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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변호사 이종연 씨, 그는 누구인가
김도균 기자  |  oktim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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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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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연 변호사
일본에서 시사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변진일(邊眞一) 씨는 한 칼럼(‘일본은 미국에서 한국의 로비외교에 왜 졌는가’)에 “종군위안부와 ‘731부대’에 연루된 일본인의 입국금지를 미 정부에 제의한 사람이 재미 한국인 이종연 변호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이다”라는 글을 썼다. 필자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름이기도 해서 한 번 만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의 이름을 기록해두었다.

그런데 지난 6월 초, 사무실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를 통해 차분한 노신사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미국에 사는 이종연 변호사다. 엊그제 한국에 들어왔는데, 귀 연구소를 찾고 싶다.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를 샌프란시스코에 세우고자 하는데 알릴 방법이 없겠냐?”는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자료를 가지고 있다기에, 마침 뵙고 싶었던 터라 사무실로 방문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약속을 잡았다.

며칠 후 약속시간보다 이른 시각 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두툼한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입구에 있는 국립공원에 6·25참전 용사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운다는 계획서였다. 미 국방성과 미8군, 유명로펌회사 등에서 변호사로 활동한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이종연 변호사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피난 온  유학생 신분에서 미 해병대 통역장교로

이종연 변호사(84세).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다. 연백은 6·25전쟁 전에는 3.8선 이남지역이었으나 휴전 후에는 북한에 편입됐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지주였고, 아버지는 한문학자로 서당을 운영하던 지식층이어서 해방 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탄압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19살 때 부모님의 강권으로 홀로 서울로 떠났다. 서울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지내다 1948년 고려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1949년 어머니가 서울로 내려오셔서 1년 남짓 같이 살았으나 6·25전쟁이 터지자 이 변호사는 홀로 한강을 헤엄쳐 피난행렬에 합류했다.

“막무가내로 피난가라며 떠미는 어머니를 서울에 홀로 남겨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야 했어요. 피난행렬에 끼어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대구까지 내려갔는데, 우연히 미군부대에서 통역관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더 이상 피난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미8군에 지원을 했어요. 당시 대학생신분이었고, 영어를 좀 하는 편이어서 바로 입대할 수 있었지요. 그 후 부산에 상륙한 미 해병대에 배속돼 중위계급을 달고 통역장교로 참전하게 됐어요. 미 해병대는 인민군 남하를 막기 위해 비밀리에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내가 통역자로서 역할을 하게 된 것이죠.”

미 해병대의 상륙으로 대구를 거쳐 부산을 점령하려고 했던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패배의 쓴 잔을 맛보야 했다. 이 변호사는 그 전투를 계기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것이라며 그 배경을 설명했다. 인천상륙작전 때는 미 해병대 통역장교로서 맥아더 장군과 같은 배를 타고 상륙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맥아더 장군에 대한 인상은 카리스마 넘치는 용맹한 맹장의 모습이 있는 반면, 부하들을 따뜻하게 안는 덕장의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이 변호사는 인천상륙작전 때, 치열했던 전투장면 사진 두 장을 보여줬다. 한 장의 사진은 현재 샌프란시스코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 건립에 총무를 맡고 있는 존 스티븐스(John Stevens) 대위가 이끈 부대원들이 부서진 해안 벽을 넘어 인천으로 진격하려는 순간의 사진이다. 이 전투에서 수류탄 투척 중 전사한 미 해병대 소속 ‘로페즈(Lopez)’ 소위의 해안 벽을 넘는 순간이 포착돼 있다. 또 하나의 사진은 그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의 사진이다.

“전쟁에서는 승리가 목표겠지만, 백마고지처럼 12번을 서로 주고받으며 공방을 펼치면서 뜻하지 않게 수많은 전우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비록 승리는 했지만 효율적인 전투는 아니었습니다. 무모하게 전투를 벌여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명의 희생자도 없도록 전략을 짜고 전투를 벌이는 것이 진정한 장수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변호사는 이 사진들을 샌프란시스코 공원 6·25 참전 기념비에 새겨놓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민과 변호사의 길

   
▲ 언론에 보도된 기사를 설명하고 있는 이종연 변호사.
이 변호사는 휴전 후 1954년 진해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7개월을 근무했다. 그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 계기는 미군간부후보생들 중 예일대학교를 나온 한 미군이 예일대 추천을 해주어서였다.

“영문학을 전공한 친구가 가르쳐 준 엘리어트의 ‘황무지(The Waste Land)’ 란 시를 미군들 앞에서 낭독을 한 적이 있었어요. 미군들이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전쟁은 끝났는데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더군요. ‘난 학생이다’라고 했더니, 예일대 출신 한 장교가 엘리트 신사를 길러내는 예일대가 좋겠다며 입학 추천을 해 주었어요.”

