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득 / 경향신문 기자

ㆍ농민들 양귀비 대신 콩 재배
ㆍ5만달러면 두유공장 만들어
ㆍ한국 기업 적극 진출했으면

앞으로 식량·기아 문제가 대두될 것이니 관련 공부를 해보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1972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UC데이비스와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식품생화학 석·박사학위를 받은 후 ‘네슬레’에 입사, 콩으로 만든 영아용 대체분유 등 의료식품 개발을 담당했다. 어느 날, 오랜 전쟁 탓에 헐벗고 굶주린 아프가니스탄인의 비참한 현실을 접했다. 2003년 5월 무작정 아프간을 찾았다. 충격을 받았다. 세계적인 회사에서 잘나가던 그였지만, 사표를 던졌다.

“관련 업종 종사자로서 뭔가를 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부담감이 생기더군요. 좋은 직장에서 보람된 삶을 산다고 자부했지만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이들 앞에서는 모든 게 부질 없어 보였습니다.” 아프간에서 ‘콩박사’로 불리는 재미동포 권순영씨(66·미국 이름 스티브 권)는 4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회상하며 “내 전문지식으로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그게 적중했다”고 말했다.

아프간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단백질 공급이며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콩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권 박사는 자비를 털어 비영리 자선단체 ‘NEI(영양과 교육 인터내셔널·www.neifoundation.org)’를 설립했다. “아편 원료인 양귀비가 재배되는 아프간 땅에서도 콩이 잘 자라는 걸 확인했죠. 하지만 콩이란 걸 보지도 먹지도 못했던 현지 농민들은 콩 재배 제안에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홍보와 교육에 집중한 덕에 지금은 아프간 22개 주 1400개 마을에서 콩을 재배하고 있다. 양귀비밭이 콩밭으로 바뀐 것이다.

권 박사는 “자발적으로 콩을 재배하겠다는 농민이 늘고 있다”며 “여기엔 유엔 세계식량계획(WFP)과 한국 정부의 지원도 한몫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미국 콩이 재배됐지만, 한국 정부가 2009년 제공한 ‘황금종자’가 실험재배에 성공해 내년부터 아프간인들은 한국 콩을 먹게 될 것이라고 권 박사는 강조했다. 콩이 영양 개선은 물론 수익성까지 좋은 작물로 각인되자, 먹는 데 그치지 않고 내다팔려는 농민이 늘어났고, 가공산업의 필요성도 부각됐다. NEI는 3개 도시에 살균두유공장을 세우고 난민촌과 고아원, 학교 등지에서 두유와 함께 콩을 섞어 만든 빵을 배식하고 있다. 두유공장 확충에 대기업 등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권 박사는 “5만 달러면 두유공장 하나를 세울 수 있다”며 “이는 연인원 50만 명이 두유를 먹을 수 있는 규모”라고 말했다.

권 박사는 아프간 정부 관계자들과 함께한 방한기간 중 한국화약 창립멤버이자 한화그룹 부회장을 지낸 부친 권혁중씨의 임종을 지켰다. “지금까지 온 데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는 권 박사는 4일 미국으로 떠나면서 이 말만은 꼭 하고 싶다고 했다. “탈레반 등으로 인해 아프간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지만, 아프간인들은 한국을 좋아하고 배우고 싶어 합니다. 아프간 여행 규제를 풀어 한국의 두유 생산기업이 자유롭게 진출토록 해야 합니다.” 

▲ 아프카니스탄에서 '콩박사'로 불리는 권순영씨가 현지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다 / NIE한국지부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