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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일본총리의 ‘과거인식발언’과 한국 대통령의 대응
변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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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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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진일(辺真一) / 코리아리포트 편집장 ]


과거 20년간의 한일관계를 되돌아보면, 잘된다고 생각하면 나빠지거나, 악화된다고 생각하면 호전되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런 일이 일본도 한국도 정권이 교체될 때 마다 반복했다. 특히 한국은 정권말기에 강경자세로 바뀌는 경우가 특히 많았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에 의한 30년 이상의 군사정권을 종식하고, 1993년 2월 한국의 첫 문민정권인 김영삼 정권 탄생 반년 후 일본에서도 자민당 장기정권에 종지부를 찍고, 미야자와(宮沢)정권에서 호소가와(細川)정권으로 교체되었다. 한일 간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정권교체로부터 3개월 후인 1993년 11월, 호소카와모리히로(細川護煕)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삼회담에서 ‘우리나라의 식민지지배로 조선반도(한반도) 사람들이 모국어교육의 기회를 빼앗기기도 하고 성명을 일본식으로 개명시키기도 하고, 종군위안부, 징용 등 참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을 경험하게 한 가해자로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깊이 사죄드리고 싶다.’고 과거 문제를 언급. 그 결과 그해 양국 간에 ‘미래지향의 한일포럼’이 창설되었다.

호소카와 정권이 붕괴한 후에도 자민‧사회(自民‧社會)연립정권의 무라야마토미이치(村山富市)총리가 1995년 8월, 전후 50주년에 즈음하여 ‘우리나라는 멀지않은 과거 한때 국책의 과오로 전쟁의 길을 걸어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트리고 식민지지배와 침략으로 인해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 나는 의심할 수 없는 이 역사적인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면서 진심으로 사죄를 표명합니다.’라는 ‘무라야마 담화(村山 談話)’를 발표함으로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져도 한일관계에 영향을 받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3개월 후인 11월, 에토타카미(江藤隆美)총무청 장관이 ‘무라야마 발언은 잘못되었다’라며 ‘식민지시대에 일본도 좋은 일을 했다’는 발언에 김영삼 대통령이 격노하여 이후 무라야마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거부. ‘이번이야말로 일본의 나쁜 버릇을 고치게 해 주겠다’고 발언해 한일관계는 단숨에 식어버렸다.

냉각화한 한일관계의 수복에 나선 것은 후임의 김대중 대통령으로 정권을 발족한 1998년 10월에 일본을 방문하여 오부치케이조(小渕恵三)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21세기를 향한 한일 파트너십’이란 제목으로 공동선언문을 발표. 김대중 대통령은 예상과는 달리 천황폐하와의 회견에서 식민지문제에 관해서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오부치 총리 역시 ‘우리나라가 과거 한때, 한국국민에게 식민지 지배로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는 발언을 하고 ‘무라야마 담화’를 답습함으로서 한일관계는 수복되었다.

김대중 정권은 하시모토(橋本)정권, 오부치(小渕)정권, 모리(森)정권, 고이즈미(小泉)정권과 4대의 정권을 상대로 했지만 고이즈미 정권 때인 2001년 4월에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문제와 같은 해 8월에 고이즈미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靖国)참배문제가 발생하여 한일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김대중 정권 다음은 노무현 정권이었는데 대통령취임 3개월 후인 2003년 5월에 아소타로(麻生太郎)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이 도쿄대학 강연에서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요구한 것이고, 한글은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가르쳐준 것이며, 의무교육도 일본이 시작했다. 올바른 것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편이 좋다’는 발언이 전해져 한국 측이 태도가 경직되었다. 그래도 다음달 6월에 일본을 방문한 노대통령은 과거 문제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고이즈미 총리와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런데 2005년 2월 22일에 시마네 현(島根県)이 ‘독도의 날’을 제정하자 이에 반발한 노대통령은 3월 23일, ‘지금까지는 정부 간의 갈등을 초래하는 외교상의 부담이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 무엇보다도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생각했기 때문에 자제해 왔다. 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온 것은 미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한 행동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정부가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것이 일본의 자만심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앞으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한다. 우선 외교적으로 단호히 대응한다’고 국민을 향해 담화를 발표하고 단번에 강경자세로 전환했다.

더욱이 2개월 후인 5월에 아소타로씨가 다시 영국의 옥스퍼드대학 강연에서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올바른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되어야만 한다. 야스쿠니신사의 군인이 A급 전범이라고 결정한 것은 일본이 아니고 점령군이다.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문제 삼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과 중국뿐이다’라고 한국의 대응을 비판한 것에 대해 한국이 맹렬하게 항의했다.

그런데도 같은 해 8월 15일에 고이즈미 총리가 전후 60주년을 맞이해서 ‘우리나라는 과거 식민지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 역사의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과하는 자세를 표명한다’는 담화를 발표함으로서 진정되었다.

