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혜경 / 사할린국립대학 한국어과 파견교수 ]

11월, 길고 긴 사할린의 겨울이 다가왔다. 내년 4,5월까지 우리는 흰 눈에 싸여 주로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며, 7,8월 여름까지 우리의 위장은 저장 식품들로 채워질 것이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꼭 해 두어야 할 일 - 한국에서는 ‘김장’이다. 이곳 사할린에서도 제일 중요한 월동준비가 ‘김장’이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김장을 않는 집들이 늘고 있는데 사할린동포들은 여전히 한 집도 빠짐없이 김장을 한다.

겨울이 빨리 찾아오는 사할린에서는 눈이 내리기 전에 배추 수확을 마쳐야하는 이유로 한국보다는 좀 이른 10월초부터 중순경이 김장철이다. 다음해 6,7월이나 되어야 김칫거리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에 저장기간이 아주 긴 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늦게 하려고 하지만, 10월말을 넘기면 배추를 구할 수가 없으니 마냥 미룰 수만도 없다.

김장거리 배추나 무는 주로 재래시장에서 구입을 하는데, 올해 시세는 1kg당 10루블로 한포기 값이 30루블, 즉 한국 돈으로 천 원 정도다. 살림꾼들은 좀 더 싸게 사려고 밭에 직접가거나 이웃들끼리 공동구매를 하기도 한다. 김장은 ‘배추김치’와 ‘깍두기 김치’, 이렇게 두 종류를 담근다. 다른 김칫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4인 가족 기준으로 대체로 한 집 김장 량은 100~150kg정도. 배추와 깍두기의 배율은 4대1 정도로 단연 배추김치를 즐긴다.

배추나 무는 사할린에서 토지를 임대해 농사를 짓고 있는 동북지방 출신의 중국인들이 주로 공급하고 있다. 그들은 봄에 와서 씨를 뿌리고, 여름부터 오이, 토마토, 가지, 고추, 양배추 등을 팔기 시작한다. 늦가을 김장용 배추를 팔고 나면 이들의 한 해도 마무리가 된다. 김장철이 끝남과 동시에 집으로 돌아가 다음해 봄에 다시 돌아온다. 겨울의 얼어붙은 땅이 이들을 쉬게 한다. 동포들은 중국인들 덕분에 배추김치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소련시대에는 배추가 없어서 양배추로 김치를 해 먹었단다. 9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사할린에서 배추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러시아인들도 양배추를 비롯해 다양한 야채를 소금에 절이어 김치처럼 먹는데, 최근에는 ‘김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김치에 빠져 있다. 이웃해 살다보면 입맛도 닮아가기 마련인지...

‘김치’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춧가루. 소련시대에는 고춧가루 구입이 쉽지 않았다. 멀리 우즈베키스탄에서 인편이나 우편으로 전해 받았다고 하는데, 90년대부터는 수입 중국산 고춧가루도 들어오고, 요즘은 한국산 고춧가루도 사할린에서 구입이 가능하다. 한국산은 우즈베키스탄이나 중국산보다 가격이 좀 비싸지만 맛이 있어서 인기다. ‘우리 집 김치는 한국 고춧가루로 담가서 아주 맛있어.’라는 자랑을 한다.

소련시대에 재료 구하기가 힘들었던 탓에 김치에 들어가는 ‘소’의 재료나 양념이 아주 간단한다. 마늘, 고춧가루, 젓갈만으로 김치를 담는다. 젓갈은 소금에 절인 조개나 연어, 송어 국물을 사용하는데, 여름철에 강가나 바닷가에서 채취해서 소금에 절이어 두는 일은 동포들의 연중행사다.

여기서는 한국처럼 ‘소’를 배추 한 잎 한 잎에 꼼꼼히 바르지 않고, 듬성듬성 바른다. 꼼꼼히 채워 바르면 너무 맵단다. 고춧가루가 귀해서 아끼다 보니 덜 맵게 먹게 된 모양이다. 절인배추를 양념과 버무릴 때 배춧잎 사이에 살짝 소금 간을 해 둔 연어의 고깃덩어리를 끼워 넣는데 이렇게 삭힌 연어 맛이 별미다. 사할린에는 연어가 흔하니 아끼지 않는다.

이렇게 버무린 배추김치와 깍두기는 나무통에 넣어 땅 속에 파묻는다. 그런데 차츰 한국산 ‘김치냉장고’에 보관하는 집들이 늘고 있다. ‘김치냉장고’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데, 한국인과 다름없이 이들도 김치 없이는 못사는 ‘김치중독자’들이다.

며칠 전에 코르사코프에 사는 동포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장을 마치고 한잔 할 터니 놀러오라는 것이었다. 도착하니 이미 김장을 끝내고 친척, 친구들이 상에 둘러앉아 시끌벅적하게 먹고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상차림이나 분위기가 마치 잔칫집 같았다. 상 위에는 삶은 돼지고기와 방금 버무린 김장김치가 올라와 있었다. 20여년을 해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 온 나는, 잠시 어릴 적 우리 집 김장하는 날로 돌아간 듯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입과 손을 바쁘게 놀리시고, 아저씨들이 김칫독을 묻기 위해 땅을 파거나 담근 김치를 나르고, 아이들은 그 주위를 뛰어다니고, 김장을 끝내면 둘러앉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삶은 돼지고기에 갓 버무린 김치를 싸 먹었다.

시끌벅적, 웃음이 넘치는 날. 이제는 한국에서도 만나기 쉽지 않은 김장 날의 정경. 이러한 모습이 사할린에는 아직도 남아 있다. 이들에게 ‘김장’으로 월동준비를 마치고 나면 긴 휴식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텃밭도 사람도 쉰다... 그래서 더 즐거운 ‘김장 날’ 인지도 모르겠다.
 

[자료제공 - 지구촌동포연대(K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