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7.11.24 금 18:01
재외선거, 의료보험
> 오피니언 > 칼럼
한일 화장 문화의 현실 ; 공수래공수거를 느끼며
이수경 교수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3.11.25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 이수경 / 도교가쿠게이대학 교수 ]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장레식장에서) 
2013년 11월 14일, 일본 궁내청은 1617년 이래 처음으로 현 아키히토(明仁) 일왕이라 칭함)부부의 사후 장례는 매장이 아닌 화장을 하여, 도쿄 하치오지시 무사시료(八王子市武蔵陵)에 선친보다 작은 규모의 묘에 안치한다는 발표를 했다. 유교성향이 강한 한국도 요즘은 화장 및 납골 문화가 널리 퍼져있고, 바쁜 현대사회에 맞춘 간소화 경향에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의 한국 화장률이 74%라고 발표했는데, 일본의 화장률이 99.9%임을 감안한다면 한국보다도 일본이 화장 및 납골당 문화가 일반적이다. 현재의 일왕 부부도 그런 시대적 흐름과 사회적 경향을 반영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기왕 소개한 김에 필자가 일본서 느낀 현재 일왕 부부와 한국 관련 기사를 소개한다.
2차 대전 말기 연합군의 공습을 피해서 피난을 했다가 돌아온 어린 왕세자(현 일왕)는 참혹하게 폐허가 된 도쿄의 현실을 목격하게 되고, 전쟁의 잔혹함이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는 평화론을 염두에 둔 연호 헤이세이(平成, 일본에서 사용되는 연호)시대를 명명하였다.
그리고 과거 식민지통치 지배를 해 왔던 한반도와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둔 그는 2001년 12월 23일의 68세 생일에 교토 헤이안시대를 연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임을 밝혀서 일본과의 관련성을 역설한 바가 있다. 갑작스런 그의 속내가 표출되었던 터라 당시 궁내청 및 일본 정부는 언론의 언급을 규제하는 듯하였고, ‘News week’지에서만 다양한 분석 기사가 게재되었다.

일본은 1868년의 메이지유신과 더불어 강력한 제국주의 전개를 노렸던 세력들에 의해 ‘천황의 신격화’가 형성됨과 더불어 군국주의 노선에서 침략전쟁을 자행해왔고, 패전 후인 1946년 1월에는 일왕의 ‘인간 선언’과 더불어 ‘일본국의 상징과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적 존재로 헌법1조에 게재된다. 결코 군대를 가지지 않고 국제 전쟁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헌법에 명시하면서 국제사회에 복귀한 일본에서의 일왕의 정치적 활동은 한정되어 왔으나 여전히 일본 국민들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로 남아있기에 그들의 존재는 여느 정치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활동에 대해 각계각층이 예의 주시할 뿐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이 정책적 영향력과 관련되는 사회 환경상, 일왕부부가 쉬이 속내를 토로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2005년 6월 28일, 과거 일본의 격전지였고, 전쟁 노동자로 1천여 명의 한국인이 끌려가서 희생이 된 사이판에 ‘지난 2차 대전 때 전몰한 모든 해외 전몰자들을 추도하고 세계 평화를 염원한다.’는 취지로 방문했던 일왕부부는 일본 측이 건립한 ‘중부 태평양 전몰자의 비’ 및 패망 때 미군에게 투항을 거부한 일본군 병사 및 일본인들이 뛰어내린 만세 절벽(죽을 때 일본 및 일본 천황 만세를 외치고 자살했다는 절벽, 일본에서는 Banzai Cliff로 칭함)에서 추도를 한 뒤, 그 곳에서 200미터 가량 떨어진 한국인 전몰자 위령탑 ‘태평양 한국인 희생자 추념 평화탑’에도 일왕 부부가 방문해 묵념으로 추도를 하였다.

