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경제 <세상읽기>, 김두식 /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

▲ 김두식 변호사

한국전 정전 60주년(7월 27일)을 맞아 미국은 "영웅들을 기억한다"는 주제로 참전 용사들의 희생을 기렸다. 기념식이 열린 워싱턴 한국전쟁 기념공원에는 한국의 어딘가를 행군하고 있는 군인들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들의 지치고 야윈 모습에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의 피값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바닥 돌판에는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던 나라,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부름에 응한 우리 아들 딸들의 명예를 기린다." 그들이 모두 혁혁한 무공을 세운 전쟁영웅들은 아니었다. 낯선 땅에서 추위와 죽음의 공포에 떨었던 평범한 젊은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국가의 부름을 받아 주어진 의무를 다한 그들을 미국은 영웅으로 기린다.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고 헌신하는 보통사람들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것이 바로 세계 최강국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다. 이라크 사막과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서 순찰활동을 하는 군인들이나, 불길을 잡기 위해 연기 가득한 건물로 뛰어드는 소방관들을 영웅으로 대접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미국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전쟁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선 한국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참전을 `자랑`이자 `영광`이라고 얘기한다. 오바마 대통령도 정전 6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한국전쟁을 "무승부가 아닌 승리한 전쟁"이라 규정했다. 지금 5000만 한국인들이 누리는 자유, 활발한 민주주의,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가 그 승리의 증거라고 했다.

한국전쟁을 `승리한 전쟁`으로 만든 영웅들은 기념식 앞자리에 앉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땅에 살면서 헛된 욕심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온 사람들이다. 고된 삶의 무게를 견디며 가족을 사랑하고 자식들을 정직하고 반듯하게 키워낸 무명의 영웅들이다.

사람이 인생에서 크게 성공했다는 것만으로 영웅이 될 수 없다. 넬슨 만델라에게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본다.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지낸 그는 인생에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사람이다. 병원에서 95회 생일을 맞이한 지난달 18일, 수많은 남아공 국민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그의 쾌유를 빌 정도로 국민의 깊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만델라의 진정한 위대함은 겸손함과 소박함에 있다. 그는 대중이 자기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것을 불편해 한다. 자기도 살과 피로 이루어진 똑같은 사람으로 생각해 달라고 했다. 자기는 다만 `정직하고 아름답게`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만델라는 말한다. "우리가 품은 이상(理想),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꿈과 열망이 우리 생전에 실현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동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았다는 것만 알아도 보람 있는 경험이며 아름다운 성취입니다."(자서전 `나 자신과의 대화` 중에서).

지금 이 나라에는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든, 재벌 회장이든 성공한 사람들은 많지만, 만델라의 말대로 `살면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동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았다`고 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다. 연일 언론을 장식하는 것은 온통 개인적 탐욕과 허세, 이기심에 사로잡힌 인간 군상들 얘기다. 나라 걱정은 혼자 다 하는 것처럼 떠드는 사람들이 오히려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의무를 다하며 이웃과 동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보통사람들, 그들이 바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영웅들이다. 서울시청 앞에 걸린 현수막 글귀는 바로 그런 뜻일 게다. "잊지 마세요. 당신도 누군가의 영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