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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소 음악의 대가’ 중국동포 음악가 신용춘 선생, 그는 말한다
김도균 기자  |  kdg@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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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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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퉁소를 연주하고 있는 신용춘 선생
“평생 한길만을 달려왔습니다.”
중절모를 깊이 눌러쓰고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사무실을 찾은 중국동포 음악가 신용춘(申龍春) 선생이 인터뷰를 위해 앉자마자 내 뱉은 말이다. 중국동포사회에서는 ‘퉁소 음악의 아버지’로 익히 알려진 분이어서, 80평생 가까이 우리 전통악기만을 다뤄온 악기에 천착(穿鑿)해 온 그의 삶이 무척 궁금하던 차였다. 7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름살 없는 얼굴에 해맑게 웃는 선생의 모습에서 전통악기를 전공한 사람들과는 또 다른 기품이 느껴진다.

신(申) 선생은 1937년 연변 개산툰에서 출생했다. 신 선생의 아버지는 두만강 북쪽지역과 맞닿아 있는 함경북도 종성군 삼봉이 고향이었다. 두만강을 수시로 건너들며 터전을 닦고 살아온 만주(중국 연변지역)는 고향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신 선생 아버지는 연변에 자리를 잡았다. 오래전부터 조선 사람이 터전을 이루며 살아온 만주지역은 조선인의 풍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마을마다 농악과 사자놀이가 잔치 때나 절기마다 펼쳐졌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퉁소 등 전통악기를 접하며 살았어요. 특히 야생적이고 거친 소리가 나는 퉁소에 대해 흥미가 많았지요.”

신 선생은 퉁소소리가 나는 곳이면 일일이 찾아다니며, 장이 파할 때까지 구경을 하곤 했다. 선생이 퉁소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부터다. 그 후 선생은 개인적으로 퉁소를 들고 연습에 열중했으나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선생이 20살 되던 해 1957년 퉁소 1인자라 할 수 있는 연변에 있는 한 할아버지로부터 사사(師事)를 받았다.
당시 두만강 상류지역은 벌목한 나무를 하류로 이동시키는 수단으로 뗏목을 이용하고 있었다. 큰 위험 없이 이용되는 뗏목 운반은 하류까지 오는데 1주일가량이 소요됐다. 선생은 뗏목을 타는 몇 개월 동안 퉁소 1인자 할아버지로부터 퉁소를 배우며 실력을 쌓아가는 천금 같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이 밑천이 되어 연변가무단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퉁소를 전공분야로 전문적으로 할 수 있게 된 셈이었죠.”

비주류로 인식됐던 퉁소

신 선생이 다루는 퉁소 악기는 일반적인 직업으로 삼는 전공 악기는 아니다. 고려 이후 조선 중기까지 주로 궁중의 당악과 향당교주 연주에 사용되기도 했으나 조전 말기부터 주로 민간인들 사이에서 잔치나 행사 때 사용돼 왔고, 악기를 불던 이들도 대부분 하층민들이어서 다른 악기에 비해 크게 발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악기 분야에서 조차도 인정을 받기 어려운 악기였다.

“퉁소는 알고 보면 전공악기분야에서 얼마든지 직업화 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악기입니다. 이런 악기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 인터뷰 중 전통악기 개량작업을 설명하고 있는 신용춘 선생.
신 선생의 퉁소에 대한 애착은 누구보다도 강하다. 어려서부터 접한 퉁소가 이제는 자신의 분신이 되어 다른 전통악기로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그의 80평생에 가까운 퉁소와의 인연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신 선생은 비주류로 취급받던 퉁소가 이제는 당당히 전통 주류 악기로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의 퉁소에 대한 소개는 끝없이 이어졌다.

