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2.26 월 13:37
재외선거, 의료보험
> 오피니언 > 교포지논단
한국의 갑을문화와 미국의 AB문화
미주한국일보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3.06.12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 미주한국일보 / 허종욱 한동대 교수 ]


1968년 총재산 50달러로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한 나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터에서 뛰어야 했다. 필라델피아 베들레햄 스틸에서 건축자재 철근을 건축업자들의 주문에 따라 기계로 자르는 일을 했다.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서로 맡은 부문을 수행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언어도 서투른데다 힘도 약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나 직원들은 유일한 유학생인 나에게 각별한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한번은 내가 무거운 철근을 옮기다가 내 잘못으로 팔뚝에 조그마한 상처를 입었다. 공장장을 포함한 많은 직원들이 달려와서 나를 위로했다. 나는 그들이 베풀어 준 친절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대학 재학 중 서울 소공동에 있는 국립도서관에서 일한 적이 있다. 무더운 장마철 출근길에 옷이 푹 젖고 구두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내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본 상사는 사무실로 데려가 복도를 더럽힌 것에 대해 심한 말로 나를 질책했다. 나는 90도 허리를 굽혀 사과했지만 그는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나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시말서를 쓰고 복도를 깨끗이 닦았다. 나는 지금도 그의 분노하는 모습을 잊지 못한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갑을문화’라는 새 용어가 급물살을 타고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갑과 을 두 사람 사이 또는 두 그룹 사이에서 불평등한 관계로 이루어지는 문화를 의미한다. 갑은 우월한 위치에서 을을 지배하며, 을은 열등한 위치에서 갑을 떠받드는 관계다.

갑을문화는 원래 갑과 을 두 당사자가 계약서를 작성 할 때 각자의 권리와 의무를 동등한 위치에서 규정하지 않고 강자와 약자의 위치에서 규정한 봉건적 계급사회의 산물이다. 예를 들면 양반과 상민의 관계다. 이를테면 시장경제 분업체제에서 갑의 대기업과 을의 하도급 업체사이의 관계를 공생(共生)의 원리보다 갑의 지배원리로 보는 문화다.

지난 몇 주 동안 한국 사회는 갑을문화의 현주소를 체험했다. 대한항공 여객기 안에서 포스코 에너지사의 한 상무가 라면을 제대로 끓여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승무원을 질책한 ‘라면상무사건,’ 남양유업의 한 영업사원이 제품밀어내기 강매에 항의하는 대리점 주인에게 폭언한 ‘조폭우유사건,’ 프라임 베이커리 빵 회사 전 회장이 호텔 주차관리인에게 반말을 하면서 지갑으로 얼굴을 때린 ‘폭행 빵 회장 사건,’ 한 주류업체의 물량 밀어내기와 빚 독촉에 따른 고통을 호소하며 자살한 대리점 주인의 ‘배상면주가 사건’ 등이 보여 준 갑을문화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갑을문화’는 오랜 동안 한국사회 여러 부문에서 드러나지 않고 묻혀 있으면서 ‘으레 그런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번에 별안간 뜨거운 사회적 이슈로 표면화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다.

첫째, 유튜브 등 인터넷 망을 통해 ‘갑을문화’의 사회적 실상이 즉흥적 실시간 보도로 여러 사회계층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 둘째 박근혜정부가 건전한 경제발전의 공약으로 내세운 경제민주화라는 새 개념이 지금까지 굳어져왔던 갑을관계에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몰고 왔다는 사실이다.

미국에도 ‘갑을문화’가 있다. 예를 들면 대기업과 하도급, 고용주와 고용인, 수요자와 공급자, 임대인과 임차인, 매도인과 매수인 등 한국사회와 비슷한 인간관계를 규정짓는 문화다. 미국에서는 갑을관계 대신 AB관계다. 이 관계는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자유와 평등의 기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다.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지킨다. 물론 한국에도 이런 강자가 없지 않다.

선진국을 재는 잣대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경제 정치 발전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당연히 선진국 대열에 속한다. 그러나 ‘갑을문화’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사회 구성원 사이의 평등 친절 정직 신뢰 자유 인권 등과 같은 도덕적인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 잣대로 볼 때에는 아직 갈 길이 멀지 않을까?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회사소개광고문의기사제보구독신청찾아오시는길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종로19(르메이에르 종로타운) B동 1118호 | Tel 02)2075-7141~3 | Fax 02)2075-7144
등록번호 : 아01003 | 등록일자 : 2009. 10. 24 | 발행일자 : 2009. 10. 24 | 발행인 : 이구홍 | 편집인 : 이구홍
개인정보취급담당자 : 최유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혜민
Copyright 2008 세계한인신문. All Rights Reserved.mail to oktime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