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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1600번지'
LA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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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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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중앙일보 <윌셔 플레이스> / 박용필 논설고문 ]


한국전쟁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은 슬하에 딸만 하나 있다. 딸 마가렛의 꿈은 오페라 가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뉴욕서 데뷔무대를 가졌으나 뉴욕타임스는 "자질이 없어 보인다"는 혹평기사를 냈다. '딸바보' 트루먼이 팔짱끼고 있을리 없었다. 담당기자에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고는 "네 코뼈를 박살내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대통령의 품위를 실추시켰다는 비난여론이 들끓었는데도 트루먼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자식을 음해하는 데 눈감고 있을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며 큰소리쳤다.

결국 마가렛은 성악가의 꿈을 접고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스릴러물 작가로 변신한 마가렛은 20여 권의 소설을 써냈다. 첫 작품은 '백악관의 살인'(1980년). 훗날 '1600번지의 살인(Murder at 1600)'이란 타이틀로 영화로 제작돼 또 한번 화제의 인물이 됐다. 백악관의 주소가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1600번지다.

영화의 주인공은 웨슬리 스나입스. 부인이 한국여성이어서 흔히 '웨서방'이란 애칭으로 불린다. 원작가도 트루먼의 딸 게다가 내용도 북한과 관련된 것이어서 더욱 흥미를 끌었다.

영화에서 대통령은 비둘기파 안보 보좌관은 매파로 나온다. 북한이 미군 조기경보기를 납치해 승무원들을 억류 고문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보좌관은 대북 전면전을 건의한다. 이를 거부하는 대통령. 참모들도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백악관에 긴장감이 감돈다.

대통령이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자 보좌관은 음모를 꾸민다. 심복 경호원을 시켜 여비서를 살해한 뒤 대통령과 그의 바람둥이 아들을 용의자로 덮어 씌워 협박한다. 북한을 공격하든지 아니면 사임하든지 양자택일하라며 대통령을 윽박지른다.

보좌관은 악의 집단은 무력으로 가르쳐야 한다며 대북 응징론을 편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각하 미국은 평화가 아니라 정의를 선택해야 합니다." 작가가 시어도어(테디) 루스벨트의 대통령 취임사(1905년)를 인용한 것이다.

스페인의 쿠바에 대한 야만적인 식민통치에 분개한 루스벨트는 젊은 시절 의용군을 이끌고 쿠바 내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이후 미국은 필리핀 괌 등 스페인 식민지를 무력으로 점령해 주변 국가들로부터 제국주의라는 욕을 먹었다.

루스벨트의 취임사를 더 깊숙히 들여다 보자. "누구나 평화를 바란다. 하지만 나는 정의에 바탕을 둔 평화를 원한다." 이어 그는 "(전쟁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정의를 이 땅에 곧추 세우기 위해 평화를 원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영화에서 수사관으로 출연한 '웨서방'은 보좌관이 살인사건의 배후자라는 사실을 밝혀내 대통령을 위기에서 구해낸다. 평화(협상)가 정의(무력응징)를 이겼다고 할까.

최근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문 채택으로 북한이 워싱턴과 서울을 향해 연일 핵타격 위협을 쏟아내고 있다. 최고통치자인 김정은이 "전면전을 개시할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췄다"고 공언해 한반도에 다시 군사긴장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남북 간의 대화 창을 폐쇄하는 등 초강수를 둬 더욱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마침 오늘(12일)은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공식 발표하며 핵무장을 선언한지 꼭 20년 째 되는 날이다.

"아무리 약소국일지라도 정의를 행하고 실천하는 나라라면 미국을 결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100여 년 전 루스벨트 취임사의 하이라이트다. 그의 이 말이 마치 작금의 북한을 두고 한 말 같이 들린다.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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