아 홀로된 외로움 때문에 우울증을 앓는 분도 계시고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가신 분도 있다고 들었다.

여하튼 1990년 이후 사할린에서 영주귀국한 사람은 모두 4천여 명이었는데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 이제는 3천여 명의 분들이 살고 계신다. 이들에게 가장 큰 아픔은 사할린 거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다. 특별법을 만들어 2세들도 고국에 들어와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이건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말도 다르고 생활도 다른 그들이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한국어 교육과 직업훈련 등 한국 정착을 위한 지원이 먼저 뒷받침 되어야 한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선행해야 할 문제가 분명 존재한다.

세상은 바뀌었다. 사할린도 이제 더 이상 얼어붙은 동토의 땅이 아니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희망이 보이는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거듭나고 있다. 벗어나고만 싶은 그런 땅이 아니다. 희망을 찾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곳이고, 여기서 우리의 2세 3세는 훌륭한 일꾼으로 그 역할을 찾아야 한다. 그들의 조국 한국은 그들이 날개를 접고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하기보다는 날개를 펴고 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양윤희 회장은 말한다

   
 
곧 눈이라도 뿌릴 것 같은 부연 하늘에 날이 찬 탓인지 안산시 고향마을은 조용하기만 하다. 풍성한 밍크코트에 밍크 모자까지 쓴 할머니 한분이 지나갔다. 그림에 나오는 러시아 할머니 모습 그대로다. 빵 굽는 냄새를 따라 갔더니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다. 특별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니 보드카가 벽 하나를 장식하고 러시아어로 적힌 통조림 같은 것들이 보인다. 버터와 설탕이라고는 들어가지 않은 듯 투박하게 생긴 빵이 진한 향을 뿜고 있다. 그렇다 여기는 일제강점기 사할린에 강제 동원됐다가 2000년부터 영주 귀국한 동포 1세대 700명 가까운 분이 살고 있는 특별한 마을이다.

안산시 고향마을 영주귀국자 노인회 양윤희 회장을 만나기 위해서 사무실을 찾았다. 하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추운 날 먼 길을 왔다고 반겨주셨다. 나는 1991년 사할린을 방문한 적이 있고, 당시 사할린 동포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들의 삶을 엿보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양 회장의 개인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안산 고향마을 작은 구멍가게에 진열된 보드카.
양 회장의 이야기는 결코 한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과 일본과 소련이 서로 엮이고 엮인 우리의 아픈 역사가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며 지금도 살아서 이어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할린동포 전체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양 회장은 1941년 사할린 태생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정확하게 모르나 부모님은 조부모님을 모시고 평안도에서 사할린으로 이주했다. 조부모님은 부유했다고 하고, 3·1운동에 참여해서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비극적으로 남겨진 가족은 사할린에 터전을 마련했다. 조선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양 회장은 1958년 모스크바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소련국적을 취득하고 모스크바 사범대에서 화학생물학을 전공했다.

   
▲ 사할린동포들의 입맛에 맞게 구워서 판매되는 빵들.
공부를 마치고 사할린으로 돌아온 양 회장은 역시 모스크바에서 해일에 대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오빠 친구 고창남 씨를 만나 23세 어린 신부가 된다. 6살 연상의 남편은 당시 29세였다. 두 사람은 사할린의 같은 연구소에서 귀국하는 그날까지 일을 했다.

2000년 양 회장이 59세 되는 해, 부부는 영주귀국의 길을 선택했다. 나는 궁금했다. 남부럽지 않게 공부하고 훌륭하게 일하면서 살아온 사할린에서 한번도 밟아보지 않은 고국의 땅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막연한 동경, 아니면 조국에 대한 그리움, 정체성 찾기 등등. 그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사할린에서 연금만으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아닌 연구자의 월급은 적었고 연금 역시 적다는 것이다. 1992년 이래 시작된 러시아의 자본주의 바람은 그 어떤 이유보다도 강력했던 것 같다. 그 외에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던 딸이 한국유학생과 결혼을 해서 한국에 둥지를 튼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 아들이 태어나던 해에 찍은 가족사진.
여하튼 러시아와 한국 이중국적이 허용되고 러시아에서의 연금, 한국에서의 주거지와 생계비 지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남편은 10년 동안 안산시 고향마을 영주귀국자 노인회 회작직을 맡아서 봉사했다. 그리고 2년 전 세상을 떠났다. 의료보험이 잘 되어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남편은 제주도 선산에 모셔졌다.

아들은 유즈지노사할린스크에, 딸은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노인회 사무실은 바쁘다. 고향마을의 많은 분들이 이중국적자이기 때문에 여기서 산다는 사실을 매년 러시아에 알려야 한다. 그래야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여권갱신도 해야 하고, 각종 증명서를 러시아어로 작성해야 한다. 이 모든 사무적인 일이 이 노인회 사무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80대 어르신이 237명, 70대 어르신이 412명, 여기서 1941년생 양 회장은 젊은 일꾼이다.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여권을 들고 사무실을 찾은 할머니 한분이 기다리신다. 러시아어로 도움을 청하는 것 같다. 오늘도 바쁜 하루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글/고선윤 뉴시스헬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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