“퉁소는 세로로 부는 전통 관악기의 인데, 한자로는 통소(洞簫)라고 쓰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퉁애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예전에 퉁소를 잘 부르는 명인들을 보면 모두 하층민들이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4명의 퉁소 명인이 이었는데, 2명은 시각장애인으로 잔치 집에 불려가 퉁소를 불어주고 밥을 얻어먹고 살아갈 정도였으니 퉁소 부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힘든 신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퉁소는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악사 구중(九仲)이 강족(羌族)의 관악기를 개량하여 만들었다고 전한다. 일본에는 백제 의자왕 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퉁소의 길이는 ‘1자 8치’인데, 일본의 전통악기 ‘샤쿠하치(しゃくはち)’가 바로 1자 8치를 뜻한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퉁소를 같은 뜻의 ‘츠바(尺八)’라고 부르고 있다.
퉁소가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은 함경도 ‘북청 사자놀이’이다. 남한에 퉁소를 전래해 준 곳도 함경도 북청이다. 연변지역에는 100여 년 전 함경도 지방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퉁소 부는 실력을 밑천으로 연변가무단에 들어간 신 선생은 연변가무단에서 15년간 단원으로 활동을 했다. 퉁소를 전공과목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소와 플루트를 연주해야 했다. 그러나 퉁소 부는 실력으로 다른 관악기들을 쉽게 다룰 수 있었다고 한다.

“퉁소가 전공과목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악기와 함께 연주공연을 할 수 없어서 별도의 퉁소연주회를 만들어 공연을 하곤 했어요. 비록 단소나 플루트로 15년 동안 연변가무단에서 활동했지만 한 번도 퉁소 연주를 그만 둔 적은 없습니다.”

한국에서의 활동 – 국악 대가들과의 소중한 만남

1972년, 연변가무단 활동을 그만 둔 신 선생은 1993년 한국에 들어올 때까지 연변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정년퇴임을 앞둔 1992년, 그동안 연변지역에서 펼쳐왔던 전통악기 개량작업을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고국을 방문했다.

“연변에서 전통악기 개량작업을 많이 했었는데, 북한의 전통악기 개량작업도 거의 연변에서 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국과의 연연은 전통악기를 전공한 분들의 연변 방문이 계기가 돼 서로 교류가 이뤄진 것이죠.”

1992년 한중수교가 이뤄지긴 했지만 중국동포들의 한국으로의 입국은 힘든 때였다. 신 선생은 서울 종로에 있는 ‘연악사’ 사장과의 만남을 통해 악기거래 핑계를 대고 초청장을 받아 입국한 후 13년간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지냈다. 그러나 한 번도 관계당국에 잡혀가지 않았다고 한다. 입국한 첫해는 한국생활이 녹록치 않아 건설 노동자로 지내야만 했다. 신 선생은 본인과 같이 불법체류자로 한국에 들어온 많은 중국동포들을 지켜보면서 중국동포들의 권익활동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던 ‘재한조선족연합회’을 도와 중국동포의 동포자격 인정과 권익을 위해 법적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의 100일 농성, 거리행진 등에 참여하며 ‘재한조선족연합회’의 모든 활동사진과 영상관련 자료를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신 선생은 한국정부의 연이은 특별조치와 전통악기 분야에 공헌한 경력 등으로 한국체류 13년 만에 재외동포(F-4) 사증을 받았다. 신 선생이 한국에 불법체류자로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무사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한국 국악계의 원로들의 힘이 컸다.
신 선생은 한국 입국당시 가야금의 권위자이던 황병기 씨와 중앙국악관혁악단 초대단장이자 상임지휘자를 지낸 박범훈(전 중앙대 총장) 씨, 대금의 명인 원장현 씨 등 국악의 대가들을 찾아다녔다.

   
▲ 연변에서 열린 퉁소문화예술절 행사 장면.
“박범훈 선생은 우리 개량악기를 보더니 한국의 단소나 다른 악기들과 접목을 시도해 보라고 하더군요. 또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예술고등학교에서 불법체류자 신분인 나에게 학생 200명을 대상으로 단소를 가르치도록 해 주었어요. 법무부관계자들을 불러 자신의 책임 하에 교사생활을 할 수 있도록 조처도 해 주었지요.”

신 선생은 원장현 씨의 소개로 그의 제자인 강동구 ‘서울소리마당’ 최순극 원장과 남다른 인연을 맺기도 했다.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전통악기 개량과 제조, 악기 연구에 몰두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도움이 컸다고 말했다.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살자는 좌우명을 가지고 살면서 남들에게 좋은 일을 한 것도 있지만 큰일들을 치루면서 더 많은 덕을 보게 된 것 같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을 적용하는 삶이 된 셈이다.

