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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단 개혁을 꿈꾸는 왕청일 민단교토본부 단장, 그는 누구인가
김도균 기자  |  kdg@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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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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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청일 민단 교토본부 단장
지난 12월 말, 왕청일(王淸一) 민단교토(京都)본부단장이 해외교포문제연구소를 찾아왔다.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가 주최한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가 사무실을 찾은 것이다. 왕(王) 단장은 재일교포 2세로 한일 간의 역사, 문화, 사회에 대한 연구와 상호이해 증진, 문화교류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어 문화단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왕 단장에게는 언제 봐도 영국신사의 면모가 풍긴다.
한국어가 약간 어눌하지만 이러한 왕 단장의 모습 속에 무엇보다도 한국문화에 대한 열정이 몸에 베어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또 왕 단장은 민단 역대단장 중 유일하게 국제연합 전문기구인 유네스코(UNESCO) 이사로 재직하고 있고, 한국 상고사(上古史)와 판소리에도 조예가 깊다.
한일문화교류를 바탕으로 한일관계 증진과 재일동포사회의 동질성 회복에 앞장서고 있는 왕 단장에게 민단활동을 포함한 그의 포부의 일단을 들어봤다.

재일교포 2세로서의 활동과 유학

재일교포 2세인 왕(王) 단장에게 선친의 도일(渡日)한 사연과 가족관계에 대해 물었다. 부친의 고향은 부산 용호동이라고 했다. 12살 되던 해 손수건 하나만 가지고 도일했는데, 일본에서 막일이라도 하려면 손수건이 필요할 것 같았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나고야 지역의 양계장 일을 시작으로 이발소 종업원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6개월 만에 일본말을 익혔고, 혈혈단신으로 살다가 20살 즈음에야 터전을 잡았다고 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중학교 때까지 아버님이 임업에 종사하셨는데, 제 초등학교 시절에는 교토 근처에 20만 그루 정도 나무가 심어져 있는 산을 매입해, 후에 50만 그루 재목(材木)으로 되파셨죠. 목재산업으로 당시 큰돈을 모으신 겁니다. 그러다 불경기로 목재사업을 그만두시고 대부업을 잠깐 하시다가 나중에 부동산업을 하셨어요.”

부모님 슬하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자란 왕 단장은 부친이 부동산업을 하던 시절 간사이(関西)대학을 다니다 서울로 유학을 왔다. 왕 단장은 유학 오기 전, 미국유학생 모집에 합격해 건강진단까지 마치고 출발일자만 기다리고 있었으나 미국 출발 3일전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비자를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재일교포로서의 서글픔과 비애를 맛보기도 했다.

“유학을 못 간다는 말에 어찌나 낙심을 했던지 1달 동안 학교도 안가고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어요. 그러던 차에 아버님이 서울대학교에서 유학생을 모집한다고 가보라는 거예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났죠. 초등학교 5학년까지는 한글을 몰랐어요. 방학 때 학원형태로 운영했던 ‘신명학교(信明學校)’와 민단 하계(夏季)학예학교에서 조금씩 한글을 익히다가, 서울대에서 1년간 어학연수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글을 배웠습니다.”

서울로 유학을 온 왕 단장은 당시 서울대 부총장 동창인 지인의 권유로 서울대 경영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 반 정도 다녔을 무렵 일본에서 정식 부동산 회사를 설립한 부친의 부름을 받아 중간에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졸업도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였지만 교우들의 권유로 자퇴는 하지 않고 휴학을 했었습니다. 아버님은 농지 2만평을 사서 주택개발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섰고, 그 후 나는 이 일이 평생 업(業)이 되었습니다.”

가업계승과 특별 세무조사

일본으로 돌아가 아버지 사업을 돕던 왕 단장은 얼마 후 본격적으로 경영일선에 나섰다. 왕 단장은 교토에 있는 청수사(淸水寺, 기요미즈데라) 근처 땅을 주택단지로 개발해 선분양에 나서는 등 크고 작은 주택개발사업(빌라, 아파트 등)을 펼쳐 당시 교토일대에서는 주택개발에 있어 유명세가 붙었고 경제적으로도 큰돈을 벌었다. 돈 잘 버는 회사로 소문이 나자 일본 국세청은 방관만 하지 않았다. 일본 국세청의 특별 세무조사대상이 되어 추적조사를 받게 됐다.

