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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한인 젊은이여, 미래를 내다보며 큰 꿈을 키우라
김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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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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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석 / (재미)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 ] 
 

* 이 글은 김동석 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가 재외동포재단에서 실시한 '재외동포 저명인사 초청 순회강연' 프로그램일환으로 방한해 10월 11일부터 12일까지 춘천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인천 외국어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한 내용이다. - 편집자 주



저는 춘천고등학교 49회 졸업생 김동석입니다. 초등학교를 화천에서 다녔고, 강원중학교를 거쳐서 춘천고에 입학했습니다. 춘천고생이었던 74년, 75년, 76년 그 3년 동안 정말로 많은 가능성의 꿈을 꾸었었습니다. 서울서 대학을 다니고서는 곧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당시의 한국 상황은 젊은 사람들을 아주 답답하게 만드는 상황이었습니다. 빈부 격차가 너무 심했고 도시와 농촌간의 차별도 또한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춘천의 하늘밑에서 세상을 꿈꾸었는데요… 현실은 너무나 제한적이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춘천에서의 소년시절 세상 밖을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서는 탈출구를 궁리했는데, 그것이 유학이었습니다. 1985년 미국으로 갔습니다.

한 치의 가능성에도 관심을 갖고 집요하게 집중하라

   
▲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닉슨 대통령이 마오쩌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필자는 이 사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국제정세의 흐름에 관심을 갖고 한국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뉴욕일보
여러분과 같은 그 나이에 저를 가장 답답하게 만든 것은 미국의 대통령 리차드 닉슨이 북경으로 날아가서 모택동 중국 주석을 만나는 사진 한 장이었습니다.

미국은 우리가 은혜를 입은 가장 가까운 나라이고 중국은 죽의 장막, 철전지원수의 공산주의 나라인데 어떻게 두 나라의 지도자가 웃으면서 악수를 할 수 있을까?

당시 사회선생님의 설명도 장황했지만 답이 아니었습니다. 대학에 다니는 형님도, 형님의 친구도 그 역사적 배경에 관한 속 시원한 해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라밖에 관한 내 의구심이 서서히 증폭되기 시작되었습니다. 뭔가 더 알아야 할 것들이 나라밖에 있을 것이란 막연한 추측이 늘 가슴을 답답하게 했습니다. 알고 보면 청소년기에 머리 한 구석에서 싹터 오른 지적 호기심이었습니다. 아마도 저는 이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진 셈입니다.

나라밖을 늘 꿈꾸고 거기에서의 역할을 찾으려고 했던 생각이 30여년이 훨씬 지났지만 아주 또렷하게 생각이 납니다. 당시 저의 주변에선 허황된 관심이라고, 그리고 나이에 맞지 않는 시간을 낭비할 뿐이라고 아주 냉소적이고 조롱 섞인 취급을 받았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 학교교지에 ‘중공의 알듯 말 듯 한 현실’이란 글을 썼던 생각이 납니다. 모두들 어울리지 않는 관심, 시간만을 낭비하는 허황된 생각이라고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미국에서 소수계 이민자로서 감히 워싱턴의 중앙정치권에서 이만한 영향력을 만들어 낸 것은 돌이켜 보면 순전히 이러한 무모하고 허황된 것으로 판단하는 거의 불가능한 일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서 이루어 낸 성과입니다.

고이즈미의 과욕을 깨다

2006년 1월이었습니다. 당시 워싱턴은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잘못된 이라크 전쟁의 이유로 집권당인 공화당이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2001년부터 만 6년 동안 9·11테러의 여파로 모두들 숨죽이면서 권력이 이끄는 대로 따르기만 했습니다. 일본이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서 부시 대통령의 비위를 잘 맞추어 주었습니다. 미국의 요청이 없음에도 이라크전쟁을 위한 전비를 싸서 백악관에 보내곤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미국과 일본관계가 이렇게 밀월이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는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때는 이 때다’라며 총리직의 은퇴를 앞두고 워싱턴 의회를 겨냥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총체적인 인정(존중과 존경의 리더십)이라고 일컬어지는 워싱턴 연방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자가 되려는 욕심을 냈습니다.

