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식 /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 법무법인 세종 대표 변호사

“ ‘법의 지배’라는 개념은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 근저에는 항상 따뜻한 인간의 마음이 있습니다. 깊은 인류애가 있습니다.”

지난달 도쿄에서 열린 국제변호사협회(IBA) 총회 개막연설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 말이다. 세계 각국에서 6300명의 변호사들이 참석한 행사의 무게감 때문인지 아베 총리의 연설은 나름대로 깊은 법철학적 식견을 표현하려 했다. 그는 근대 법치국가의 이념인 ‘법의 지배’가 서양 문명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어 있지만, 사실은 동양에도 이에 상응하는 사상이 존재한다고 했다. 인(仁) 혹은 자비(慈悲)로 표현되는 ‘인류애’가 바로 그것이며, 이런 사상은 일본의 오랜 전통에 녹아 있다고 역설했다.

아베 총리는 ‘법의 지배’의 핵심을 힘 또는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어떤 ‘도덕적 실재(實在)’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 도덕적 실재를 동양에서는 ‘하늘(天)’이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아베는 자신의 고향 야마구치(山口) 출신으로 일본 근대화를 이끈 요시다 쇼인을 끌어들였다. 그에 따르면 쇼인은 ‘하늘(天)은 곧 백성(民)’이고 ‘하늘의 마음은 곧 백성의 마음’이라고 가르쳤으며, 이에 감응한 젊은 사무라이들이 새 역사를 만들기 위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시다의 제자인 젊은 사무라이들이 만든 역사라는 게 결국 ‘메이지 유신’을 통한 일본의 근대화와 이웃 국가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 아니던가. 그런 이웃 침탈의 역사가 아베가 말한 ‘인류애’와 어떻게 연결된다는 것인가. 혹시 일제가 동아시아 침략의 명분으로 내세운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이 바로 하늘의 뜻이었고 인류애의 발로였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가.

아베 총리는 법과 정의가 지배하는 국제사회를 수호하는 것이 일본의 국익에 부합하며 그것이 일본 외교의 원칙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여성의 권리 보호를 위한 국제적인 노력에 적극 참여해 왔음을 강조했다. 여기서 또 머릿속에 스친 질문-일본의 입장이 그러하다면 아베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그토록 부정하려고 하는 건 어찌된 일인가.

물론 10여 분간의 짧은 연설로 아베 총리의 진의를 정확히 읽어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요시다를 흠모하는 아베 총리의 동아시아 역사관은 그가 역설한 일본의 ‘인류애’ 전통과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요시다 쇼인 문도(門徒)들의 역사적 치적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아픈 과거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지난주 베이징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때 아베 총리를 대하는 박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의 어색하고 냉랭한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3국 정상회담이 무슨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아베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하던 종래 입장을 당장 바꿀 리는 없고, 그런 상태에서 만나본들 2005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간 정상회담이 재현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당시 정상회담은 2시간 내내 가시 돋친 역사 공방만 벌이다 끝나 버렸다.

아베 총리는 ‘따뜻한 인간의 마음’과 ‘깊은 인류애’가 일본의 전통이라고 했다. 그것이 그의 진심이길 바란다. 그런 진심이 있다면 아베는 2000만명을 죽인 일제의 침략 사실을 부인하거나, 인권을 유린당한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절규를 외면해선 안 된다. 상대의 상처를 헤아리고 사과하는 일부터 하는 것이 진정한 인류애가 아닌가. 그렇게 하는 것이 동아시아가 공영(共榮)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