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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60주년을 맞는 DMZ과 지역 주민들비무장지대 고지전의 땅에 서서 희생된 영혼들을 기리며
이수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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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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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경 / 도쿄 가쿠게이대학 교수 ]


현대 문명의 이기에 지치고 환경 변화로 각종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지구촌 안에 청정 공기와 자연 생태환경이 풍요로운 천혜의 땅이 한반도에 남아 있다.
깊은 협곡 속을 유구히 흘러 온 역사의 강, 숲 속에선 고라니도 멧돼지도, 때로는 호랑이의 출몰도 있다 한다. 한반도 고유의 자연이 숨 쉬는 곳.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곳은 아직도 지뢰밭이 존재하고, 동족 간에 총구를 맞대고 있는 비무장지대(DMZ)로, 그동안 사람들의 왕래나 건축개발이 제한되었던 곳이었기에 우리의 산하가 자연스럽게 남겨져 있는 생태 환경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요즘은 다양한 축제 행사로 국내외 지명도를 높이고 있고, 지난 5월 8일의 박 대통령 방미 중에 미의회 연설에서 밝힌 DMZ 세계평화 공원 구상도 정부 규모에서 구체화 하는 등, 적극적인 세계 평화의 상징 지역으로 만들려고 하는 비무장지대는 서울서 몇 시간만 달리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
먼 이국땅을 찾지 않아도 대자연의 녹음을 느낄 수 있는 비무장지대는 그러나 민간통제선(민통선)이란 철조망에 가려져 1953년 7월27일의 정전 이후, 60년간을 민족상잔의 비애와 남북한 긴장감을 자아내며 철의 커튼(iron curtain)을 드리운 채 시간이 멈춰져 있는 곳이다.

   
▲ 화천댐 전경
필자는 아시아 평화시민네트워크 주최(대표 이대수)로 개최된 『한중미일 시민 화천댐 국제추모평화대회 및 DMZ시찰』에 참가하기 위해 5월말에 중부전선인 화천(華川)・양구(楊口)・인제(麟蹄)등을 둘러보며 분단 민족의 현실을 확인하고 왔다. 일명 ‘파로호 전투’로 알려진 격전지 화천 전투가 있었던 화천댐 건설과 관련된 일본 측 자료 조사 및 발표를 부탁받았기에 일제 강점기 조선식산은행 총재 아루가 토요미츠의 화천댐과 청평댐, 경춘선 개발 관련 조사내용을 발표하기 위해 참석했던 것이다. 이 지역은 현재 화천 산천어 축제, 각종 문학 축제, 쪽배 축제, 창포 축제 등 다양한 축제 이벤트 등으로 지자체의 이미지 변신 기획이 급증하고 있다.
하지만 DMZ 주변의 현실은 지금도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며 남북한 긴장관계의 변수 속에 민족상잔의 비극이 치유될 시기만을 기다리는 지역 주민들의 염원과 신자유주의적인 급격한 사회 변화가 멈춰진 공간 속에 있다. 그런 아픔의 역사를 치유하며 사실을 명확히 기억하여 미래지향적인 전진적 발전을 모색하려는 많은 움직임들이 정전 6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대붕호(大鵬湖, 별칭은 파로호 破虜湖)로 알려진 화천댐 저수지 주변에서 한국 전쟁 때 격전을 벌이다 죽어간 수많은 넋들을 위로하고, 정전 60주년의 의미와 DMZ 기행을 통한 역사의 재인식, 평화적 미래구축을 위한 국제교류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아시아평화시민네트워크의 이대수 목사 등의 활동이다.
필자는 이 활동에 대한 기획취지와 제안을 받은 터라 중부전선의 비무장지대의 현실을 학생들에게 전해줄 겸 참가하기로 하고 하네다에서 서울행 밤 비행기네 몸을 실었다.