그 후 이 변호사는 예일대와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미국변호사시험에 합격한 후 뉴욕에서 5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 유명로펌 회사는 반 이상이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싸움닭처럼 덤벼드는 이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변호사로서의 경력을 쌓아가던 중 이 변호사는 한인 1세로는 최초로 미 국방성에 취직을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1968년 미8군으로 파견돼 한미행정협정 등의 업무를 맡아 수행했다. 월남전이 끝난 후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우려해 열린 한미국방장관회의 변호사로 참여해 국방현안문제를 풀어 가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군 장군이 사자성어를 섞어 말할 때 미국 측 통역자가 통역을 제대로 못하니 나에게 의뢰가 왔었어요. 그러나 1급 비밀 인가를 받아야 통역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정상적인 절차로는 몇 년씩 걸렸기 때문에 임시 비밀취급인가증을 받아 참여할 수 있었어요. 미국이 한국을 많이 도울 수 있도록 힘쓴 것에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시 미 대사관 직원들은 ‘예일대를 나온 네가 어떻게 독재를 하는 박정희 정부를 도울 수 있느냐’며 나를 놀리기도 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를 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등의 문제가 있긴 했지만 제가 보기에는 한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지요.”
이후 이 변호사는 88올림픽이 끝난 후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 워싱턴에서 유명대형로펌에서 활동했다. 존 로버츠 미 연방대법원장 등이 당시 같이 근무한 동료들이다.

4년간의 로펌회사에서의 변호사 활동을 마친 후 다시 미 법무성에 들어갔다. 아시아나 중동지역 국가들과의 범인 인도, 증거 교환, 법률문제 등의 업무에 관여하기도 했다.

미 법무성 근무를 마친 후에는 1999년 인천공항 법률고문을 맡아 활동을 했다. 그밖에 한국 사법연수원과 국제법률대학원 교수, 국내 대형로펌 등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 변호사는 비록 미국으로 이민을 간 몸이기는 했지만, 고국과의 관련이 깊은 업무 위주로 활동을 했다. 미국 정부에서의 활동이나 로펌회사 활동도 고국과 아시아권 업무와 관련된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변호사는 1967년 귀국해 친구동생과 결혼했다. 슬하에는 두 자녀가 있다. 첫째는 미 국무성에 근무하고 있고, 둘째는 국내 대형로펌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에게 미국시민권자로서 장기간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미국에 사는 것보다 한국에 사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한국에서 지내려고 일부러 미 국방성에 들어가 근무하기도 했었죠. 국내에서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며 지내는 즐거움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샌프란시스코 한국전 참전 기념비 건립을 위해

이 변호사가 샌프란시스코 한국전 참전 기념비 건립에 관여하게 된 계기는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 당시 중대장이었던 존 스티븐스(John Stevens)나 판문점에 근무했던 ‘한국전쟁 기념재단’ 피트 맥클로스키(Pete McCloskey, 전 하원의원과) 회장 등의 요청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태생으로 한국전에도 참여했고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자신을 한국전 참전 기념비 건립에 꼭 필요한 존재로 본 것이라고 했다.

   
▲ 샌프란시스코 SF총영사관을 방문한 이종연 변호사가 'SF한국전참전기념비' 건립에 500달러를 기부했다. 사진은 이종연 변호사가(왼쪽) 한동만 SF총영사에게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
이 변호사는 한국전 관련 기초자료와 사진자료를 수집해서 미국으로 보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건립된 기념비와 동상은 미군들뿐만 아니라 한국군들의 모습도 함께 만들어 진다.
‘샌프란시스코 6·25 참전 기념비’ 건립은 6.25 참전 용사인 피트 맥클로스키와 존 스티븐스가 주도하여 설립한 ‘한국전쟁 기념재단(Korean War Memorial Foundation)’이 추진하고 있다. 장소는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입구에 위치한 국립공원으로 6·25 참전 희생용사들이 미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고국 땅을 바라본 지역이기도 하다. 이 재단 이사들은 한국전 참전 지휘관들로 구성돼 있다.

이 변호사는 이들과의 친분으로 재단 고문역을 맡았다. 한국전에도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미국을 잘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참전 기념비에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해안 벽을 넘기 위해 사다리를 오르는 로페즈(Lopez) 소위의 모습과 한국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백마고지 전투장면, 미군들의 전투장면 등이 아로새겨진다.

부조형태로 세워지는 기념비 조각은 유명 조각가인 마크 비어드(Mark Byrd)가 맡았다. 기념비 제작에 필요한 기금은 약 300만 달러정도이다. 이 변호사는 기금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미 연방정부로부터 1만㎡ 땅 사용권을 허가받아 놓았습니다. 기념 부조상 제작에만 300만 달러, 유지보수비에 약 40만 달러가 소요됩니다. 현재 180만 달러 정도를 모금했는데, 재미교포들이 제일 많이 기부하고 있습니다. 기부자의 반 이상이 교포들입니다. 한국군 참전용사들의 모습이 미국에 세워진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기업들의 동참도 속속 이뤄지고 있다. 삼성과 미국회사 벡텔사가 기부를 했고, 실리콘벨리에서 사업체를 경영하고 있는 재미교포 스티브 강과 한국전 참전 용사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만재 사장 등은 거액 기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샌프란시스코한인회와 한인교회들의 참여도 잇따르고 있다.
이 변호사는 내년 한국정부에서 1백만 달러를 기부하기로 했다며, 목표치가 달성되는 대로 건립에 착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위안부문제를 최초로 다루다

