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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덴유키오상(余田由紀夫さん)
박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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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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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수 박사 / 뉴질랜드 교포 ]


“키미, 니혼고다!(君, 日本語だ)” -- 군, 일본어다!

   
▲ 박인수 박사
때는 1980년대 초반, 한국과 일본의 외교관계가 그런대로 괜찮을 때였다. 당시 한국의 대통령은 전두환이었고, 일본수상은 지한파로 알려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였다. 미국의 거중조정으로 한국 국내문제와는 별도로 한일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한일양국 간 미래발전을 위한다는 모토에서 양국 간 청년교류가 정부차원에서 추진되었고, 필자가 그 해 청년교류 대상자 명단에 들었던 것은 1984년 초의 일로 기억한다.

당시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생이던 필자를 일본외무성 초청 한국청년 11인 명단에 넣어준 이가 바로 요덴유키오상 이었다. 그는 부산 초량(草梁)에 소재한 일본총영사관의 문화홍보 담당 영사였다. 나는 그때 일본총영사관에서 개설한 일본어 과정(초중고급)을 이수한 상태였고, 1년 후로 계획한 타이완 유학을 위하여 그야말로 불철주야 독학으로 중국어 학습에 전념하던 때였다. 어느 날 요덴 영사가 집으로 전화를 해서 일본 방문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몰랐지만 나에게 베푼 상당한 호의였다.

비록 나는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었지만 내심 깊은 곳에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고교 국사수업 시간, 1876년 강화도수호조약을 거치면서부터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대목에 가서는 일본에 대한 분노로 눈물을 찔끔거린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조선과 만주와 중국에서 일본군국주의가 저지른 만행을 알게 되었다. 대학졸업 후에도 일본에 대한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원에 진학하고부터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고교 때부터 대학을 다닐 동안 외국어로 영어 독일어와 스페인어 까지 적잖은 세월동안 서양언어를 공부해본 내가 왜 일본어를 공부하기로 작정하였는가. 가장 가까운 일본을 모르고는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일본어를 모르고는 학문의 깊이 있는 영역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현실적 요구 때문이었다. 학문을 위한 도구로써 일본어는 과연 상당한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한국어로는 번역되어 있지 않은 세계 각국의 수많은 학술서적이 일본어로는 번역되어 있었다. 나는 광복동에 있던 일본어 도서 전문서점 문기(文旗)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일본방문 첫 날, 나리타(成田) 공항에 첫 발을 딛는 순간 ‘아,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라는 자조(自嘲)가 저절로 나왔다. 그동안 감정적으로 일본을 미워할 줄만 알았지 일본의 현실을 내 눈으로 직시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기 때문이다. 시가지의 어느 길에서나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먼지가 날리지 않았다. 도시 간을 달리는 차창 밖에는 평지에도 잘 가꾸어진 수목들로 삼림을 이루고 있었다. 후세들을 위한 인공조림이라고 했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는 검은 빛을 띠고 있어 한국의 흰색에 가까운 회색빛과도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이유를 물으니 값비싼 원유에서 코르타르의 성분을 다 뽑아내지 않고 포장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국민이 정치인은 믿지 않아도 관료(공무원)를 신뢰하고 관료는 부정부패 없이 국민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나라, 이것이 바로 일본의 국력이구나.......