“당시 세금만 매년 1억 엔씩 내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세금을 제대로 안 냈다며 세무공무원 180명이 몰려와서 세무조사를 하더군요. 당시 오사카 세무서 직원이 140여명 이었으니 얼마나 강도 높게 당했는지 짐작하실 겁니다. 세무조사로 10억 엔의 세금과 이자 8억 3천만 엔을 3일 이내로 납부하라는 통보가 왔습니다. 보통의 경우는 2~3달 정도의 유예기간을 주거든요.”

누구의 모함이었는지 모르지만, 교토에 돈을 많이 번 교포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아마 본보기로 자신의 회사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왕 단장의 사업체 세무조사 사건을 보고, 후에 교포들이 자발적으로 세금을 냈음은 물론이다. 왕 단장은 일단 은행대출을 받아 세금을 납부했고, 소송을 제기해 13년 만에 1심 판결에서 승소했다. 일본 국세청은 승소가능성이 없다고 포기를 한 반면, 왕 단장은 형사소송에서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다는 무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 국세청을 상대로 세금반환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었다고 했다.

“변호사의 말이 ‘승소하더라도 나중에 회사가 망할 수 있으니 타협하라’고 했어요. 후일을 위해 국세청과 타협을 해 원금 50%와 이자 반을 돌려받는 것으로 마무리했었습니다. 그 후 회사가 회생해 부동산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왕 단장은 그때를 회상하며, 경제적 어려움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민족문화교류 활동과 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한 노력

   
▲ 2012년 3월, 민단 교토본부 3기관장 선출 직후. (왼쪽부터 강재문 의장, 왕청일 단장, 하용해 감찰위원장)
왕 단장은 세계한인동포 중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모국대학에 ‘연구소’를 설립한 특이한 사람이다. 필자는 이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지난해 12월 동국대학 일본학연구소가 주최한 ‘제47회 국제학술심포지엄’ 및 ‘왕이호(王利鎬)일본학연구재단’(*왕이호-왕청일 단장의 부친) 이사회 참석차 방한한 적이 있습니다. 1978년 설립된 동국대 일본학연구소는 한국 최초의 일본학연구소입니다. 하버드대학에서 오사카외국어대학으로 부임한 고(故) 김사엽(金思燁) 교수가 제 동생 지도교수로 있었는데, 동생을 만나러 회사에 찾아온 것이 계기가 돼 친해졌고 일본학 연구를 공조하게 되었죠. 후에 김사엽 선생이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서울대학 전신) 동창생인 정재각 동국대총장과의 인연으로 동국대로 부임해 오면서 재단법인설립까지 이르게 된 것이죠.”

왕 단장이 인연을 맺고 있는 동국대 일본학연구소의 국제학술심포지엄은 올해로 47회째를 맞이했다. 왕 단장은 일본학연구소와 (재)왕이호일본학연구재단 설립 당시에는 반일감정이 고조되던 시기여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탈일입구미(脫日入歐美)’를 외치며 ‘일본’이란 단어가 들어간 간판을 내걸면 부숴버릴 정도로 반일감정이 고조되던 시기여서 일본학연구소 설립에 애를 먹었습니다. 설립자금은 과거 일본 국세청으로부터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받을 때 약 5천만 엔을 극적으로 자동차 엔진 속에 감추어 두었었는데, 그 돈을 가져와 법인을 설립하게 된 것이죠. ‘친일(親日)학자는 많아도 일본을 정확히 아는 지일(知日)학자는 거의 없다.’는 생각에 일본학연구소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 활동과 관련해 한국정치권이나 재일교포사회에서의 요구나 부름은 없었는지 묻자, 교포들의 민단중앙단장 출마 권유가 있었다고 했다. 왕 단장은 교포들의 요구는 민단개혁이라며, 자신이 민단중앙단장에 출마하든 안하든 간에 선거개혁을 비롯한 민단개혁은 꼭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왕 단장이 ‘일본의 국제화 재일한국•조선인문화’란 주제로 1990년부터~2000년까지 10여 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국제학술심포지엄을 하게 된 동기는 김사엽 교수와 동국대 정재각 총장의 영향이 컸다고 했다. 왕 단장 일행은 반일감정이 고조됐던 90년대 초, 국제심포지엄 개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재일한국인과 재일조선인이 하나가 돼 한일문화교류를 바탕으로 국수주의 경향으로 흐르고 있는 일본에 경종을 울리고 국제화를 도모하자는 취지로 심포지엄을 밀어붙였다고 토로했다.

