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규철 / 재미칼럼니스트, 본지 편집위원 ]

▲ 이정순 미주총연 회장 당선자

1903년 1월 13일, 102명의 한인들이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이래 110년 만에 미주한인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220만 미주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미주총연 회장에 당선됐다. 그 주인공은 1997년 도미해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1999년, 21대)을 역임한 바 있는 이정순(64) 여사다.

미국 서부의 관문인 샌프란시스코는 미주한인역사와 괘를 같이하고 있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 1903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한인친목회’를 비롯해 공립협회, 대한인 국민회, 흥사단, 동지회, 해외한인연합회 등이 설립돼 애국지사들이 조국의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곳이어서 미주한인사회와는 인연이 깊은 곳이다. 또 친일파 미국인으로 일본의 강제병합에 앞장섰던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인환 전명운 의사 등 미주한인 독립 운동가들이 활약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시대의 흐름일까, 아니면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고자 하는 선택의 결과일까. 미주한인회총연합회(미주총연)의 분위가 바뀌고 있다. 미주한인사회와 미주총연에 세대교체의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이다. 신진세력들의 등장으로 타성에 젖은 한인사회 문화가 새롭게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이러한 변화의 정점에 등장한 인물이 이정순 미주총연 당선자이다. 미주한인사회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샌프란시스코. 그 지역 한인회장을 역임한 가장 한국적인 아줌마의 도전은 말썽 많았던 미주총연에 새로운 바람을 예고하고 있다.

반목과 분열을 극복할 여성 리더의 등장

“난 밥 잘하고 살림 잘하고 남편 내조 잘하는 ‘한국형 아줌마’입니다. 이런 아줌마의 힘으로 미주총연이 명실상부한 미주 한인대표 기관으로 거듭나도록 모든 것을 혁신할 것입니다. 꿈 많은 미주한인사회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말이 아닌 행동으로 앞장설 것입니다.”

2011년 5월 미주총연 회장 선거이후 유진철 회장과 상대후보였던 김재권 씨 간의 선거부정 소송사건으로 인한 법적공방이 수개월 이어지면서 미주총연이 2개로 쪼개질 것이라는 우려와 ‘미주총연 회장 자리는 미국 법정이 임명한다.’는 비아냥거림까지 돌면서 미주총연의 위기는 최고조에 이르기도 했다.
이후 유진철 회장이 정관 개정을 통해 대리투표나 회비대납 등 비리요소를 차단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그동안 음양으로 미주총연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세력들을 견제하게 됐다. 또 한편으로는 반목과 갈등을 표출해 온 미주총연에 대한 따가운 시선과 미주한인사회의 외면, 갈등유발세력에 대한 견제심리와 변화에 대한 열망 등은 지난 5월 18일 미주총연 총회에서 이정순이라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 5월 18일 미주총연 회장에 당선된 이정순 회장이 당선증을 받고 있다. ⓒ사진=샌프란시스코한인회

미주총연 사상 최초의 여성 회장이 선출되자 국내외에 화제가 되었다. 여성대통령 시대에 때 맞춰 미주총연에도 여성회장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미주총연의 관계자들은 그동안 26대 총회장 선거를 앞두고 경선을 예상했다. 이정순 씨의 출마가 일찌감치 예상되는 가운데 유진철 현 회장이 연임을 노리며 재출마를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진철 회장이 선거등록 마감일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돌연 불출마를 선언했다. 유 회장 측이 내세운 명분은 조지아 주 연방 상원의원 출마였다. 하지만 과연 그가 차기 연방의원에 출마할지는 불투명한 상태이다. 이 같은 유진철 회장의 돌연사퇴 때문인지 모 언론은 “유진철 회장 일주일 만에 출마 번복”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이정순 씨는 미주총연 26대 총회장에 단독 후보자로 등록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넘어야 할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총회 인준 절차였다. 미주총연 정관에 의하면 단독 입후보의 경우, 서류상 하자가 없을지라도 무투표 당선이 아닌 총회 인준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총회는 100명 이상의 정회원 참석으로 성원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주총연은 선거 때만 되면 과열되는 선거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2012년 댈러스 임시총회에서 정관을 개정했고, 이 규정에 따라 지난 4월까지의 미주총연 정회원 수는 340여명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5월 정기총회 전까지의 분위기는 과연 미주전역에서 100여명 이상의 정회원이 참석해 총회가 성원 될 수 있을지를 두고 여기저기서 우려의 소리가 들려왔다. 더구나 부정선거와 재판 파동 등 온갖 추문으로 미주총연 위상이 얼룩진 상황이었으니 우려가 제기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런 우려 때문이었는지 총회 직전까지도 일각에서는 만약 애틀랜타 총회가 성원미달로 유회가 된다면 비상대책위가 구성될 수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이정순 후보자가 애를 태우는 것은 당연지사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정순 씨가 선관위에 제출한 지지자들의 추천서에서도 일부 하자가 발견 되었다. 제출된 일부 추천서가 본인 서명도 없는 상태에서 공증을 받은 사실을 선관위원들이 서류 심사과정에서 적발한 것이다. 물론 후보자인 이정순 씨와는 상관없이 일부지지자들이 저지른 짓이다.
하지만 이 문제로 선관위원들 사이에서는 갑론을박이 일었다. 통상적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면 당사자가 노심초사를 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그녀를 지지하던 인사들이 노심초사를 했던 반면 정작 당사자인 이정순 씨는 오히려 담담했다고 한다.