세계적인 지도자요 인류에게 구체적인 공헌을 한 리더십을 인정하는 공적이 있어야 합동회의 연설자가 됩니다. 만일에 고이즈미가 합동회의 연설자가 된다면 그가 글로벌 리더십을 갖고 있다는 인정이 되는 일입니다. 이 연설은 세계의 지도자들이 한번쯤은 누구든지 꿈을 꿔보는 일입니다.

고이즈미 총리는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하겠다고 부시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당시에 하원의장은 435명의 하원의원 중에 가장 친일파로 알려진 데니스 해스터트였습니다. 저는 고민해 봤습니다. 만일에 역사왜곡의 원흉인 극우 총리 고이즈미가 상·하원 합동회의의 연설자가 된다면 마치 미국이 일본 극우파의 정치적인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결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과 한국인들에겐 보통 이만저만의 일이 아닙니다. 국가 지도자간의 일이기에 그것을 막아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이 보였습니다.

당시 저는 이것을 저지해 보자는 의견을 냈지만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 했습니다. 부시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간의 관계와 하원의장의 친일성향을 봐서는 도저히 그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합동회의 연설자가 되는 과정에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바로 하원외교위원장을 주목했습니다. 합동회의 연설자로 초청되는 과정은 하원외교위원장의 요청으로 하원의장이 승낙을 해야 합니다. 고이즈미 총리를 연설자로 결정 하자고 하원의장이 먼저 의견을 내면 낭패였습니다. 하원의장이 의견을 내기 전에 이 사안에 대한 외교위원장의 입장을 만들기로 결심 했습니다.

당시 외교위원장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참전 했던 일리노이 출신의 헨리 하이드였습니다. 그의 지역구인 일리노이의 한인들 요청이란 서명을 받아서 헨리 하이드 위원장에게 “우리는 고이즈미 총리의 합동회의 연설을 환영한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신사참배를 하지 않겠다는 공개적인 의사 표명을 해야만 할 것이다”는 편지를 직접 전달했습니다.

물론 위원장을 직접 면담하기 위해서 그의 보좌관들을 수도 없이 찾아다녔습니다. 열흘 이상을 거의 농성에 가깝게 위원장 사무실 앞에서 진을 쳤었습니다. 위원장은 시민의 요청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헨리 하이드 위원장은 우리가 전달한 서한의 내용과 다르지 않은 편지를 하원의장에게 CC를 치면서 고이즈미 사무실에 보냈습니다. 2006년 5월 30일자 동경발 연합뉴스 특종은 “고이즈미 총리실은 미연방의회 합동연설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인의 생리 파악하다

허황되고 무모하다고 쉽게 단념하지 않고 한 번 더 고민해 보고 궁리한 결과가 정말로 큰일을 해 낸 것입니다. 저는 긴요하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자부했습니다. 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관심을 집중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결과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저는 워싱턴을 상대로 하는 일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기라성 같은 유력한 거물 정치인들, 그들도 역시 선량한 시민들의 정당하고 이유 있는 요청을 절대로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이 경험을 토대로 그 후에 우리가 워싱턴서 만들어 낸 성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과 미국 간 비자면제 프로그램을 의회에서 통과 시킨 것입니다. 2007년엔 미연방 하원에서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미연방의회의 도서관과 국무부의 지리위원회에서 ‘독도’라는 표기를 한국과 일본의 중간이름자인 “리안쿠르트 락” 이라고 변경하는 것을 막아내기도 했습니다. 거만하게만 보이는 그 높은 연방의회의 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반중국”과 “친일본”으로만 구분되던 연방의회 내에 “Korea Caucus"를 조직해내기 시작했습니다. 실 날 같은 가능성에도 집요하게 집중하면 큰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제가 반복해서 겪는 경험입니다.

