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정 / 연세대 교수

▲ 김기정 연세대 교수

일본 내 혐한(嫌韓) 시위가 심각한 수준이다. 재특회라는 기묘한 이름의 단체가 시작했던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반대 시위는 최근 발언 수위와 내용들이 점차 증폭돼 일본 곳곳에 열병처럼 번지고 있다. 재일 한국인들은 물론 한국인 관광객들조차 신변의 위험을 피부로 느낄 정도가 됐다. 도쿄의 한인 가게 상당수가 이미 폐업했거나 폐업을 고민하는 수준이다. 일본의 주간지나 월간지도 한국·한국인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거나 폄훼하는 기사가 포함돼 있어야 팔린다고 하니 사회적 증오 몰이에 일본 언론의 상업적 셈법도 일조하는 듯하다.

일본의 일부 정치인들은 ‘인종 차별은 부끄러운 짓’이라며 자탄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표현의 자유’ 운운하며 이를 방조하고 있다. 증오를 증폭시키는 구호들은 거의 집단 광기에 가깝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데모하고 있으니 세계화 시대, 사회 다양성 시대를 역행하는 용렬함이 느껴진다. 이런 지경에 이르자 지난 20일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서도 일본 내 인종차별 문제를 의제로 삼을 정도로 국제적 문제가 됐다.

혐한 시위는 지독한 증오 심리의 표출이다. 대부분 국가 간 관계가 그러하듯 한·일 간에도 분명 갈등의 역사가 있다. 그것이 주로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서 비롯됐음은 자명하다. 그런 비극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에는 협력과 화해를 위한 노력도 공존해왔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의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위한 공동선언’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 혐한 시위 같은 증오 쏠림 현상은 그러한 성찰의 노력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웃 나라 간 협력의 기억을 모두 증오 심리로 재구성하고 있는 듯 보여서 참으로 우려스럽다.

내년이면 국교 정상화 50년이다. 지난 반세기, 협력 지향의 동력도 작동했지만 그것을 굴절시키는 파행도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아베 두 정권의 부정교합은 정부 간 관계를 최악으로 만들었다. 양국 정부의 관계 개선 노력도 답보 상태를 넘어 방관에 가깝다. 두 정부가 손을 놓아 버린 공간에 인종차별의 증오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 증오는 도착 증세와 극단적 자기 중심의 자폐심리 속에서 재생산된다. 증오가 사회의 집단적 광기로 확산되면, 건전한 상식과 이성을 가진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게 된다. 한·일 양국 모두 마찬가지다. 그 지경에 이르면 증오는 국경을 넘어 동북아 지역으로 전염병처럼 파급될 것이다.

분별력 있는 정부라면 이런 상태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 무책임과 방관의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행여 아베 정권이 국내 지지율에만 신경을 써서 지금의 사태를 방관하거나 이용하려 한다면 한·일 역사에 오점으로 남게 될 것이다. 우리 정부도 타국의 국내 문제라고 팔짱만 끼고 있을 일이 결코 아니다. 최근 우리 정부가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공공외교를 적극 실천에 옮겨야 할 시점이다. 일본 내 건전한 시민사회단체와 오피니언 리더들과의 관계를 더욱 더 확대하면서 그들의 건강한 성찰 의지를 격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명심해야 할 것은 한·일 관계는 양국의 정부만이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한·일 간 오랜 교류의 역사가 잘 말해준다. 일본 내 일부 혐한파들의 용렬한 태도에 우리 사회가 또 다른 용렬함으로 대응해선 안 된다. 정부의 방관과 무책임을 넘어서는 건강한 시민정신이 필요하다. 한국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더 환대해야 하는 이유도 그런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진정한 극일(克日)의 방도일 것이다. 그래야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입장이 더 당당해진다. 역사가 증언하듯 증오는 관용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 관용이 인류 보편적 가치에 훨씬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