애초 일본 외무성조차 한국인 유족 단체의 방문 요구에도 일왕의 평화탑 방문은 없을 거라 표명했던 터라 급작스런 일왕부부의 일정 변경은 한국 측에서도 놀랐고, 무엇보다도 그런 상황이었기에 당시 평화 탑에는 한국인 관계자가 한 명도 없었다 한다. 그만큼 주변 관계자들에 관리되는 스케줄인 만큼 미리 알리면 그들의 취지대로의 실천이 쉽지 않으리란 예상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2010년10월, 나라(奈良)에서 개최된 ‘제1회 동아시아 지방정부 회합’에서도 2001년의 “‘속 일본기’에 따르면 간무 천황 생모는 백제 무령왕을 선조로 하는 백제 도래인(渡來人)의 자손이다”라는 언급을 재차 강조하며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강조했었다.  군사적 재무장 정책과 시대역행적인 우경화 노선이 현저해지면서 일왕의 정치적 이용을 위한 정책 전략이 꿈틀거리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과거 식민지 지배통치에 대한 반성과 희생자 추도에 대한 일왕부부의 행동 및 발언에 가해지는 행동적 제약도, 주변 간섭도 적지는 않은 듯하다.

우익세력들의 일왕부부 절대 숭배화 움직임이 여전한 가운데 천황제 폐지론을 논하는 시민운동의 움직임 등, 다양한 왕족 존폐론이 있지만 지금도 일왕 부부는 일본 시민들의 정신적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다.

팔순을 맞이한 노부부는 3.11 동북대지진 직후, 여느 정치가들보다도 빨리 현장 피해자들 위문을 갔었고,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후 불거졌던 영토문제 재론 때 미치코 왕비(민간인 출신)는 한국관련 역사책을 주문하였다는 소리도 들렸다. 일왕 측근의 얘기에 따르면 왕실 생활을 보다 축소시키며 검소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부부라고 평가되는 만큼, 이번 장례식 준비에 임한 화장론은 그만큼 현실적 시대 상황을 반영하며 불필요한 절차 등을 줄이고 화려한 매장 문화를 가급적 축소시키겠다는 그들의 의도라고 볼 수 있겠다.

필자가 이 뉴스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지난 11월 2일, 필자가 코리아나 호텔에서 개최된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주최의 정책포럼에 참가, 발표를 하던 당일, 부친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당뇨병과 류마티스 합병증 등으로 오랜 세월 힘들게 살다 가신 분이셨기에 생전에 당신은 조상들을 모신 강릉의 선산보다 아파했던 삶을 훨훨 털고 세상을 떠나고 싶다며 화장을 강하게 원하셨기에 토장보다 화장을 선택하게 되었다.

필자는 어린 시절 개인적 트라우마 때문에 각국의 무덤은 많이도 찾아 다녔으나 이 나이가 되도록 장례식을 가 본 것은 내 부친상이 처음이었다. 화제를 바꿔서 아버지의 입원 및 화장을 보고 느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해 보려한다.

   
▲ 이수경 교수 부친의 영정사진
아버지는 당뇨병 합병증 증세 등으로 몇 번인가 입원을 하셨는데, 처음 입원을 한 것은 25년 전 쯤, 필자가 일본에서 잠시 아버지를 모셨을 때였다.
당뇨병 후유증이 오면서 87Kg의 아버지는 47Kg으로 체중이 격감했고, 합병증 증세가 다양하게 나와서 몇 개월 동안 간병에 임했던 적이 있었다. 필자의 친구 의사들이 집도를 한 후유증 관련 수술 후, 몇 개월 동안 인슐린 투약을 했더니 건강은 회복되셨는데, 그 때 처음으로 약한 아버지 모습이 안타까워 간병에 몰입하다 필자가 쓰러졌던 기억이 있기에 환자를 간병하는 가족의 건강도 중요함을 절실히 느꼈던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 내 사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정작 부모님이 노쇠하여 가는 것에 무관심한 사이에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참으로 불효자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10월 초, 동생들로부터 아버지의 중환자실 입원 소식을 듣고선 일본의 3연휴 첫 날, 제자들 덕분에 부산행 비행기 티켓을 구해 부산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필자는 한 때 삶의 전환을 시도하려고 처음 일본에 왔을 때 의대를 지망하며 공중위생학 등의 공부ㅂ 하면서 지인 의사들의 협력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해부된 니코틴 가득한 사체의 간장을 본 순간, 아무래도 필자에겐 용기가 부족함을 느끼고선 역사학 쪽으로 방향 전환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수술 현장 입회나 의사 친구들 덕분에 병원을 가까이 하고 살았기에 중환자실은 그다지 낯설지만은 않았다. 단지, 예상 밖으로 노쇠하고 변형된 손의 뼈 상태 등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과 나의 무관심에 대한 반성만이 일 뿐이었다.