몇 년 전에 방문했던 동해안 최전방인 고성군의 통일전망대 철조망 뒤편으로 보이던 아름다운 해변이 가깝지만 참으로 멀게 느껴졌던 기억이 아릿하게 떠올랐다. “이번엔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며 비행기 내에 비치된 몇 종류의 신문을 읽자니 옆자리에 앉았던 인도 출신의 비즈니스맨이 남북한 상황 및 주변국 관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물으며 자신의 지론을 펴기 시작했다. 아마도 필자가 북한의 최룡해 특사가 중국에 파견되었다는 특집기사를 종류별로 읽고 있어서 궁금했던 모양이다. 대략 설명을 해 주면서도 이렇게 한반도에 신경 쓰는 그 청년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업무차 한국 가는 청년도 진지하게 한반도 정세에 관심을 가질 정도건만, 한국에선 ‘야스쿠니 신사’가 ‘젠틀맨’이고, ‘안중근 의사’가 내과의사냐고 묻거나 ‘일본군 위안부’가 어느 군부대 이름이냐 묻던 수험생을 보도하던 뉴스를 떠올리니 씁쓸함이 묻어왔다.

그렇게도 숱한 희생을 치루며 독립국가가 된 대한민국이 자국의 근대사조차도 제대로 모르는 국민을 양산하고 있으니 매우 심각한 현실이다. 이런 범국가적 문제를 진지하게 대처하기보다 글로벌리즘 시대라고 영어 교육만 외쳐대고 대중영합주의만을 우선하는 모순을 보다보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떻게 되나’ 걱정이 앞섰다.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은 건전한 국가기능과 사회유지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자신의 역사를 이해하기에 자국에 대한 긍지와 애착이 생기는 법이다. 물론 이 역사는 반드시 일방적인 국수주의나 민족 우월주의에 기인한 내셔널리즘 주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되려 내 나라와 국제관계의 미래구상도를 염두에 두며 과거의 아픔을 기록 기억하고, 불행한 역사를 다시는 초래하지 말아야 한다는 미래 지표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위해선 과거 역사도 알고 현실도 염두에 두고 글로벌 시대에 발전하는 한국 사회가 되어야 한다.

현재 100만 명이 넘는 한국 사람이 미국에 살고 있다. 한국을 떠나서 이주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역시 한국은 서민층이 애들 키우며 살기엔 매력적인 환경이라곤 할 수 없다는 소리를 많이 한다. 부유한 사람들에겐 풍요로운 사회지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이라면 개선책이 필요하다. 전쟁 후 바둥거리며 살기위해 물질우선주의를 선호한 결과,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너무 표면적 화려함을 추구하는 소비문화 속에 건전한 국민성을 잃어가는 게 아닐까? 그런 노파심을 느끼면서 서울 시내로 들어왔다.

예약했던 호텔에 체크인을 하니 밤 12시가 넘었건만 영국에서 같이 있었던 친구가 다음날 강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와 남대문의 심야 데이트를 상대해 줘서 오랜만에 자유스런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둘 다 ‘의지의 한국 여성들’이란 소리를 자주 듣는 사람들이지만, 서로 과로를 무시한 채 새벽 다섯 시 반까지 추억 만들기로 버텼으니 가히 대단한 정신력의 지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랑 새벽에 헤어진 뒤, 풀지도 못한 짐을 그대로 챙겨서 용산역행 택시를 탔다. 필자가 칼럼 등에서 소개했던 아루가 미츠토요(有賀光豊; 조선식산은행 총재)가 경춘선을 만들었을 당시는 자그마한 역이었을 텐데 지금은 큰 규모의 역이 되어있었다.
경춘선 티켓 구입을 도와주던 역원이 내게 외부에서 왔냐고 묻는다. 왜냐고 물으니 서울 사람은 바쁘게 다니기 때문에 아침에 손님처럼 여유롭지 않기 때문이란다. 필자의 도쿄 생활이 초인적인 만큼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싶어서 여행객처럼 느긋이 움직였더니 그렇게 보인 모양이다. 그 분의 설명을 들으니 경춘선 itx는 2012년에 개통된 고속철도라고 한다. 6900원 정도로 춘천을 갈 수 있으니 비교적 저렴한 여행 수단이다. 첫 경춘선 여행을 수면부족의 몽롱한 상태로 즐기자니 앞과 옆자리에 탄 여성 나들이객들이 필자에게 갑자기 가래떡 하나를 주며 같이 먹자고 한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당황했지만 모두 긴 가래떡과 과일 등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음식들과 땅 투기 이야기, 남편 이야기 등을 하며 깔깔 웃는다. 예상 못한 환영이었지만, 춘천에 자주 놀러간다며 밝게 웃던 그녀들의 자그마한 인정이 고맙게 느껴진 춘천행이었다.