   
▲ 이종연 변호사와 임길자 씨 부부.
미국에서는 한일 간 과거사 문제를 두고 로비가 치열하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 없이 자신들의 치부를 덮으려는 일본 측의 집요한 로비는 끊임없다. 이에 반해 한인들은 미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통해 과거사 문제를 국제이슈 화해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이끌어 내려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17년 전 미국은 나치 전범과 같이 일본군위안부와 2차 대전 생체실험부대로 알려진 ‘731부대’에 관련한 일본인의 입국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미국정부의 조치의 이면에는 한인들의 활동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 변호사가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부터이다. 미국 워싱턴에서 황금녀 위안부 할머니를 만나고서다.

“사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 거론한 사람은 이화여대 영문학과 윤정옥 교수입니다. 윤 교수가 91년 일본 오키나와에 사는 위안부 출신 할머니를 만나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드러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금녀 할머니를 통해 미국에 알리게 된 것이죠. 도와달라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이 변호사는 1993년 일본군 위안부와 ‘731부대’에 연루된 일본인의 입국금지를 취해달라며 미 정부에 건의했다. 미 법무성은 1차로 관련자 16명을 입금 금지 조치했다. 일본은 예상 밖의 타격을 받고 미 법무성의 결정을 뒤집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 일을 계기로 이 변호사는 1993년 ‘워싱턴정신대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초대 이사장에 취임한 후 기부활동을 벌였다.
“당시에는 ‘왜 이런 창피한 문제를 외국에까지 가지고 와서 거론하느냐’며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여성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었기에 그만두고 볼 수 없었지요. 당시 미 법무성 로젠틀 국장은 일본정부 관료들 중 일부가 전범들과 연계돼 있다는 것으로 보았는데, 일본정부로서는 난리가 난 셈이 되었어요. 미 국무성이 외교관계를 고려해 일본 측 입장을 대변하자 로젠틀 국장이 ‘법대로 해야 한다’며 미 국무성에 강력히 항의를 하기도 했어요.”

이 변호사는 최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위안부문제와 관련해 ‘법대로 처리’를 주장한 것도 그런 의미라고 설명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재미교포들의 노력으로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고, 2007년에는 미 연방하원에서 ‘일본군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이 변호사는 위안부 문제는 이제 UN인권위원회에서도 정식으로 다루기 시작했는데, 과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세계적인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 이 변호사는 최근 2차 세계대전 전범책임을 두고 ‘일왕이 상징적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 역할을 한 전범이며, 결국 맥아더 장군이 전범처리를 잘못했다’고 주장하는 미국 교수들이 있다며 미국인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변화를 전하기도 했다.

이 변호사에게 미국정부에서 활동한 한인으로서 교포 2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교포 2세들의 정체성 문제는 교육과 연관돼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교육이 안 돼 있으면 모국에 대해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북한에 대해서도 잘 모르니까 북한과 교류를 금지하고 있는 미국 실정법을 어기는 교포들도 있습니다. 암튼, 교포 2세들에 대한 정체성교육 없이 모국에 기여하라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변호사는 교포사회가 현지에서 시민권자로서 역할을 다하고 객관적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좋은 예로, 삼성과 애플의 특허관련소송에서 공정한 재판을 진행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지방법원 새너제이 지원의 루시 고 판사의 예를 들었다. 배심원들이 감정과 정서적으로 치우치는 경우에 이를 제지해 한국 측에 불리한 결정이 나지 않도록 공정성을 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현지에서 교포들이 이런 역할을 할 때, 한국과 미국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 이종연 변호사가 인터뷰 중,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6·25 한국전쟁 3년 동안 통역장교로 수많은 전장을 누빈 이 변호사는 전쟁의 상흔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민간인 215만 명이 희생됐고, 국군 15만2천여 명이 전사했으며 부상자 수는 수십만 명에 달했다. 또 이름도 모르는 낯선 땅에 와서 피를 흘린 UN군 전사사는 3만7천명이 넘고, 부상자만도 10만 명에 이른다. 전쟁의 참사를 겪은 이 변호사는 아름다운 강산에 왜 이런 아픔과 참사가 생겼는지, 슬픔과 분노를 참지 못해 허공에 마구 총을 쏘아대기도 했다며 전쟁의 아픔과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 변호사는 듣도 보지도 못한 이역만리 머나먼 이국땅에 가서 희생을 치른 참전용사들은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며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 나선 전쟁이었겠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이들에 대해 할 말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전쟁의 폐해를 인식하고 평화와 번영을 이루는 일은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정전 60년이 지나 점점 잊힌 전쟁이 되고 있는 한국전쟁, 그러나 전쟁의 쓰라린 교훈을 되새기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르는 기념비 건립은 이 변호사에게 한국전쟁 참전용사로서 후세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유산이기도 하다.

글/김도균 기자
사진/최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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