“심포지엄의 내용은 한국,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한일관계와 교육•문화를 진단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김사엽 교수는 일본 최고의 고전집인 만엽집(万葉集)을 한국어로 4권까지 번역했고, 마지막 5권 째를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지요. 정재각 총장은 동국대학 박사논문을 모아 ‘일본학’이란 책에 게재토록 하기도 했었죠. 그 외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선생과 일한문화교류위원장 김용우 선생 등이 참가하기도 했고, 음악회, 전시회, 스포츠 등이 동시에 개최되기도 했습니다. 재일한국인과 조선인문제를 테마로 일본의 국제화와 재일한국•조선인문화의 역할을 조명하는 것이었지요.”

   
▲ 2011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26회 일본국민문화제에서 왕청일 단장이 판소리를 열창하고 있다.
왕 단장은 한일관계에 대한 국제학술심포지엄 외에 한국 전통문화인 ‘판소리’에도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한일문화교류의 적극적 참여와 활동으로 ‘문화단장’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왕 단장은 국제학술심포지엄과 문화교류 활동을 통해 해외에서 온 여러 학자들과 정치•이데올로기보다는 문화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남북교류의 장을 만드는 등 민족의 동질성회복 부분에서는 본국의 학술문화단체보다 한발 앞서나갔다고 자부한다. 그러한 토대위에 한류가 붐을 일으켰고, 한류의 영향으로 한일월드컵 공동주최와 학술, 예술,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뤄졌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특히 한일불교문화교류에 관한 일본학계의 오류를 수정하는데 기여했다며 자부심을 내비췄다.

왕 단장은 1998년부터는 이희건 신한은행 명예 이사장의 지원을 받아 일본학 총서를 발간해 국내외의 큰 호평을 받기도 했다. 향후 왕 단장은 교포 2세와 후세들을 위해 K-POP 스타 등을 초청한 문화사업도 펼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청년들과 재일교포청년 간의 교류도 추진해 나갈 생각이라고 문화교류활동에 대한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왕 단장의 이러한 한일관계 증진과 문화활동 지원에 대한 평판과는 별도로 작년 민단중앙 의장선거에 입후보해 비록 낙선의 아픔을 겪었으나, 재일동포사회에서는 그가 제시한 선거공약은 개혁적이고 신선한 공약이었다고 평가한다.

“지금의 형태로는 민단의 밝은 미래를 전망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민단의 변화와 개혁이 요구되는 시점인데, 100년을 전망할 때 앞으로의 민단은 변화와 개혁을 통해 생활민단, 문화•교육민단으로 활동을 전개해 나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왕 단장은 지난해 민단중앙의장 후보에 나서며 ‘장래가 있는 민단 만들기’를 위해 다음과 같은 3가지 기본목표를 제시했다. △관계자가 서로를 자극, 공조해 가면서 긍지 높은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마당으로서의 민단, △일본에 공생사회를 구축하는 거점으로서의 민단, △재일 100년의 역사에 입각하여 앞으로의 100년을 전망하고 재일의 원동력으로서의 민족교육을 준수하는 민단으로 새롭게 출발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왕 단장은 이를 위해서 도래문화(渡來文化)가 뿌리를 내린 교토(京都)에 ‘한국역사문화센터’ 를 건립해 재일동포와 관련된 자료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하고, 공연과 각종 행사 등을 개최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인간의 역사는 교육을 통해 재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문화의 창과 교육의 혜안을 높이는 민단을 구상했던 겁니다.”라고 말하는 왕 단장에게서 민족문화교류와 민단변화에 대한 의지를 볼 수 있었다.

