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째 일어 가르쳐온 교사
- "참회로 시작, 이젠 친구돼"

(국제신문=김미희 기자) = 150㎝ 초반의 아담한 키에 정갈하게 빗어 넘긴 짧은 단발머리의 70대 할머니. 한 눈에도 '선생님'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지난 12일 부산 중구 중앙동 한 호텔에서 스즈키 히로코(76) 할머니를 만났다.

그는 기자와 만나자마자 색동 복주머니가 그려진 엽서를 건넸다. 이게 명함이었다. '안녕'이라는 한글이 적힌 초록색 보조가방 안에서 자료를 주섬주섬 꺼냈다. 일본 가와사키시 복지단체인 후레아이관의 재일교포 1세 할머니들이 지난해 만든 작품집이었다. 잡문, 서예, 그림 등 다양한 작품이 수록됐다. 작품집 안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환이 서려 있다.

스즈키 할머니는 20년째 후레아이관 문해(文解)학교에서 재일교포 할머니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다. 문해학교의 재일교포 할머니 수강생은 15명 정도다. 치매에 걸리거나 몸이 아파 문해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할머니도 많아 매년 숫자가 줄어드는 추세다. 그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딸이 문해학교를 알려줬다"며 "일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식민통치 참회의 뜻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덧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 이제는 재일교포 할머니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며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 달 21~23일 부산민주공원에서 열릴 '재일교포 할머니 문해학교 작품전' 준비를 위해 입국했다. 전시회 개최는 이번이 처음이다. 애초 가와사키시와 자매결연 도시인 경기도 부천시를 전시회 장소로 생각했다. 하지만 재일교포 할머니들의 고향이 대부분 경상도라는 점을 반영해 부산으로 정했다. 작품전 일정에 맞춰 서유순, 오금작, 김방자 할머니 3명이 부산을 찾는다. 모두 80세를 훌쩍 넘겼다. 서 할머니는 경남 합천, 오 할머니는 경북 안동이 고향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재일교포로 살아온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특별기획전도 준비하고 있다.

스즈키 할머니는 한국어에 서툴렀지만 '할머니'라는 단어만은 한국어로 자주 사용했다. 그는 "재일교포 할머니들은 전쟁, 가난 등 사회적인 환경 탓에 배움의 기회가 없었다"며 "일본어 회화는 능통하지만,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전혀 몰랐다"고 전했다. 길가에 버려진 신문을 읽는 일본 노숙인을 부러워할 정도였다고 했다. '나는 못 배웠다'는 재일교포 할머니의 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주는 것도 스즈키 할머니의 몫이었다. 걸음마를 배우듯 히라가나부터 차근차근 배웠다. 이제는 자신의 마음을 담은 글을 쓸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특히 초보자들도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일명 '키미코' 방식이 할머니들의 마음을 여는 데 도움이 됐다.

스즈키 할머니는 "재일교포 할머니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다. 인연을 쭉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3일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