정해진 하루 두 번 30분씩의 면회는 짧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속에서 최대한의 시간을 아버지께 인사를 드렸고, 50년 넘게 함께하신 아버지의 입원으로 오열과 자책만 하시며 몸을 가누지 못 하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오랜만에 목욕까지 시켜드렸다.
하지만 결국 휴강하고 급하게 갔기에 며칠 뒤엔 도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회복을 보이시고 일반 병실로 옮기신 아버지는 직후에 다시 중환자실로 옮기셨다. 면역이 약해진데다 폐렴으로 폐에 물이 차고 의식을 잃으셨다. 살 수 있는 가망성이 30%라는 소리를 듣고선 학교 중요업무를 동료교수들 4명에게 부탁한 뒤, 250명의 인권학 수업만 마치고선 부산행 티켓이 없어서 하네다와 김포 간 티켓을 급조한 후, 저녁 비행기로 김포로 향했다. 도착하여 짐을 찾으니 밤 11시 30분.

부산으로 가는 KTX 마지막 열차는 밤 11시 30분에 끝났고, 형제들은 이미 부산으로 떠난 상태라서 425킬로 떨어진 부산가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처음으로 고속버스 심야우등을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12시 넘어서 출발한 고속버스가 새벽 4시를 넘겨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앞뒤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택시를 타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도쿄서 도착한 절박한 상황을 말하자 잠시 기다렸다 짧은 면회 시간을 배려해 주어 들어갔더니 지난번과는 달리 이미 입에는 인공호흡기가 부착되어 있었고, 호스 거부로 생긴 입 주변의 상처가 고통에 대한 처절함을 말 해 주고 있었다. 미어지는 가슴을 자제하고선 겨우 버티시는 아버지 귓가에 대고 지난날의 에피소드와 함께 꼭 재기하셔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청각의 반응 탓인지 가슴 언저리가 벌겋게 변하며 답을 해 주셨다.

정상적인 오전 면회까지 다른 가족들과 합류한 뒤, 낮 면회를 마치고 주치의의 설명을 듣고 싶어서 신청을 했더니 진료실로 가라고 한다. 간병을 맡아주던 분이 주치의를 챙겨야한다기에 그런 문화에 익숙지 않게 살아왔던 필자지만 챙겨들고 집도한 의사를 찾았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낀 것은 개인 성격인지 혹은 한국의 병원 분위기 탓인지 모르지만 일본의 수술 전후에 행해지는 정중한 설명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필자보다는 분명 젊어 보이건만 영어와 반말을 섞어가며 시술상황과 대응책을 설명하는 의사의 표현은 의료종사인 치고는 친절하고 성실한 태도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영어 용어 사용이 많기에 간단한 영어로 되받으니 “우리는 영어로 하니 대화가 되네요”라고 말하고선 다음부턴 경어를 사용한다.