그런데 그것도 오래가지 못하고 고이즈미 총리가 2개월 후인 10월에 다시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등 노대통령은 ‘이제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다. 외교적으로 단호하게 대처한다’며 고이즈미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거부, 한일 셔틀외교를 전면 스톱시켜 버렸다.

김대중-노무현, 2대에 걸쳐 지속되었던 혁신정권에 이별을 고한 한국은 이명박 정권(2008년 2월∼2012년 1월)이 〈후쿠다(福田)정권-아소(麻生)정권-하토야마(鳩山)정권-칸(菅)정권-노다(野田)정권〉과 대치하게 되었지만, 이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식(2월 25일)에 후쿠다야스오(福田康夫)총리를 초대해 한일정상외교를 부활시킬 의향을 표명했다.

이대통령도 취임 초에는 ‘일본 정치가의 발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정치가에게는 각자의 의견이 있다. 역사인식은 일본문제이다. 문제발언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죄를 요구하지는 않겠다’고 말했었다.

취임 2개월 후인 4월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는 ‘앞으로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일본과는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갖고 싶다’고 말하며 후쿠다 총리와 한일관계를 한층 더 성숙한 파트너십 관계를 확대해 새로운 ‘한일 신시대’를 펼쳐 나갈 것을 확인했다.

이대통령은 2013년 2월에 퇴임할 때까지 7번 일본을 방문했고, 일본에서도 후쿠다 총리와 아소총리가 각각 1번, 민주당정권하에서는 하토야마 총리가 2번, 칸 총리와 노다 총리가 1번, 한국을 방문하는 등 셔틀외교는 완전히 부활되었다.

특히, 민주당정권하에서는 칸나오토(管直人) 총리가 2010년 8월 10일, 한일합병 100주년에 즈음하여 ‘나는 역사에 대해서 성실하게 대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사실을 직시할 용기와 그것을 받아들일 겸허함을 가지고, 스스로의 과오를 반성하는 것에 솔직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픔을 준 쪽은 잊어버리기 쉽고, 받은 쪽은 그것을 쉽게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 식민지 지배가 가져온 수많은 손해와 고통에 대해서 여기에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를 표명한다’는 담화를 발표한 것을 한국정부가 높이 평가.
그런데 칸 정권의 뒤를 이어 받은 보수색이 강한 노다 정권 때인 2011년 12월 일본을 방문했던 이대통령은 노다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가 종군위안부문제를 선처하지 않은 것에 실망, 반발해서 임기 마지막 해인 이듬해 2012년 8월 10일 역대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금단의 땅인 독도에 상륙했다.

독도 상륙 5일후인 광복절 (8월 15일)식전에서 이대통령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문제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올바른 역사에 반하는 행위이다. 전시여성인권문제로서 일본정부에 책임 있는 조치를 요망한다’며 일본에게 강요하며 한일셔틀외교를 또다시 중단 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의 박근혜 정권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선거공약에서는 일본과는 ‘협력의 미래를 향해 함께 협의 한다’며 전임자의 독도상륙으로 인해 냉각된 한일관계 타개에 의욕을 나타냈었다.

박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10일전 한국을 방문한 고노요헤이(河野洋平) 전 중의원 의장과의 회담에서 ‘한일간의 긴밀한 관계야 말로 동북아시아의 경제공동체나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비전을 실현하는 최초의 ‘버튼’이 될 수 있다’고 발언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일본이 피해자의 고통을 마음으로부터 이해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대통령 취임 3일전인 2월 22일, 아베정권이 시마네 현의 ‘독도의 날’ 행사에 정무관을 파견한 것에 반발해 대항조치를 시사 하면서 아베총리의 특사인 아소부총리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은 대일관계의 의욕의 표현이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아소부총리와의 회담에서 ‘한일 간의 진정한 우호관계 구축을 위해서 역사를 직시하고 과거의 상처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치유할 수 있도록 서로가 노력하자’고 호소한 것에 대해 아소 부총리는 ‘미국을 보기 바란다. 미국은 남과 북이 나뉘어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남북전쟁을 두고 북부의 학교에서는 변함없이 ’시민전쟁‘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이 있는 한편 남부에서는’북부의 침략‘이라고 가르친다. 이처럼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이라도 역사인식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는 더 더욱 그렇다.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것을 전제로 역사인식을 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반론. 나아가서는 ‘양국의 지도자가 신중한 발언과 행동을 통해 신뢰를 지속적으로 구축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2개월 후 아소부총리가 야스쿠니를 참배해 박대통령은 체면이 구겨져 완전히 풋튼(プッツン, 열 받는 상태)해 버렸다. 이후 한일관계는 지금과 같은 사태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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