큰 꿈, 높은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다만 시간이 문제다

현재 미국의 대통령이 흑인입니다. 그가 지금은 연임하는 현직 대통령이지만 불과 십 수 년 전엔 시카고에서 흑인들의 정치참여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저는 지금 뉴욕과 뉴저지 주에서 아시안계 정치참여 운동단체를 조직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바마가 선출직 정치인으로 나오기 전, 시민단체 활동을 할 때부터 그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소수계의 권익운동을 한다는 차원에서 서로 만났고 알고 지냈던 것입니다. 그는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을 거쳐서 연방상원의원, 그리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오바마, 꿈을 이루는 과정

오바마가 일리노이 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에 도전장을 냈을 때인 2004년에 뉴욕의 아시안계 활동가들이 그의 선거를 위해 열심히 뛰었습니다.

   
▲ 춘천고에서 강연중인 김동석 KAVC 상임이사
오바마가 전국정치권에 데뷔를 한 2004년도 보스턴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그를 가까이 만났었습니다. 그때 그는 작은 목소리로 “연방상원의원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은 대통령에 도전한다. 아마도 그것이 10년 후가 되든 20년 후가 되던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직접 말했습니다.

그가 크게 결심하고 연방상원의원에 출마를 선언했던 때가 2004년이었습니다. 그때엔 존 케리, 지금의 국무장관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고 오바마가 케리의 낙점을 받아서 케리를 위한 선거유세를 다녔습니다.

2004년에 오바마는 예상대로 연방 상원에 진출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 출마의 결심을 굳히려고 그가 뉴욕을 찾아왔습니다. 당연히 저도 불려 나갔습니다. 당시엔 민주당 내엔 온통 ‘힐러리 클린턴’ 판이었습니다. 힐러리가 대통령에 출마하고 당선 된다고 하는 예상은 거의 100%였습니다. 그때에 오바마가 자신의 야무진 꿈을 내 보이면서 차츰차츰 힐러리의 아성을 허물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도엔 정치권 어디에도 오바마는 눈에 뜨이지 않던 무명의 인물이었습니다. 일리노이 주 내의 정치인들 틈바구니에 이리저리 끼어들어 보려고 했던 때였습니다. 그는 LA에서 개최되는 200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자비로 참가했다가 마지막 날 앨 고어가 후보수락연설을 할 때엔 입장권이 없어서 빌려 타고 간 친구의 털털 거리는 무스탕 자동차를 운전해서 시카고로 하루 일찍 돌아왔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런 그가 4년 후엔 연방 상원의원이, 그리고 또 4년 뒤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정말로 그는 크게 꿈을 꾼 것입니다.

그는 1980년부터 멀리멀리 보고서 흑인들의 정치참여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을 바라보면 “높은 뜻. 큰 꿈”입니다. 그는 아주 명석하고 우수한 사람이었습니다. 흑인으로 백인사회에서 특별나게 출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버드대학의 법과대학 출신은 흑인이라도 어디든지, 그리고 무엇에고 보장된 보증수표입니다.

그러나 그는 ‘흑인’이란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흑인 한 두 명이 주류사회 내에서 출세를 하는 일이 큰 역사의 흐름을 통해서 어떠한 의미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 탁월한 두뇌와 우수한 경력을 갖고서 그는 백인주류사회로 가질 않고 시카고 슬럼가의 흑인 불량청소년들 틈으로 갔습니다.

대다수 흑인들의 열악한 삶의 환경을 직접 체험하면서 그는 일반 (서민)시민들의 치료받을 권리와 교육받을 권리에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오직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선출직 정치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높은 뜻입니다.

LA 흑인폭동의 교훈

여러분, 저는 전깃불도 없는 강원도 화천의 아주 첩첩산중의 산골소년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워싱턴 연방의회에 제 역할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극심한 인종차별에 시달리는 소수중의 소수인 한인들의 인권침해, 인종차별을 목격하고 나 스스로도 한인사회의 일원임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미국서 출세를 한다 해도 미국 내 한인이라는 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같은 유색인종이고 수수계이면서 소수계로 소속감을 갖지 않고 백인의 흉내 내기로 살아가는 오늘날의 미주한인들이 얼마나 위험한 삶의 자리에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백인들로부터 차별당하고 남미계나 흑인계로부터 공격당하는 그런 처지가 미국 내 200만 이상의 한인들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나라에서 식량배급을 줄였습니다. 배급에 배고픔을 의지하면서 하루하루 동물처럼 살아가는 대도시내 극빈자들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길거리의 한인상점들을 공격해서 물건을 훔쳐내고 가게에 불을 질렀습니다. 1992년 LA폭동이 그것입니다. 남미계와 흑인 폭도들입니다.