외유내강의 여성 활동가

그녀를 잘 아는 주변 관계자들의 평가는 그녀를 외유내강의 전형적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사실 그녀의 첫인상은 후덕한 충청도 아줌마와도 같다. 그러나 그동안 그녀가 걸어온 삶들을 짚어보면 인상에서 풍기는 평범한 이웃집 아줌마의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의 젊은 시절에는 신민당 제1부녀부장으로 한국 정치판에서 활동한 사실도 있다. 또 주한 말레이시아 대사관에 근무한 경력도 있다.

1977년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현재의 부군 정청광 씨(시집 ‘히로시마 콤플렉스’ 저자)를 만나 결혼 후 도미,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오늘까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살펴보아도 평범한 아줌마와는 아주 딴판이다. 결혼 후 1남 1녀를 두고 가정생활에 충실하던 그녀는 또다시 그녀 특유의 기를 발휘한다.
1985년 ‘조국 민주화운동본부’ 이사로 활동했던 그는 1997년 샌프란시스코 제20대 한인회장직에 도전해 지금은 고인이 된 김근태 씨와 겨뤘지만 석패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1999년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에 재도전 해 상대 후보를 누르고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사상 첫 여성회장(21대)에 당선됐다.
이후 미 주류사회로 눈을 돌린 그녀는 1999년 샌프란시스코 시장에 출마한 윌리 브라운 후보의 후원회장으로 맹활약을 펼쳐 그의 당선에 톡톡히 한몫을 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시와 한인사회의 밀월관계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시정부와 한인사회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이정순 회장(왼쪽 둘째줄 첫번째)이 '한민족여성네트워크(KOWIN)'의 서부지역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을 당시, 청와대를 방문하고 이희호 여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샌프란시스코한인회

그녀는 또 미주평통 샌프란시스코 협의회 회장, 서남부한인회연합회 회장 그리고 미주총연 부회장, 수석 부이사장직을 역임했다. 현재는 국내외 한인여성들의 정보교류와 연대강화, 네트워크를 통한 국제협력 그리고 재외 한인여성네트워크 활성화를 꽤하고 있는 ‘한민족여성네트워크(KOWIN)’의 미주 서부지역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활발한 대외활동과 한인사회에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 2회를 비롯, 2004년에는 국민훈장목련장을 수상하는 등 화려한 사회활동을 전개해 왔다.

미주총연 회장 선출과정과 기대

이 당선자에게 지난 5월에 개최된 미주총연 정기총회에 대해 물었다. ‘총회성원 문제, 그리고 선관위 지적사항, 선거비용, 등록과정에서의 잡음 등으로 심적 고통이 심했을 당시의 심정이 궁금하기도 했다.

“선거준비 과정에서 약간의 경비가 발생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거 역대 선거처럼 엄청난 비용이 발생한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미주총연에 몸을 담으며 별로 적을 진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인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난 5월 애틀랜타에서 개최된 총회는 122명의 정회원 참석으로 성원이 되었고, 때문인지 참석자들은 이정순을 외치며 만장일치로 인준해 주었다.
요즈음 그녀는 7월 20일로 예정된 26대 총회장 취임식 준비로 눈코 뜰 사이도 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취임 전 6월 18일부터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한인회장대회에도 참석해야하고 차기집행부 구성도 끝내야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하루해가 어떻게 가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전혀 서두는 기색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갑갑증을 느낄 만큼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녀이다.