개량악기 제작과 국악계의 풍토

신 선생은 박범훈 씨의 소개로 가야금 만드는 회사에 잠시 취직한 적이 있다. 그러나 관악기를 전공한 신 선생에게는 현악기 제작은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그 후 신 선생은 전통 관악기를 중심으로 개량악기 제조에 나섰다.

   
▲ 퉁소 개량작업을 하고 있는 신용춘 선생.
“20년 전까지만 해도 개량악기에 대해 한국 국악계의 반감이 심했어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나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신 선생은 한국 국악계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더라도 흐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전통은 무조건 지킨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은 그의 일관된 생각이다.

“중국에서는 개량악기로 과학기술발명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국악계의 거부감이 심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남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까지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개량악기 제조를 시도해 나가겠다는 것이 신 선생의 꿈인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퓨전음악이 시도되고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한국 국악계도 달라져야 하고 많은 부분에서 개방된 사고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국에 들어와 전통악기 개량작업을 하면서 신 선생은 많은 벽에 부딪쳤다. 음악의 보편성을 존중하지 않고 전통만을 고집하며 텃세를 부리는 한국의 일부 국악인들 때문이었다.

“음악에서 5음계 7음계 등으로 음계를 따름은 과학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 전통악기에서는 ‘기준음’ 없는 완고한 전통방식의 음계만을 고집해 발전에 진척이 없습니다. 기준음이 없으니 악기를 만드는 사람마다 다 다르고 다른 악기와 합동연주를 해도 서로 음이 틀리니 자기방식의 연주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 선생은 지난 20년 동안 전통악기 개량작업을 하면서 악기의 음률에 맞는 기준음을 만드는데 힘을 쏟았다. 예를 들어 주로 왕 앞에서 연주했던 정악대금과 개량된 대금인 산조대금이 있지만 악기마다 음이 달라 기준음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몇 년 전 국립국악원에서 우선 정악대금에 대해 기준음을 세운 것이 그것이다.

신 선생은 “우리 국악계에서는 국악을 음악이라기보다는 국악이라고 하는데, 특수성을 인정한다더라도 국악도 음악의 일부가 아닙니까?”라며 아직도 전통만을 고집하며 아집에 빠져 있는 일부 국악인들에 대한 원망을 토로했다.

끊임없는 전통악기 개량과 국악 연구

   
▲ 지난 1월 25일 서울 양재동 <서울의 전당>에서 열린 퉁소독주회.
신 선생은 10여 년 전 중국 연변지역 전통음악과 퉁소관련 음악을 모아서 퉁소음반을 제작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로 재작중인 이진원 박사의 소개로 국립국악원의 도움을 받아 CD제작에 나섰던 것이다. 전통악기 개량작업과 퉁소 연주에 몰두해온 신 선생이 퉁소독주회를 갖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신 선생은 지난 1월 25일 저녁 7시 서울 양재동 <예술의 전당>에서 ‘퉁소 55년 퉁소음반 10주년 기념’이란 타이틀로 퉁소독주회를 가졌던 것이다. 이 독주회는 신 선생이 10년간 고문으로 활동해 온 강동구 ‘서울소리마당’ 최순극 원장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뤄졌다.

‘연변퉁소의 아버지’라 불리며 연변에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퉁소로 연주할 수 있는 100여 곡을 만들어 보급하는 등 퉁소문화 전파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퉁소 음반을 내며 퉁소연구회 설립과 퉁소의 개발과 저변확대를 위해 노력해 온 신 선생으로서는 최근 퉁소독주회에 대한 감회는 남달랐다.
악기개량과 제조를 꾸준하게 진행하고 있지만, 신 선생은 퉁소 연주를 하루도 빼먹은 적이 없다. “연습을 안 하면 밥을 안 먹는 것 같다.”며 평생 퉁소 연주를 해온 비결을 ‘퉁소연주를 업으로 삼아온 자신의 직업에 사랑’이라고 했다. 신 선생은 80회 생일 때 대학에서 퉁소독주회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지난 56년간 퉁소를 연주했고, 80가까이 퉁소를 불고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며, 퉁소를 제일 잘 부는 사람도 자신이라는 자부심도 대단했다.