그 뒤, ‘아빠(이런 표현도 필자는 익숙할 수 없었다)는 10%의 가능성 밖에 없지만 열악한 한국 의료보험시스템의 현상 이해와 보험적용 외의 약을 마음껏 투약해보면 살 확률도 있다]고 말하기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말하며 나왔지만, 필자로선 익숙하지 않는 탓인지 씁쓰레함을 불식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조금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차라리 지인들 소개를 받고 다른 곳으로 옮겨보고 싶었지만, 이미 몸은 부기로 가득했기에 아버지의 생명력을 믿으면서 다음 날의 서울 교포정책포럼 발표에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드린 뒤,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울행 열차를 탔다.

열차 속에서 주마등같이 스쳐가는 아버지와의 숱한 기억 때문에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나왔다. 넋 나갔던 탓에 서울역에서 숙소까지 택시를 탔는데 어리석게도 택시에서 내리면서 중요한 책 자료나 컴퓨터가 들어있는 트렁크 가방을 택시에 놓고 내렸다. 이미 차는 멀리 가버렸고, 현금 지불을 했던 터라 필자가 기억하는 게 없었다. 단지 흰머리 안경의 운전기사였다는 사실 밖에.
망연자실하면서 주최 측 기자들에게 찾아달라고 부탁하고선 지인들에게도 연락하여 교통 방송과 유실물 센터, 전국 경찰 연락망 등 가능성이 있는 웬만한 곳은 다 찾도록 수배 부탁을 했다. 물론 관련 CCTV도 물었으나 내린 곳이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물건을 놓고 내렸을 때는 택시번호 혹은 회사, 그리고 신용카드 결제가 중요 실마리가 된다는 것을 체험한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다짐하며 11월 2일에 포럼 발표장에 들어가니 와이파이가 연결 되면서 ‘새벽에 아버지가 운명하셨다’는 동생들의 SNS대화창이 떴다. ‘누나에겐 일부러 전화 하지 말라’는 배려의 대화들도 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으나 아버지라면 내가 맡은 일을 제대로 마치는 것을 더 원하시리라는 생각에 내색을 않고 발표를 마쳤다. 인내하기에는 참으로 벅차고 길기도 긴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포럼을 마치고 간단히 인사를 한 뒤, 지인 교수 안내로 서울역에서 부산행 열차를 탔다. 중간에 대구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는 제자가 장례식장에 먼저 갔다가 동대구역에서 필자를 기다린다고 하여 경황없이 플랫폼에서 만났다. 깊은 배려로 정신없는 필자를 지탱해 준 그녀가 고마웠다. 역에서 헤어져 부산역에 도착하여 병원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더니 웃으시는 아버지의 영정 사진의 빈소가 마련되어져 있었고, 관계자들이 보낸 조화가 입구 양쪽을 장식하고 있었다.

필자를 기다렸던 형제와 가족들이 내 준 상복은 어릴 때 필자가 봐왔던 소복이 아니라 검정색 개량 한복이었다. 유교식 절차로 동생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절을 하자니 걷잡을 수 없는 눈물에 결국 참지를 못 했다.
하지만 수면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는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내면서 느낀 것은 많은 친인척 지인들의 방문으로 시끌벅적하였기에 비애에 찬 시간만은 아니었다. 또, 필자에겐 몇 십 년 만에 만나는 친인척들도 있어서 함께 기억을 더듬기도 했고, 서울서 수업 중에 와 준 동료 교수나 감기를 앓으면서도 와 준 언론사 친구도, 예상 밖의 제자들도 알고 찾아와줬기에 참으로 마음 따스한 시간들이었다.

발인 당일, 입관 직전에 아버지 마지막 모습을 끌어안으니 마냥 주무시는 듯 하였지만 몸의 온기는 사라진 뒤여서 ‘삶과 죽음’의 현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장례식을 통하여 상주인 아들 중심의 절차가 되었고, 다음에 며느리, 친 손주, 그 다음에 딸이라는 순서(저 출산의 소자화가 계속 되는 시대 상황에선 개선할 점도 많았다)를 확인하였다. 필자가 생전 처음 장례식에 임했기에 다른 식장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니 이 부분은 각설하기로 한다.

