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구 / 서울대 교수·윤리학

▲ 박찬구 서울대 교수

지난 주말 ‘대련한국국제학교’를 방문하기 위해 중국 다롄(大連)에 다녀왔다.

우선 눈에 띈 것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의 모습이었다. 산을 깎아 바다를 메우고 그 산과 바다가 있던 자리에 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수도 없이 지어지고 있었다. 현재 전 세계 시멘트 생산량의 40%가 중국의 건설 현장에서 소비되고 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했다. 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의 밝은 모습이었다. 상냥하게 인사하는 우리 학생들의 예의 바른 모습과 총명한 눈빛에서 미래의 희망을 보는 듯했다. 이곳 국제학교에는 유치원부터 고교 3학년까지 전 학년에 걸쳐 약 340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는데, 좋은 학교로 소문이 나서 이 지역의 중국인 유지들도 어떻게든 자기 자녀들을 이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서운 속도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모습과 이국(異國) 땅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우리 교민들의 모습, 그리고 유난히도 해맑고 반듯해 보이는 우리 동포 어린이들의 모습이 중첩되면서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돌아보면 우리에게 2014년은 마치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듯 암담하고 답답한 세월이 아니었나 싶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 불황으로 가게 문을 닫는 자영업자들의 처진 어깨,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의 불안한 눈빛은 요즘 우리 사회의 실상을 대표하는 모습인 듯하다. 최빈국(最貧國)의 처지에서 불과 30, 40년 만에 기적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뤄낸 우리의 활력과 역동성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깨닫게 만든 계기는 무엇보다 세월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간 누적돼 온 우리 사회의 온갖 모순과 치부가 한꺼번에 노출됐다. 이런 국가적 재앙의 밑바탕에는 관료사회의 부패와 기강 해이가 놓여 있는데, 이를 제대로 조사하지도 바로잡지도 못하는 국가 권력의 무능에 대해 국민은 분노하고 절망했다. 과연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이런 우울한 상념에 빠져 있던 필자에게 다롄은 무언가를 깨우쳐주는 듯했다. 서울대 사대와 대련한국국제학교 간의 상호 교육 협력을 위해 방문했던 우리 일행은 방문 첫날 지역 및 학교 관계자들과 간단한 행사를 가졌는데, 여기서 가슴 뭉클한 경험을 했다. 외국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더니, 그곳 인사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 하는 국민의례(‘국기에 대한 경례’ 및 ‘애국가 제창’)는 우리에게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 거대한 대국의 한쪽 귀퉁이에서 수 천 년 동안 고유한 말과 문화를 지켜온 우리 민족 아니던가. 그런 감동은 그곳이 안중근 의사가 재판받고 순국한 곳이라서 더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에는 뤼순(旅順) 법원과 감옥을 방문했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받았던 법원 건물은 한때 철거 위기에 놓인 적도 있었는데 이곳 한인들의 지속적인 항의와 노력 덕분에 가까스로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 동포들의 애국심(愛國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다롄 지방의 한인회가 불화와 분열 없이 늘 단합된 모습을 보여 왔다는 점도 안 의사의 정신을 본받으려는 이곳 동포들의 노력의 결과로 생각됐다.

뤼순 감옥에는 신채호 선생과 이회영 선생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를 기리는 기념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일제의 잔학한 고문과 학대 속에 숨져간 애국자들을 생각하며 우리 일행은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바르게 자라는 동포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그래, 이런 애국심을 가진 동포들의 나라가 그렇게 쉽게 주저앉을 수는 없지. 어떻게 되찾은 나라인데, 그까짓 경제가 조금 어렵다고 기죽을 필요는 없지. 청소년들을 저렇게 예의 바른 사람으로 반듯하게 길러내는 교육력을 지닌 나라라면 반드시 다시 일어설 수 있어. 똑똑한 우리 젊은이들에게 애국지사들의 정신을 불어넣는 교육을 한다면 언젠가는 부패의 고리를 끊고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어.’

다롄 공항을 떠나면서 우리는 안 의사의 흔적을 확인하며 흘렸던 눈물과 그곳 국제학교 학생들의 빛나는 눈빛을 떠올리며 새해의 희망(希望)과 제대로 된 사범교육(師範敎育)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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