   
▲ 파로호 표지석
열차밖엔 청평댐 근처의 주변 리조트 지역이 보인다. 경춘선과 더불어 올 봄부터 조사해 왔던 아루가 미츠토요의 1938년 당시의 움직임이 적혀졌던 자료를 떠올렸다. 남춘천을 지나더니 열차는 1시간 10분 남짓에 춘천역에 도착했다. 수트케이스를 들고 역 밖으로 나가니 ‘화천 전투희생자 한・중・미・일 시민공동추모위원회’와 ‘아시아 평화시민네트워크’ 대표를 맡고 있는 이대수 목사, 무용가로 이번 추모회에서 진혼무를 보여 준 이혜경 씨, 그 날 간사를 맡은 강 선생 등이 행사 현수막을 들고 맞이해 주었다.
춘천역에서 후쿠오카대학교의 히로세 데이죠 교수와 재회를 나눈 뒤, 동북아평화연대 홍선희 대표, 그리고 화천댐의 치열한 격전과 그 상황을 처음으로 ‘인민일보’에 밝혔던 한중경제신문의 류재복 기자와 함께 대기했던 DMZ평화생명동산 제공의 미니버스에 오르니 몇 분이 먼저 와 계셨다. 버스 속에서 기천무 전수자인 지성철 선생과 순환경제연구소의 이승무 소장 등과 함께 인사를 나눈 뒤, 화천읍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화천전투 때 육군 중위로 참전하셨던 김달육 옹(86세)과 세종시 직원 부부 및 관악산 불성사의 서암 홍대봉 주지승(중요무형문화재로 한국 탱화 작가로도 유명)일행, 정상시 목사 등이 합류해 DMZ평화생명동산 주변을 돌았다. 이대수 목사와 히로세 교수를 빼고는 모두 초면이었지만 화천댐의 ‘추모회’와 비무장지대 시찰이라는 공통의 목적으로 모였기에 정신적으로 매우 편한 여정이었다.

점차 최전방 지역이 가까워오니 군부대가 많이 보였고, 인가가 줄어드는 대신 산하에 어우러지는 눈부신 신록이 펼쳐졌다.
일제 때 기초교량이 건설되었고, 북한이 교각을, 남한이 상판을 만들었다는 ‘구만대교’를 지나서 화천댐 안으로 들어가니 출입금지 제한 표시나 육군 보초용 벙커 등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입구 오른쪽 공간에는 발전소에서 사용했던 터번이 놓여 있다. 1938년 아루가 미츠토요 등이 수도의 전력공급처로 화천댐과 청평댐을 조성할 때 터번 등의 발전소 기계 종류는 히타치 제작소가 만들었고, 그 외의 댐 건설 및 발전소 건설은 ‘카시마 구미’에게 발주를 했다하니 그 시대 것일까? (차를 멈춰서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곧 화천댐에 도착하여 ‘파로호’라 적힌 기념비와 정자 등에 올라서 화천댐 주변을 시찰하였다. 화천수력발전소 건설 때 축조한 인공호수는 지금은 자연 속에 초연히 자리 잡고 있었다.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 62-1번지.
Royal blue색상이 너무도 아름다운 호수와 깊은 숲이 유유히 흐르는 수면에 반사되는 곳. 그 곳에서 ‘파로호’의 글귀에 새겨진 의미를 되새긴 뒤, 1951년 5월에 중공군과 인민군이 화천댐 및 주변 고지 탈환을 위해 국군과 싸우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꺼먹다리’에 내렸다. 상판의 부식을 막기 위해 콜타르를 칠하여 검은색을 띄고 있어서 ‘꺼먹다리’라고 한다는데, 등록 문화재110호로 지정된 이곳은 구만대교 건설 후 사람 및 자전거 통행이란 제한이 되어있고, 간혹 영화 로케이션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라고 한다.