동생들의 친구들이 운구를 옮긴 뒤, 버스와 영정차로 나눠서 타고 병원서 예약한 부산 근교의 화장터로 옮겼다. 우리는 아침 일찍 화장터를 향했으나 화장 순서가 밀리는 상황이었다. 필자는 3남1녀의 장녀인데, 장남이 아버지와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았었기에 특히 눈물이 많았었다. 화장 소요시간은 약 2시간가량, 각자의 기억 속의 아버지와 이별을 하며 오열을 하는 가운데 재가 되어 납골을 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한 줌의 재]가 될 것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사시다 가셨나? 하는 생각과, 건강하게 살기 위해 남은 우리도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각종 수속을 마치고는 병원으로 돌아와서는 상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친척들과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 후에 손님을 배웅하고선 형제와 어머니만 남게 되자 필자도 학교로 돌아가야 하던 터라 아버지의 사망신고 등의 급한 행정상 수속을 마치려고 서로 협력을 하였다. 그리고 도쿄로 돌아오기 위해 마음을 추스른 와중에 4일 만에 나를 태웠던 서울의 택시 운전기사로 부터 동생 휴대전화로 연락이 들어왔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였었고, 방송, 경찰 유실물 조사 등의 수배가 다양한 형태로 들어간 4일 뒤에 연락이 왔기에 다른 것은 일체 묻지를 않았고, 그냥 교포문제연구소에 전화하여 가방을 받아놓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선 오후에 서울로 향했다. 트렁크 속의 내 노트북 체크를 했더니 누군가가 매일 만졌던 흔적이 데이터에 남겨져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될 필자만의 정보가 많기에 무단 사용은 법적 제재가 수반된다는 것쯤은 상대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다른 물건이 분실되지 않았던 터라 모든 것을 잊기로 하였다. 더 복잡하게 생각해본들 내 구멍 난 듯한 공허한 정신만 어지럽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입원에서 납골까지 경황없이 흐른 시간 속에서 화장 문화의 경험과 가슴앓이와 치유, 아버지를 통해 본 나의 가야할 길 등, 실로 다양한 산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자식에 대한 큰 교육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도 학교 캠퍼스를 걷다가 낙엽이 떨어지면 절제를 못하고 눈물이 쏟아진다. 엊그제 교수회의를 마친 뒤 비슷한 시기에 아버지를 잃은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모두 4-50대의 중년들이지만 부모님에 대한 아픔으로 가득했고, 도쿄가쿠게이대 통곡 모임을 만들자고 의견 투합까지 하기도 했다. 한 동료는 사찰의 승려인데 10월 말에 밀장으로 했기에 12월에 다시 장례식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렇게 각자의 가족과의 이별을 아파하며 서로 협력해서 위로하며 건강하게 살자는 결의 아닌 약속까지 하게 되었기에 학교가 따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좋은 기억들만이 떠올라서 더더욱 믿겨지지 않는 아버지의 죽음을 치룬 뒤, 덩그러니 남겨진 내 영혼이 주체하지 못할 때, 팔순이 된 일왕 부부도 화장을 선택했다는 뉴스를 보면 필자의 마음도 토로할 겸 소개를 해 보았다.
장례식에 직간접적으로 필자를 지탱해 주신 한일 양국의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생각지도 못 했던 제자들의 감동적인 배려에도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시간이 흘러야 감정이 추슬러지겠지만, 지금은 불편한 몸으로 아버지 이야기만 하시는 어머니가 부디 건강을 되찾아서 올 겨울을 버텨주시기만을 빌 뿐이다.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회사소개광고문의기사제보구독신청찾아오시는길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 110-888 서울시 종로구 종로 19 B동 1118호 (종로1가, 르메이에르종로타운) | Tel 02)2075-7141~3 | Fax 02)2075-7144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 01003 | 등록일자 : 2009. 10. 24 | 발행인 : 이구홍(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 개인정보취급담당자 : 최유정
Copyright 2008 세계한인신문. All Rights Reserved.mail to oktime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