당시 백인 지도층은 그들이 배고파서 그랬으니, 일시적인 사회현상이라고 폭도들을 범죄자로 규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미계정치인들과 흑인정치인들의 요청을 백인정치인들이 슬그머니 받아들였습니다. 미국이 법치국가가 아님을 뼈저리게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한인 정치력신장 운동’입니다. 30년간의 목표를 세웠습니다. 몇몇이 여기에 청춘을 바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지금 서서히 20년을 넘고 있습니다. 바로 ‘높은 뜻’입니다. 그리고 30년이란 길고 긴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뉴욕에서 한인들의 투표참여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뉴욕도시권내 한인들의 5만여 표를 모았습니다. 우리가 모은 5만 여 표는 곧바로 몰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치인들을 당선은 시키지 못해도 낙선은 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지역과 연방정치인들이 우리에게 바싹 긴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가 바로 의회에서 우리가 성취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결론은 ‘높은 뜻과 큰 목표’ 입니다. 명분이 뚜렷한 일에 목표가 분명하면 반드시 성취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시간이 문제입니다.

풀뿌리 정치참여운동

미국에서 제가 하는 일을 아주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한인들을 정치참여로 이끌어서 미국의 모범시민의 되게 하는 일입니다.

다인종 사회인 미국에는 “참여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여의 핵심은 정치참여입니다. 한인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곧 한인들의 권리와 이익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동시에 한미관계의 발전을 위해서 가장 요긴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한인들은 미국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한국과 미국의 관계의 땅”에서 살고 있다고 해야 정확한 말입니다. 두 나라의 관계에 이상이 생기면 미국 내 한인들의 일상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의 사건이 터지면 한인의 자녀가 학교에서 동료학생들로부터 이런저런 어려움을 겼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미국의 한인들은 미국에서 살면서 한국을 위해서 일하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은 미국의 시민 입장을 아주 명학하게 갖추어야 합니다. 중동지역의 아랍권 국가들 틈바구니에서 “인종적인 섬나라”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이 저렇게 건장하게 버티는 것은 미국 내 6백만 이상의 유태계들의 덕분입니다.

미국의 유태계들은 소수이면서 다수인종인 주류 백인들보다도 시민사회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들의 두뇌가 우수하고 민족적 결집이 타민족보다도 우수한 측면도 있지만 중요한 점은 그들이 아주 적극적으로 미국사회에 참여한다는 참여에 있습니다. 미국서 유태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선 지역사회 발전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참여하고 기여합니다. 워싱턴에만 모이면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일에 무섭게 나섭니다.

여러분들에게 한번 ‘AIPAC’이란 유태계들의 시민단체를 소개할까 합니다. ‘AIPAC’은 미국시민단체이면서 이스라엘 보호를 위한 유태인들의 정치결사체 역할을 하는 단체입니다. 바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중국과 일본 동태 주시하자

재미한인들은 모국을 떠나서 살지만. 아무래도 한국인입니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대한 염원은 한국 내에 있든, 밖에서 살든, 다를 수가 없습니다. 한국의 국력과 에너지에 관해선 역사적으로 지금만큼 융성했었던 때가 없습니다.

학생들을 포함한 국민의 활력을 대할 때 마다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분단의 상황입니다.

안보의 위협이 북으로부터 만이 아니고 이제는 아시아 패권을 다투는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이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미국에서 중국과 일본이 미국과의 관계를 선점하려고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합니다.

외국에서 보면 한국은 씩씩하고 활력 있게 보이기도 하지만 왠지 낭비와 오만으로 비추어질 때가 있습니다.

한국, 한국인들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적으로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이 해양과 대륙으로 진출할 채비를 할 때에 우리가 제대로 대비하고 준비하지 못했으면 우리민족은 늘 고통을 당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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