   
▲ 신애자 선생이 파로호 전망대에서 살풀이 춤을 추고 있다.

산수강산의 파노라마가 펼쳐진 넓은 강 위에서 바라보는 그 아름다운 자연이 과거에는 공동묘지 아닌 공동묘지가 되어 끔찍한 살육의 장이었다니 도저히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당시 참전 군인이었던 김달육 옹의 증언에 의하면 여기저기에 살점 덩어리가 널려 있었고, 간혹 창자까지 튀어나온 시체들의 잔혹한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전투로 죽은 시체를 치우던 사람들은 부패 냄새에 코에 마늘을 넣고 작업을 했을 정도라고 한다. 80대 중반으로 믿기지 않는 말쑥한 외관과 차분한 목소리로 당시의 참혹함을 회술 하고 계셨으나, 오랫동안 지녀왔던 트라우마를 인내하며 증언을 하시던 비장한 모습이 가슴 아프도록 느껴졌다.

화천 전투에서 사망한 중공군 인민군이 일설로는 3만여 명이라고 하니, 국군 측과 상대측을 합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갔단 말인가? 산하는 너무나도 고요하고 아름다워, 되레 역사를 삼킨 채 모르는 척 하는 그 풍광에 미움조차 일었다.
적막함 속에 울려 퍼지던 비명과 살상의 광경을 상상하면서, 우리들은 그런 아비규환의 비극을 다시는 되풀이해서 안 된다는 다짐을 다지고 또 다졌다.

   
▲ 왼쪽부터 진혼무를 보여준 무용가 이혜경 씨, 이수경 교수, 신애자 선생.
오후 스케줄을 위해 구만교, 대붕교를 보며 하남면에 자리한 화천군 운영의 아쿠아틱 리조트로 이동을 했다. 고즈넉한 분위기와 아름다운 산세에 어울리는 펜션들이 자리한 곳이었다. 일단 그곳에서 그 지역의 목사 분들이 준비해 주신 점심을 먹었는데, 유기농을 주장하시는 분들의 음식이라서 보약과 다름없었다. 게다가 일본서 보기 힘든 각종 나물들과 김치 종류 등의 음식은 채식주의 선호인 필자로서는 얼마나 감사하게 먹었는지 모른다. 특히 그 곳의 한주희 목사는 그 장남이 유기농 사업을 같이 하고 있었는데, 장남이 유학한 일본학교가 필자도 잘 아는 학교라서 친근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자연주의로 회귀하여 귀농생활을 고집하는 분들의 결정체였던 점심 저녁 식사는 필자가 경험한 지구촌 그 어느 명문 호텔의 음식보다도 맛있는 건강식이었다. 다시금 음식을 준비해주셨던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이다.

점심 식사 후, 숙소에 짐을 옮겼다. 평화의 댐 건설 때 방한을 했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묵었던 곳 건너편이 필자의 숙소였는데, 높은 천정과 탁 트인 공간, 자연미 어우러지는 시설물 등이 편하게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몇 달 쉬면서 집필에 몰입할 수 있다면…그런 생각에 젖으며 리조트 입구 앞 호수의 선상 회의실로 향했다.

