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종 / 경향신문 논설위원

경북 문경시 문경새재 입구에 ‘문경새재아리랑비’가 서 있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민요인 아리랑을 서양식 악보로 처음 세계에 소개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를 기리는 비석이다. 어제 ‘여적’에선 덕수궁 석조전 이야기로 고종과 대한제국의 패망을 언급했는데, 헐버트는 당시 고종의 외교 고문이었다. 그는 조선 땅에서 교육자, 역사학자, 언론인, 한글학자, 선교사, 독립운동가로 선구적인 활동을 펼쳤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글의 우수성을 꿰뚫어본 첫 번째 외국인이다. 미국 버몬트주 출신인 헐버트는 1886년 23세 때 처음 조선 땅을 밟았다. 처음에는 황실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영어를 가르쳤다. 1889년 교재로 펴낸 <사민필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라고 한다. 한글의 기원과 문자적 기능에 대한 체계적 연구에도 기여했다. 주시경과 함께 점 찍기와 띄어쓰기를 주장한 게 그였단다.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 창간에도 참여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소리음악(Korea Vocal Music)>이라는 논문을 발표, 아리랑의 영문 가사와 악보를 외국에 소개했다. 아리랑에 대해 인상 깊은 어록도 남겼다.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다.’ 그는 아리랑 가사와 박자를 즉흥적으로 바꾸는 것을 두고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라고도 했다.

헐버트는 외국인 독립운동가로도 활약했다. 이준 등과 함께 이른바 ‘헤이그 밀사’로 파견돼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다. 미국에서도 일제를 비판하는 글을 쓰고,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다. 그는 1949년 8월 42년 만에 다시 한국땅을 찾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숨을 거뒀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소원대로 그는 서울 마포 양화진 절두산 성지에 묻혔다. 1950년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늘 한글날을 맞아 정부가 헐버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한다고 한다. 훈장은 선생의 증손자인 킴벌 헐버트가 경축식에 참석해 대신 받는다. 지금도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헐버트라면 최고 등급의 훈장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