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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세계 희유의 문화혁명
조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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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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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학 / 비교문화 학자

근대 웨스턴 인팩트(서양의 충격)에 따른 비서양권의 국가 중에서 서양식근대화에 성공한 것은 유일하게 일본이란 작은 섬나라뿐이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58~1881)의 성공으로 서양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아시아의 중국, 조선 등 비서양국가의 근대적 모델로 부상한다.

중국의 백일유신(무술변법), 신해혁명, 조선의 갑신혁명, 그 뒤 전후 아시아 4소룡의 한국, 대만, 싱가폴 등 근대화혁명 속에서 메이지유신은 여전히 그들의 모델로 추앙되었다. 메이지유신이 아시아 근대혁명의 독재형혁명과 구별되는 것은 사실 독재형이 아닌 유연한 혁명 이였다는 점이다.

메이지유신은 “서양열강이 지배하는 19세기 국제질서에 후발국 일본이 편입당하는 국제통합과정”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또한 일본 지식인들의 말을 빌면 “페리제독 내항이래 막번(幕藩)체제와 신분제도와 결별한 일본이 약 50년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인 돌출한 근대화를 이룩해 20세기 초에는 세계의 ‘일등국’ 행렬에 들어서게” 된다.

일본의 당시의 국가목표는 압도적인 서양세력의 압력에 대응하면서 어떻게 정치적, 국가적 독립을 지키고 사회를 서양화적 근대화하여 서양열강에 캐치업하는가 하는 외향적인 과제였다.

1840년에 전개된 청국의 아편전쟁 패북에서 지대한 충격을 받은 일본인들은 그때로부터 서양열강의 식민지지배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졌다. 그러는 와중 1853년~54년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강제개국을 당하면서 그들은 맞서 게란투석형의 충동이 아닌 유연한 방식으로 수용한다.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메이지유신의 혁명기간을 1858년에서 1881년의 23년 동안으로 보며 개국인팩트에 대응하기 위한 정치체제의 재편, 국가목표의 설정수정 및 그 순위의 구체적 행동양식을 합의하는 과정으로 설정하고 있다.

1858년은 일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에 따른 화란,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과 통상조약을 속속 맺고 다음해부터 본격적인 대서양무역이 시작된다. 그리고 “부국강병”론이란 정치경제구상이 형성된다. 이리하여 1881년에는 메이지천황이 9년 후인 1890년에 국회를 개설하는 칙명을 발포하며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따라 금융, 산업개혁이 시작되는 해가 된다.

메이지혁명은 당시 복수의 목표 즉 “부국”과 “강병”, “의회”, “헌법” 4항 목표를 병행시키면서 진행된다.

그리고 하나 특기해야 할 사항은 일본인의 특유한 “유연구조”가 메이지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것이다. 복수의 국가목표를 동시에 고려하는 유연성, 그리고 지도자들의 지적(知的)수준이 상당히 높았으며 오쿠보(大久保利通), 카츠(勝海舟), 사이고(西鄕隆盛) 등 리더들은 각기 다른 국가목표구상을 지였으나 큰 공동분모를 갖고 가변성으로 서로 단합하였다. 대립할 때는 대립하더라도 단합해야 할 대목에서는 서로 절충하고 단합한 것이었다. 메이지유신에서 소규모적인 유혈혁명전투를 치르면서 바쿠후의 수구세력을 제거시켰으며 유연성 있는 사츠마파와 쵸수파 등의 동맹으로 유혈을 최저한 감소하면서 혁명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메이지중반에는 헌법제정, 의회창설, 식산흥업, 대외진출 4대 국가목표가 동시에 달성하게 된다. 1881년에 이것이 이미 이룩된 토대 위에서 12년 뒤인 1893년에는 “세계 무비의 국가”로 성장한다. 1894년 메이지정부제의회에서 외상 무츠(陸奧宗光)가 연설에서 “수출입합계는 1868년에 비해 5배, 군함수는 4배, 육군병수는 5배, 제로였던 철도는 3,000마일에 이른다. 아시아 최초의 입헌국으로서 유럽 각국 정부에서도 일본을 무비의 국가라고 경탄했다”고 말한다.

유연성구조와 함께 학자들은 일본의 근대화 전제조건을 (1) 정치적 통일과 안정 (20 경지면적과 생산성의 양면에서의 농업의 발전 (3) 물류의 시스템의 발전과 전국 통일시장의 형성 (4) 상업, 금융의 발전 및 그에 동반되는 부유 상인층의 대두 (5) 수공업의 발전 (6) 지방정부에 의한 산업진흥 (7) 교육의 보급 이상 7개 항목으로 분석한다. 사실 이 7항 조건은 현재에도 비서양국가에서도 구비된 나라가 지극히 적다. 특히 교육보급은 경이로와 메이지 근대학제가 1872년에 제정되는데 3년 후인 1875년에는 전국 소학교수가 약 2,400개나 된다. 초등학교 보급률은 남자 50.49%, 여녀자 18.58%. 이는 당시 세계 최선진이였다.

일본의 메이지혁명 성공의 또 하나의 이유는 외압에 대한 신속한 적응력이였다. 파벌대립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서양을 배워 철저하게 서구화시키는 것으로 목표를 통일한다. 메이지유신의 가치는 그 철저성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철저한 서양화를 지향한 희유의 “문화혁명”이였다. 근대 영국의 외교관이며 학자로서 유명한 조지.B.샌슴(sansom)은 “일본인은 언제나 자신들이 유럽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중국인은 언제나 자신들이 유렵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고 갈파한다.

1871년 메이지천황이 “육식, 단발, 양장”을 장려하는 칙유를 발표하여 서양화를 장려한다.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같은 지식인은 아예 영어를 국어로 하자는 래디컬한 주장도 펼친다. 아무튼 “화혼양재(和魂洋才)”슬로건을 걸지만 그 내실은 철저한 서양화를 향한 문화혁명이였던것이다.

일본의 메이지혁명과 청국의 혁명을 비교하면서 그 승패에 대해 국제학자 G.F.허드슨은 이렇게 지적한다. 아편전쟁 이래 일본도 중국도 서양세력의 압력으로 개국을 하지만 1865년 일본은 서양문명 수용의 길을 적극 선택한다. 그러나 청국은 의연히 자국 우월적 배외정책을 고집한다. 이 분기가 일본의 근대화와 중국의 반동화란 이질 된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허드슨은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을 지적한다. 일중분기의 심층원인은 일본은 전통적 무사가 지배한데 반해 중국은(조선도) 과거급제한 독서인 사대부가 관료층을 지배했다. 따라서 일본의 무사들은 서양의 무력에 대해 굴욕을 느끼고 그 굴욕을 푸는 수단으로 서양기술을 철저하게 습득했다. 그러나 유교적 우월주의에 빠진 중국, 조선의 문인, 독서인 정권은 서양문명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렇게 1865년이 일중한 역사의 분수령이라고 한다.[히라이시(平石直昭)]

그리고 일본의 내발적인 내셜내리즘, 국가관이 일본의 단결을 보장했으며 중국과 조선은 그러한 유력한 내셜내리즘, 국가관 의식이 지극히 박약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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