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경제 / 손현덕 편집국 국차장]

▲ 손현덕 매일경제 편집국 국차장

평화통일은 정책 목표로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한 사람은 40년 이상 외교현장을 누빈 최영진 전 주미대사다.

그는 "협상에 의한 통일은 좋게는 이상, 나쁘게는 선전"이라며 "평화통일은 전례가 없다"고 말한다. 청나라 외교관 황준센의 `조선책략`이 나왔던 구한말 당시를 되새기면서 쓴 `신(新)조선책략`이란 저서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통일은 둘 중 하나다. 무력에 의하거나 아니면 어느 한쪽이 붕괴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대부분의 통일은 무력으로 이루어졌다. 역사적 사실이다. 평화적 방법은 무력 통일에서 위계 또는 보조수단으로 사용됐을 뿐이다. 예외라 할 수 있는 독일 통일은 동독의 붕괴에서 비롯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하고 통일준비위원회가 출범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통일의 민얼굴을 직시하지 않고 있다.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은 최근 토론회에서 "지금의 통일 논의가 다분히 북한 급변사태와 붕괴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고 말했는데 그건 염려할 게 아니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현실이다. 그게 통일의 민얼굴이고 그 길 이외는 불가능하다.

통일은 가슴 뛰는 일이다. 통일된 한반도는 분명 유라시아와 동북아를 연결하는 평화의 심장이 될 수 있다. 허황된 의제도 아니다. 그러나 간과하는 게 있다. 한편 착각하고 있다. 과연 대한민국이 원하는 통일을 국제사회에 진솔하게 밝힌 적 있는가. 그리하여 이에 동참하는 우군을 확보하고 있느냐다. 가깝게는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 일본 러시아가 한국을 지지하며 세계 각국이 우리와 같이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그 무슨 불경스러운 도발이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외교부는 올해 대통령에게 통일을 위한 국제적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힘도 있고 설득도 순조롭다고 말할지 모른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한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 실현을 지지한다"고 했고 러시아 푸틴 대통령도 "통일 한국의 역할을 기대한다"고 말한 걸 그 증거로 제시한다. 이 대목에서 평화통일은 `레토릭`일 수 있다는 최 전 대사의 주장으로 돌아가 보자. 불편하지만 질문을 바꿔야 한다. 북한 붕괴에 따른 한국 주도의 통일을 지지하느냐고. 중국ㆍ러시아가 평화통일이니 무조건 찬성한다고 말할까? 솔직히 내가 접한 주변국 외교관들은 한반도 통일을 `평화`란 대의명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자국 이익`이란 현실적 잣대로 들여다본다. 가슴은 뜨거울지 모르나 머리는 차갑다. 국경의 긴장을 언급하며 난민을 염려하며 핵무기를 말한다.

외교 역량이 커졌으니 문제없다고?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으니 걱정말라고? 그러나 착각은 금물. 부끄럽지만 우리는 국제무대에서 우리 주장을 관철시킬 힘이 부족함을 인정해야 한다. 국제정치는 결코 경제 순이 아니다. 10위권? 턱도 없다.

4년 전 천안함 피격사건이 있었다.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고 합동조사단이 발표했다. 이 분명한 사실을 두고 대부분 국가가 한국을 지지하고 북한을 규탄했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지구상에 220여 개 국가가 있지만 겨우 58개 국가만이 한국을 지지했다. 유엔이 포함됐으니 거의 모든 나라가 한국을 지지했다고 주장하는 건 궤변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 멤버지만 한국을 지지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공들인 아세안 10개국 중 4개국이, 유럽은 13개국만 지지했을 뿐이다. 한국과 수교한 나라가 190개국인데 이들 중 30%만 진정한 우리 편이었다.

변명은 구차하다. 세계 질서에서 명분은 포장일 뿐 정작 중요한 것은 국력과 국가 간 연대다. 그것이 한반도의 명운을 가를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새삼 우리에게 냉혹한 현실을 일깨워준다. 국력과 연대가 없는 통일 논의는 사상누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