한주희 목사의 사회로 화천댐 발표 세미나가 시작되자 일제 말기 때 화천댐 건설 노무자로 일하셨던 분으로 이번 기획에서 증언을 약속하셨던 이용교 옹(93세)이 10일전에 타계하셨다는 보고가 있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타계 전에 이대수 목사가 증언을 녹화해 둔 영상이 있어서 당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도저히 10일 후에 돌아가실 분의 얼굴이 아니었기에 연세 드신 분들의 오늘 내일은 알 수가 없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논산 출신인 이용교 옹은 1940년에 강제징용으로 화천 건설장에 배치되어 2년간 노동을 했는데, 노동자들이 많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죽으면 나무상자에 머리를 잘라 넣어서 고향으로 보냈으니 가히 그 유족들의 충격과 원한이 어떠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엔 혹한으로 화천댐 건설은 불가능했기에 대신에 철원의 철로 공사 작업을 했고, 댐 건설 때 고통스러워서 아프거나 쉬면 밥도 임금도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너무 힘들어 도주하다 들키면 죽도록 구타를 당해야 했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여 임금을 받으면 빵을 사먹는데 사용했는데, 특히 심했던 것은 도리시마(일본어로 관리자 혹은 단속책임자를 도리시마리[取締]라 함)가 혹사를 시켰다고 강조를 하였다. 필자가 조사했던 당시의 건설 노동자 담당의 카시마구미의 노동자 취급 팸플릿과는 현저히 다른 열악한 노동 실태가 충격적이었다.

이용교 옹의 영상 증언 뒤, 필자의 일본 관련 문헌 연구 보고가 있었는데, 주최 측이 사전에 받은 원고로 자료집을 잘 꾸며놓았기에 필자는 당시의 화천댐 건설 경위와 카시마구미 건설사의 조선인 노무자 취급문제, 한국전쟁 직후의 화천댐 완성 후의 노동조합 활동 등에 대한 자료를 소개하였고, 비무장지대의 국가생태문화 탐방로 조성과 세계적인 평화공원으로 거듭나겠다는 정부의 최근의 동향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이어서 중국 연길에서 항미원조전쟁의 참전군이었던 이태길 옹의 인터뷰가 있었다. 이 분은 동북군정대학 졸업 후 군인이 되어서 한국전쟁 때 휴전협정 담판 때 참가했던 중공측 7인단 대표 중의 한 분이었다. 언변 좋은 평화 상생론의 주장과 당시의 전쟁 참혹사에 대한 내용을 중국 측에서 들은 셈이지만 좀 더 개인적인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 김달육 옹의 '꺼먹다리'에 대한 전쟁증언
마지막으로 꺼먹다리에서 증언을 해 주신 김달육 옹의 증언이 있었는데, 당시 국군 장교였던 김 옹에 의하면 1950년 6월 24일 토요일은 군대 봉급날로 연대의 3분의 2가 외출 외박을 했기에 군부대 속이 빈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전쟁이 발발되었는데 당시 그 지역 부근엔 6사단 7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김옹은 전쟁 중에 별 두개의 인민군 장교와 스쳤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김일성의 경호대장이었다고 하니, 지금처럼 철책이 없이 전투를 하던 고지전의 당시 상황을 보기 위해 파견되었던 인민군과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알 수가 있는 대목이었다.

김달육 옹은 그 뒤, 백암산서 휴전을 맞고 소령으로 예편을 했는데, 전투 후유증으로 9번을 개복 수술을 하셨다고 하니 전쟁이 끝났어도 그의 삶은 지옥과 진배없었으리라.
결국 당시의 지옥 같았던 상황을 떠올리며 응축되었던 기억의 파편을 더듬으시던 옹은 붉은 눈시울을 적시며 그가 보았던 그 지옥 속에 희생이 된 수 많은 영혼들을 추모함과 동시에, 절대, 결코 비참한 전쟁이 두 번 다시 용서되어서는 안 된다며 역설하시며 보이셨던 눈물은 우리의 미래사회로의 이정표 그 자체였기에 모두 숙연해진 순간이었다.

