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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소녀상’이 왜 글렌데일에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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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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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낙 / 가천대 명예총장, 의사 평론가 ]


   
▲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
LA여행계획이 잡히면서 글렌데일(Glendale)을 꼭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웃 도시 패서디나(Pasadena)에는 이름난 헌팅턴(Huntington)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공식 명칭은 Huntington Library). 15~18세기 프랑스‧영국 풍경화와 함께 많은 고서와 초상화는 물론 근대 미국 작가의 작품도 만날 수 있어 기회가 될 때마다 들르곤 했다. 그러나 인근 도시 글렌데일에는 발길을 옮기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교민이 많이 사는 미국 서부와 동부, 남부 지역의 여타 도시도 아니고 왜 글렌데일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져 있을까 하는 의문은 늘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위안부 소녀상과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한 1,000번째 ‘수요 집회’에 참석해 민족의 아픔을 함께 나눈 적도 있고, 기회가 있을 때면 소녀상을 둘러보곤 했기에 기념 동상 자체를 보고 싶어서라기보다 글렌데일에 세워진 유래를 알고 싶어 찾아 나섰다.

글렌데일은 재정적으로 비교적 부유한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라고 들었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 산업 중에서도 애니메이션과 관련한 특수 영상 제작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주민 중 아르메니아(Armenia) 출신이 주류를 이룬다는 한마디에 ‘그렇구나, 그렇다면…’이라는 작은 안도의 기쁨이 스쳐 지나갔다. 기념 동상은 계속 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얼마 전 글렌데일 시장이 일본의 한 언론 매체와의 대담에서 시장 자신은 개인적으로 동상 건립에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5명의 시의원(시장 직무를 시의원 6명이 돌아가면서 맡는 제도) 뜻이 반영된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부정적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는 기사 내용을 읽은 것이 필자의 기억에서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지금까지의 소수민족 수난사가 대변하고 있다. 코소보 분쟁이 그렇고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민족 수난사가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아르메니아인이 겪은 수난사는 대형 비사(悲史) 중 비사가 아닌가 싶다.

필자가 대학 시절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Dostoevsky Fyodor Mikhailovich, 1821~1881)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으면서 탄압받는 다른 소수민족에 대해 알게 되었다. “터키인들은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는 것부터 젖먹이 어린애를 공중으로 던졌다가 그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총검으로 찌르는 것에 이르기까지...”와 같이 잔학하기 그지없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읽으며 아픈 가슴을 가누기 힘들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마침 필자를 찾아온 친구에게 막 읽은 작품에 담긴 무서운 내용을 언급하였더니, 당시 터키군이 같은 무슬림이지만 종파가 다른 체르께스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할 때 기독교도들인 아르메니아인들은 더 큰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필자는 그런 소수민족, 그 같은 수난사를 처음 알았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후 1915부터 1919년 사이에도 오늘날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제국이 150만~2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사실도 알았다. 터키 영토에 살지만 무슬림이 아닌 기독정교(Orthodox) 신자들을 대상으로 참혹한 학살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터키 국가가 현대사에 크나큰 오점을 남긴 것입니다. 아마 그때 ‘종족 말살(genocide)’이라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터키가 그 만행에 대해 아직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았다는 게 현안이다). 필자는 ‘소수민족 수난사’ 하면 아르메니아인이 겪은 참상이 떠오르곤 한다.

한편 ‘아르메니아인’ 하면 두뇌나 이재(理財)에서 세계 으뜸가는 아주 특출한 민족이라는 정평이 있다고도 들었다. 1960년대 당시 세계 제일 부자가 아르메니아인이라고 언론 매체에서 보도하곤 했다. 그런데도 아직 아르메니아 사람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다. 그 가공할 만한 ‘종족 말살’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피침략자의 엄청난 쓰라린 역사를 가슴에 품고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침략자들의 만행을 지켜보는 정서는 여느 민족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의 뼛속 깊숙이 자리한 ‘원한의 DNA’가 오히려 민족 편견을 넘어 평화에 대해 더 큰 욕망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글렌데일에 세워진 ‘평화의 기념비(Peace Monument)’로 응집(凝集)된 것 같다. 우리에게 친숙한 소녀상 옆에 쓰인 비문에 그네들의 깊은 속내가 녹아 있다.

기념비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제국군 부대에 끌려가 성 노예로 학대당한 20만 명 이상의 네덜란드, 한국, 중국, 타이완,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략) 여성들의 희생을 기리는 평화의 기념비다. 2012년 7월 30일 글렌데일이 ‘위안부의 날(Comfort Women Day)을 선포하고, 2007년 7월 30일 일본정부가 이들 범죄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질 것을 주장하는 미국연방의회의 결의안 121호가 가결된 것을 기념한다. 이들 인권을 무시한 모독행위는 결코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게 우리의 절실한 희망이다(It is our sincere hope that these unconscionable violation of human right shall never recur). 2013. 07. 30.”

범인류 차원의 인권 유린 문제라는 경고문이다. 글귀에서 그네들이 외치는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 도시에서 유대인들의 사원인 시너고그(Synagogue)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인들만의 기독정교 사원은 본 적이 없는데, 글렌데일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며 ‘평화 기념비’가 아르메니아인의 마음 깊은 곳에서 탄생했다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 힘센 주변국의 소수민족으로 살아온 아르메니아인들이 평화에 대한 갈망하는 소리가 ‘위안부 소녀상’ 주변에서 맴돌고 있었다. 
 

(출처 :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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