민단의 개혁과 일본의 동화정책에 대한 대응

기자는 민단의 고질병중의 하나인 중앙3기관장 선거 시의 ‘돈 선거’에 대해 물었다. 소위 선거 과정에서 총 3억 엔 정도가 뿌려진다고 하는데, 이는 고스란히 일본 정부에 꼬투리를 잡히는 꼴이 되고, 결국 민단 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민단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선거제도라고 봅니다. 민단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정책논쟁을 할 수 있어야 하고. 토론이 가능한 열린 선거문화가 정착되어야 하는데, 지금의 선거제도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이뤄지기 힘든 구조입니다. 민단의 선거가 ‘돈 선거’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나려면 선거인을 지금보다 대폭 늘려야 하는데, 소수 몇 백 명만 참여하는 대의원 수로는 ‘돈 선거’에서 벗어나기 힘들뿐더러 건전한 정책논쟁 또한 기대하기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중앙민단 3기관장 선거인 수가 1만 명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왕 단장은 재일동포들이 한국 대통령 선거에는 참여할 수 있는데, 민단중앙단장 선거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모순이 아니냐며 민단선거의 맹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왕 단장의 민단선거개혁에 대한 생각은 확고하다. 그러나 지난해 교토본부단장 선거에 입후보한 것을 두고 ‘민단중앙 의장선거에서 떨어진 사람이 교토단장 선거에 입후보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이에 대한 왕 단장의 입장이 궁금했다.

   
▲ 2012년 12월, 동국대 일본학연구소 주최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는 왕청일 단장
“민단의 지방단장선거 규약을 보면 제11조에 지방사정에 준해 지방대회에서 결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만, 2012년 2월 민단 중앙위원회에서 이를 삭제하고 중앙에 준해서 하도록 규약을 개정함으로써 중앙집권적, 즉 지방의 자주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바꿔버렸습니다. 굳이 교토단장에 출마하게 된 이유는 정책논쟁이 가능한 민단의 선거문화를 만드는 것이고, 민단에 입단한 교포3,4세가 새롭게 민족의 일원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자는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민단 교토본부에서라도 이런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또 민단중앙 의장선거에서 정책논쟁, 청결한 선거문화를 바라며 나를 지지해준 152명에 대한 일말의 책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출마해도 낙선할 것이라는 소극적인 의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떨어져도 좋으니까 정론(正論)만은 당당하게, 내용으로 승리하면 된다.’는 각오로 출마를 했었습니다.”

왕 단장은 교토단장선거를 통해 교토를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민단으로 만들어 민단중앙이 교토민단을 표본으로 삼을 수 있도록 ‘지부에서 중앙으로,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비주류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민주적이고 개방된 민단과 재일 100년사에 즈음해 문화와 교육을 통한 민단개혁을 주장하는 왕 단장이 일본의 동화정책과 맞서 어떤 방향을 설정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교포 1세는 이국땅에서 피땀을 흘렸고, 2세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으며, 3세들은 그 토대위에서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는 회기현상이 있다고 합니다만, 재일동포들도 예외가 아닐 겁니다.”

