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효 / 성균관대 교수·前 청와대 기획관

▲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 전 청와대 기획관

2주 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동북아시아협력대화(NEACD)에 참가했다. 1993년에 만들어진 미·중·일·러·남북한 6자간의 반관반민(半官半民) 연례안보대화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과 함께 북한이 참가하는 몇 안 되는 국제회의다. 정부의 당국자들만 참가하는 ARF와 달리, NEACD는 관과 민이 섞여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민감한 주제에 관한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교환하는 장으로 활용돼 왔다.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가 타결돼 한동안 북한 핵 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가 고조됐을 때는 북한을 어떻게 하면 동북아시아 다자협력 구도의 일원으로 끌어들일지가 NEACD의 주된 의제였다. 2002년 북한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면서부터는 핵 문제에 대한 북한 당국의 의중을 파악하고 타협의 접점을 모색하기 위한 간접대화의 창구로 기능해 왔다.

이번 24차 NEACD 회의에서 필자는 북한의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북한은 대표단 명단까지 통보했다가 막판에 불참했다. 이틀 간 이어진 여러 주제에 관한 발표와 토론 과정에서 북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북한 사람이 없어서 북한 문제를 시큰둥하게 다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긴박한 의제로 여긴다면 북한 대표가 있든 없든 뜨거운 논쟁이 있었을 것이다. 6자회담 참가 6개국이 똑같이 모이는 NEACD는 더 이상 북핵 문제에 대해서는 체념한 듯했다. 북한 문제는 중요하지만, 또 앞으로도 중요한 관심사지만 국제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고 보는 듯했다.

이번 회의를 지배한 것은 중국과 일본 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거센 충돌이었다. 중국은 1972년 대일(對日) 수교 당시 이뤄진 ‘현상 유지’ 합의를 일본이 일방적으로 깼다며 영토 문제에 관한 한, 어떠한 타협과 양보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2012년 10월 노다 정권이 센카쿠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중국은 이에 즉각 반발했고 바로 다음달 센카쿠를 포함하는 방공식별구역(CADIZ)을 선포했다. 지난 5∼6월에는 동중국해 공해상의 일본 정찰기를, 8월에는 남중국해 공해상의 미국 대잠 초계기를 중국 전투기들이 초근접 위협 비행하는 일이 발생했다.

일본은 수십 년 동안 센카쿠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중국이 요즘 갑자기 입장을 바꾸고 일본을 몰아붙이는 것이라고 항변한다. 센카쿠를 소유한 민간업자들이 임의로 인공 구조물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국가가 자제시키려는 조치인데 중국이 있지도 않는 ‘영토 문제’를 분쟁화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국력이 커졌다고 힘자랑하는 것이냐며, 앞으로의 중국은 예측불허이며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동중국해에서의 중·일 센카쿠 갈등과 남중국해에서의 중·베트남, 중·필리핀 영유권 분쟁의 이면에는 미·중 양국의 해양 충돌이 작용하고 있다. 미국은 기존 아시아 동맹 네트워크를 재정비하려 하고,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로의 귀환(pivot to Asia)을 저지하려 한다. 일본을 먼저 기선 제압해 역내 주도권을 강화하겠다는 중국을 놓고, 미국은 직접 충돌하기보다는 경쟁과 협력을 병행하는 다양한 대중 전략을 고민하고 있다. 자국민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해 영토 갈등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중·일 모두 자제해야 한다는 게 미국 참석자들의 의견이었다.

미국·중국·일본 3국의 참가자들은 동아시아의 넓은 바다에 마치 자신들밖에 존재하지 않는 듯이 생각하고 발언하는 듯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우리 중심의 세상을 믿고 그려오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은 매우 짧은 기간에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지만 세계와 지역의 질서를 좌우하려는 거대 세력들이 우리의 말을 항상 진지하게 경청할 것이라고 장담해서는 안 된다. 한국인의 눈엔 과거사 문제로 지탄받아야 할 일본이 다른 문제에 관해선 국제사회에서 더 많은 우군과 동조자를 확보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봐야 한다.

남의 입장을 의식해서 우리의 중심전략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한·미동맹도, 중국·일본과의 관계도, 북한 문제도, 그리고 동아시아 해양정책도 이를 둘러싼 대국(大局) 전체의 그림을 꿰뚫는 냉철한 사고가 전제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