▲ 2005년 10월, 이정순(왼쪽 두번째) 회장이 순국선열 이대위 유해봉환 안장식에 참석해 미주총연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샌프란시스코한인회

현재 미주총연의 분위기는 역대 회장선거 후유증 탓으로 사분오열 된 상태이다. 그리고 지난 미주총연 회장선거의 후유증으로 일부에서는 현재의 미주총연을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녀에게 미주총연의 위상을 회복하고 상황을 추스를 복안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동안 미주총연 내부에 선거 후유증 때문에 편 가르기가 만연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 자신이 미주총연 회원들에게 진정성을 갖고 다가간다면 모두가 마음의 문을 열고 미주총연 활동에 동참해 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동안 미주총연은 회장이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운영해왔던 것이 현실이었다.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 할 것인지 아니면 재원마련을 위해 구상한 특별한 복안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정상적인 미주총연 운영을 위해 필요한 경비는 년 약 30만 달러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현재 한국정부가 1년에 10만 달러 정도를 지원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원들의 회비도 약 10만 달러 정도 걷히고 있어 별도로 필요한 재원은 10만 달러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현재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후원금 형태의 모금방식을 모색하고 있고,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이번 한국 방문길에 지원금을 포함한 모국정부의 미주한인사회에 대한 지원책을 요청할 생각입니다.”

어머니 마음으로 미주총연의 단합과 변화를 이끈다

이정순 당선자는 지난 5월 총회 직후 당선 소감을 통해 “오늘보다 더 아름다운 내일의 미주 동포사회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며, “말로가 아닌 행동으로 열심히 총연을 이끌어 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 당선자의 결의는 남다르다. 그녀는 1년 전부터 미주총연 회장 출마를 고심하다 자신의 인생철학으로 삼고 있는 ‘도전 정신’을 되새기며 출마를 했던 만큼, 그동안 반목과 갈등으로 분열을 초래한 남성위주의 미주총연을 인자한 모성애로 일대혁신을 일궈내겠다는 각오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화합의 시대를 열어 가겠다.”는 그녀는 실추된 미주총연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일과 한인단체간의 화합과 단결, 한국문화의 전파에 주안점을 두겠다고 했다.

이 당선자는 선거공약으로 내건 △미 주류사회 진출을 위한 차세대 후원 강화, △한인경제발전을 위한 연구소 설립과 경제단체간의 협력, △지역특성에 맞는 정책 개발, △미주총연 회보 발행과 네트워크 구축 등을 중심으로 모국과의 협력을 강화해 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또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플랜의 적극적 지지와 협력, △한인-흑인관계 개선 및 발전, 영구적 신뢰구축, △세계한민족네트워크 활성화의 중심적 역할, △평화적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협력, △재미동포 1.5-2세 미정치권 진출 추진 등을 미주총연 5대 정책으로 내 놓았다.

그녀의 미주총연 운영에 대한 모토는 ‘더불어, 함께’이다. 본국 지향적 성향의 미주총연의 분위기를 일소하겠다고도 했다. 그녀 자신부터가 한국정치권에 마음이 없기 때문에 당분간 실추된 미주총연의 위상 강화에 모든 힘을 쏟을 것이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는 흐름도 그녀의 역할변화에 힘을 더해주고 있다.
이를 위해 이 당선자는 미주총연 전임 회장과 임원들, 각 분야 전문가의 경륜과 지식을 활용하는 시스템도 구축할 생각이다. 더불어 미주한인들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며, 지역한인연합회와의 협력 사업을 추진해 미주총연이 미주한인사회의 명실상부한 대변단체로 자리매김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각오를 내비췄다.
이 당선자는 줄곧 봉사하고 나누는 따듯한 ‘나눔의 미덕’을 강조했다. 신나고 재미있게 일하는 미주총연으로의 변화를 위해 포근한 아줌마의 심정으로 미주한인사회의 소망을 경청하는 것부터 시작하겠다는 그녀에게서 미주총연의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