왕 단장은 조국이 일제 강점기 만주벌판에서의 독립운동, 일본 탄광에서의 억압과 착취를 당한 역사를 비롯해 근현대사를 통해 이제 1천만 재외동포시대를 맞이하고 있는데, 재일동포들도 반만년의 문화민족 일원으로서 이제는 갈라진 조국 앞에, 하나 된 재일동포사회를 보여줄 때가 되었다고 했다. 이런 측면에서 왕 단장은 민단의 개혁은 필수적인 것이고, 민족정체성을 상실케 하려는 일본의 동화정책에 맞서 문화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민단의 현안문제인 ‘한상련’ 문제와 관련해 왕 단장은 “실패는 참지 못하는데서 생긴다는 말이 있듯이 양측이 감정적으로 대립할 것이 아니라 재일동포 장래를 위해 한발씩 양보해 화해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일반사단법인 한상련(회장 박충홍)’과 민단산하 상공회(회장 홍채식)의 통합을 촉구했다. 분열된 상태의 싸움은 어느 쪽이 이겨도 패배의 길이지만 화해를 통한 통합은 양측의 명예요, 승리이며 재일동포 장래를 위한 재출발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조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

왕 단장은 지난해 ‘Korea Today’ 12월호에 내국인도 잘 모르는 우리나라 고서인 천부경(天符經)과 환단고기(桓壇古記)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그와 같은 고서를 접하게 됐는지 자못 궁금했다.

“일본 ‘삼성(三省)이데아’출판사가 발행한 우리나라 상고사 실록 ‘환국정통사(桓國正統史)’와 환단고기(桓壇古記), 천부경(天符經) 등을 일본어로 번역하는데 지원을 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동국대 일본학연구소가 ‘일본학’ 총서를 발행하고 있으나, 한일양국 간 올바른 역사이해가 무엇보다도 절실하다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학자들 중에는 천부경과 같은 상고사에 대해 처음 접한 학자들이 많아서 이를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한일교과서 문제, 식민지청산은 물론 한일 간 어긋난 고대사(古代史)관을 바로 세우는 것이 긴 안목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왕 단장이 왜곡된 한일역사청산과 재일동포의 민족정체성 확립에 매우 열정적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오랜 생활을 해왔고, 동국대학 일본학연구소 설립과 지난 10여 년간 일본에서의 문화강좌, 학술회의, 민단활동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한 왕 단장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 1994년 11월 3일, 교토에서 열린 '원코리아 퍼레이드' 행사

“제가 90년대 초 민단 교토본부 부단장으로 있던 93년과 94년, ‘원코리아 퍼레이드’ 행사가 개최된 적이 있었습니다. 91년도의 남북한 국제연합(UN) 동시가입 기념을 위해 민단 교토본부 측과 총련 교토지방본부 측이 교토 중심가에서 시가행진을 한 후 민단 교토단장과 총련 교토본부 위원장이 서로 다가와 껴안는 행사였습니다. 처음 보는 조총련 인사였습니다만 두 사람이 서로 껴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 그 체험이 나로 하여금 오늘날까지 남북관계에 앞서 ‘재일동포가 하나 되는 것이 조국통일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통일철학’이 형성된 것이지요.”

왕 단장은 이 사건을 민단활동을 하면서 제일기억에 남는 일로 꼽았다. 그런 흐름에서 48개의 민단 지부 중 유일하게 교토본부는 ‘민단-총련-일본 행정당국’이 참여하는 3자 공동행사를 개최해 강연회, 국어강습 등을 열고 있다. 이것을 재일교포사회에서는 ‘교토 메아리’로 부른다.

왕 단장은 ‘원코리아 퍼레이드’ 는 당시 ‘조국은 하나다, 민족통일’ 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민단 교토단장과 총련 교토위원장 그리고 양측 부인회가 모두 참여하는 행사였다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런 것이 계기가 돼 민단산하기관은 아니지만, ‘교토청년회의소’는 1년에 한번씩 ‘교토총련청년상공회’를 초청해 행사를 진행하고 있고, 스포츠 활동을 통해 친목을 다지고 있다고 했다.

재일동포사회의 민족문화 전승과 민족교육을 기치로 문화•학술지원활동과 다문화 공생시대를 주창하고 있는 왕청일 교토본부단장. 체제와 이념을 초월한 재일동포사회의 ‘원코리아(One Korea)’에 대한 그의 신념은 일본문화의 중심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꽃을 피워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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