어린 나이로 전쟁이란 광분 상태에 내몰렸던 수많은 희생자들이 무슨 죄가 있던가? 일부의 전쟁욕을 명분화 시킨 그들을 단죄해야하건만 특권을 이용하여 가장 안전한 곳에서 가장 무책임한 명령을 하며 가장 풍요로운 삶을 향유하다 사라진 그들은 간데없으니 남은 후손들의 전후 정리가 쉽지만은 않다. 이럴수록 선진 국가를 위한 미래지향적인 평화의식을 공감하고, 시민들의 연대를 더더욱 돈독히 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화천댐 관련의 자료 내용 검토 및 보고를 끝내고선 우리는 4시를 지나서 안보전시관 뒷산의 전망대로 이동하여 합동위령제에 참석하였다. 파로호 격전 참가부대가 세운 듯한 ‘파로호’ 추모비에서 내려다보이는 그 곳은 호수가 보이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넓은 공간 건너편 호수가 보이는 곳에는 ‘파로호 전망대’라는 기념비석이 서 있었다. 파로호를 마주하는 그 기념비석 앞에 불성사에서 가져온 막걸리나 음식들로 제단이 차려졌고, 민속풍물패 ‘광대패 모두골’의 정대호 대표의 위령제 취지 발표가 있었다. 추모시 낭독과 더불어 해금 및 대금 등으로 자아내는 구슬프고 애절한 음악이 호숫가 숲속 깊숙이 흘러 퍼졌다. 이어진 불교식 위령제(천도제)에 참가 목사들도 스스럼없이 종교를 초월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원혼을 푸는 의식에 참여하였다. 그런 하나가 되는 공동추모제를 보고 있노라니 우리의 슬픈 넋들도 많이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춤으로 다져왔다는 군포 수리무용단의 이혜경 대표의 춤은 세계 각지에서 각광 받아 온 다이내믹한 움직임으로 영혼들을 불러 모아 그 아픔을 헤아리는 듯한 섬세한 표현을 보였다. 진혼무를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자그마한 소리조차 그녀의 집중력을 흩트릴까봐 조용히 숨죽이며 손끝 발끝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지켜보자니 참으로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이어서, 소복 차림으로 모든 억울히 죽어간 원혼들을 끌어 모아 그들의 아픔을 풀어주는 살풀이를 하던 신애자 선생의 춤은 절절이 묻어나오는 민족의 비애와 넋들의 고통을 홀로이 짊어진 듯하여 결국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이것이 한 풀이 춤인가? 필자의 삶 속에 묻어져 있던 감정도 풀어진 탓일까? 호수의 적막함 속에 원한을 풀고 서로 어우러져 살자는 해원 상생의 의식은 40여 명의 참가자들 가슴 속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김달육 옹과 참석자 대표들의 헌향 및 헌주가 이어졌고, 그런 의식이 처음이었던 필자도 이대수 목사, 한주희 목사와 나란히 헌향 및 절을 하였다. 참가 목사들이 불경이 퍼지는 공간 속에서 유교적 성향의 제사의식을 치루는 것도 ‘평화 및 상생 추구’란 목적의식의 공감이란 의미에서 보기 좋게 느껴졌다. 한국 댐 연구의 전문가로 알려진 히로세 교수도, 계명문화대의 오카다 교수도 헌향과 절을 하면서 민족과 종교를 초월한 ‘해원과 평화적 상생 추구’를 확인하는 공간이 되었다.

화천군 문화원 사무국장 및 김용복 교수, 고성기 목사 등도 자리를 함께 하였다.
추모회 마지막 순서로 ‘비목’을 함께 부른 뒤, 화천이 영원히 평화스런 땅으로 거듭나기를 빌면서 가파른 귀로의 길을 내려왔다. 숙소로 돌아오니 화천에서 이대수 목사의 취지를 이해하고 돕는 NGO단체들이 마련한 푸짐한 뷔페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대수 목사의 인덕을 알 수 있는 여정이기도 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이렇게 맛깔나고 청정 건강식인 음식만 먹고 맑은 공기 속에 살 수 있다면 백년도 쉽게 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필자가 좋아하는 참외까지 후식으로 푸짐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참고로 일본에선 참외가 최근에 몇 군데서 나오긴 하지만 한국 참외 맛이 아닌데다, 근래까지 일본엔 참외가 없었던 터라 지난 4반세기 동안 필자가 가장 굶주렸던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저녁이 되자 도시에서 귀농한 지역 사람들도 모여서 교류를 하였으나 필자는 체력적 한계와 미열로 일찍 쉴 수밖에 없었다. 위령제를 마친 호숫가의 교류는 새벽까지 계속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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