정부(외무성) 초청이어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도쿄(東京) 시내 고급호텔 숙박에 한번 입장권이 샐러리맨 한 달 월급에 맞먹는 가부키(歌舞技) 극장, 도쿄에서 나리타(名古屋)까지를 두 시간 만에 달리는 신칸센(新幹線) 중에도 가장 빠른 히카리(光) 호 1등실 좌석, 한국의 경주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유서 깊은 교도(京都)에서는 역시 하루 숙박비가 한 달 급료와 맞먹는 고급 칸코료칸(觀光旅館) 이었다. 나리타 시 옆에 위치한 토요다(豊田) 시 소재 도요타 자동차공장 방문에서는, 엔진장착부터 각종 조립단계를 거쳐 로봇에 의한 페인트스프레이를 거쳐 자동차 완성품이 만들어지는 전 공정을 위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돌아다니며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기계기술 분야에는 문외한이지만 그때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 내 스케줄을 정하기에 앞서 요덴 영사는 나에게 특별히 방문하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다. 나는 도쿄에서는 서점가로 유명한 간다쇼덴(神田書店) 거리와, 교도에서는 교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을 방문희망지로 들었다. 10명이 넘는 일본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한 본산이자 ‘경도역사학파’로 유명한 교도대학을 가보고 싶었다. 교도대학 본관에 들어서자 벽면에는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사진이 걸려 걸려있었다. 나는 요덴 영사가 의례적으로 물어본 줄로 알았는데 확정된 스케줄을 받고 보니 정말로 내가 요구한 두 곳이 들어 있었다. 일국의 외교관이 일개 학생에게 어떻게 그토록 세심한 안배를 하였을까. 나는 지금도 그 감탄을 잊지 못한다. 그 사람이여(其人也)! 그 일이여(其事也)!

일본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 나는 당시 청년교류 초청자 일행으로 함께 일본을 방문하였던 지금의 아내와 함께 요덴 영사 댁으로 귀국인사차 방문하였다. 그리고 요덴 영사가 왜 나를 초청자 명단에 넣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일본총영사관 개설 일본어 과정을 마친 그 해 수료자 모두가 일본어 능력시험을 치렀고, 그중 최우수 성적순으로 몇 사람을 선발하였을 때 시험성적 결과와는 거리가 먼 나를 넣어 준 것이다.

요덴유키오(부인 아케미 여사) 영사 댁을 방문하여 담소하던 중, 그가 들려준 한 가지 에피소드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전두환 대통령과 나카소네 총리 간 회담의 통역을 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단다. 나카소네 총리가 한 말을 한국어로 통역하던 중 자신도 모르게 일본어를 했단다. 그러자 나카소네 총리가 전두환 대통령이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키미, 니혼고다(군, 일본어다)”라고 일깨우더란다. 일본인들은 직장상사가 부하직원이나 선생이 제자에게 다정한 어감으로 키미(君)라고 부른다.

그가 순간적으로 한국어와 일본어의 구별에 착각하였음을 나는 안다. 나도 평소 중국인들을 자주 접하다보면 순간적으로 한국어와 중국어를 착각할 때가 있다. 서양언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한중일 3국 언어의 뿌리에는 한자가 있고 일상 언어에서도 한두 가지 발음만 바꾸면 통용되는 언어이기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서양인의 외모와는 확연히 다른 얼굴과 피부색이 같은 인종들이기에 더욱 그러할 수 있다.

요덴유키오상은 나라(奈良)의 덴리(天理) 대학 조선어학과를 졸업하여 한국어 구사가 완벽하였고, 대학졸업 후 외무성 아시아국에 재직하던 분이었다. 그 다음해 초 내가 타이완으로 떠나기 직전 인사하러 갔을 때, 본인은 중동지역 어느 국가로 근무지가 바뀐다고 한 것이 요덴 영사로부터 들은 마지막 소식이었다.

최근 들어 일본 우익정치인들의 부쩍 늘어난 그릇된 역사인식과 독도영유권 관련 망언으로 한일 양국을 가르는 현해탄(玄海灘)의 파고는 점점 높아만 간다. 일본의 우익 정치인들이 그들의 정치적 지도력 부족에서 오는 문제를 해결하는 출구전략으로 이용하면서, 한일양국의 지식인과 양심적인 국민들 간의 인적교류를 통하여 그동안 쌓아올린 선린우호(善隣友好) 관계가 그들의 망언망발로 인해 더 이상 손상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지리적이나 역사적 문화적으로 뿐만 아니라, 자유 민주 인권 평등 평화 등 인류의 보편적이고 고귀한 가치추구를 공유하는 한일양국 국민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고, 태평양에 비해 도랑같이 좁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관계이자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도 상호협력을 통해 공존공영을 영속해야 할 숙명적 이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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