신 선생은 퉁소가 악기로서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음악을 위해 악기가 존재하는 것처럼, “음악은 목적이고 악기는 수단일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날의 삶은 악기자체가 목적이 돼 버린 풍토를 바로잡는 작업이었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 이 작업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일로 남아있다.
신 선생이 전통 관악기 개량작업에 있어 심혈을 기울이는 또 하나는 악기의 음률을 조정하는 ‘리드=혀=소’라고 불리는 것을 만드는 작업이다. 우리 전통 관악기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리드를 쓰는 악기중 대표적인 것이 피리다. 신 선생은 고음만 있고 저음이 없는 우리의 전통 피리를 악기마다 다 있는 대・중・소음을 낼 수 있도록 리드를 사용해 피리를 개량했다. 그가 만든 ‘대피리’는 북한의 개량피리보다 4음이나 저음을 낼 수 있는 피리다. 또 1994년 음이 맞지 않아 개량한 대금(大笒) 중금(中笒) 소금(小笒)은 20여 년 동안 표본악기로 쓰이고 있다.

   
▲ 개량작업으로 완성된 퉁소. 그는 음이 없는 악기에 음을 만든들고자 '키'를 달았다.  
신 선생은 비용도 많이 들고 음이 고르지 못한 수작업을 통해 만든 리드악기를 대신해 음이 고르고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리드제작 기계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특허도 받았지만 수작업으로 벌어먹고 사는 분들의 영역까지 침해하고 싶지 않아 본격적인 가동은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신 선생에게는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달라는 요구나 특수 악기 주문이 들어오기도 한다. 이러한 요청에 응하는 것은 속 깊은 배려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잃은 대금을 불 수 없는 한 스님에게는 한손으로 불 수 있는 대금을 만들어 주어 제2의 인생을 살도록 해 주었고, 전통악기 유망 연주자였으나 사고로 한쪽 팔을 다쳐 실의에 빠진 학생을 위해 한 손으로 불 수 있는 특수 악기를 제작해 같이 무대에 서서 합동 연주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신 선생은 남이 하지 못하는 국악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과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지금도 전통 악기분야에서 남들이 할 수 없는 ‘키’를 만들어 달고 있다. 음이 없는 악기에 음을 만들고자 ‘키’를 달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중국 연변지역 시범학교(소학교)에 7개의 악기를 제작해 보냈다. 신 선생이 만든 7개 악기는 한 종류의 악보만으로도 동일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제작 된 것이다.

“한국에는 국악에 대한 기초가 없습니다. 여력만 따른다면 초등학생들이 배우기 쉽고 효과 좋은 음을 낼 수 있는 악기를 제작할 수 있는데 많이 아쉽다.”며 재정적 뒷받침과 인식이 전환되지 못하고 있는 국악 풍토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신 선생이 요즘 가장 고민하는 것 중 하나는 후계자 양성이다. 음악에 대한 이해와 재능, 손재주가 있는 사람을 찾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의 재능과 기술을 물려줄 후계자가 없어 크게 고민하고 있다. 다행히 몸이 건강해 악기를 개량하고 80이 넘도록 퉁소를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후계자 양성은 서둘러야 할 문제라서 이에 대한 고민이 깊다.

신 선생은 그동안 서로 음이 맞지 않는 전통악기를 개량하고 퉁소음악을 다 정리해 놓았으며, 가요 등도 퉁소로 부를 수 있는 작업도 마쳤다. 몇 가지 곡 외에는 부를 수 없었던 퉁소를 개량해 100여 곡을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한국에 와서 전통악기 개량작업을 하고 퉁소연주와 전통곡 정리 등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살려 국악발전에 기여하고 있고, 중국에서는 맛볼 수 없는 보람도 느끼고 있어 주어진 삶에 감사하고 있지만, 아직도 손대지 못한 분야가 많아 많은 아쉬움을 갖고 있다고 했다.

아집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국악공연이 국악인들의 집안잔치가 돼버린 변하지 않은 한국국악 풍토에서, 신 선생의 전통악기 개량작업은 무모한 도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악기는 수단일 뿐, 음악을 위한 악기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국악이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끊임없는 연구와 개량작업을 통해 전통악기 체계화를 꿈꾸는 신 선생은 ‘퉁소의 아버지’를 넘어 ‘전통악기의 선구자’로 불리게 될 날이 머지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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