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삼오 / 호주 한국일보 편집고문 ]

▲ 김삼오 호주한국일보 편집고문

새 정권, 새 정부의 출범을 알리는 한국 대통령 취임식 장면은 언제나 같다. 거창하고 희망찬 축제다. 그 순간만은 말이다. 코앞에 다가온 대선에 이어 내년 2월 25일에 있을 19대 대통령 취임식도 물론 똑 같을 것이다. 특별히 마련된 맘모스 식장은 3부 요인을 중심으로 고위공직자와 각 분야 저명인사들로 화려하게 채워진다. 그 현장이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중계되어 퍼져 나간다. 이 자리에 초청 받을 정도가 돼야 영향력 있고 잘 나가는 이 나라의 지도급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나의 관심의 초점은 그게 아니고 대통령의 축사의 알맹이다. 그것은 국정의 최고 지도자가 나라를 향후 5년 동안 어떻게 이끌고 나갈 것인가, 어떤 국가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작정인가에 대한 청사진이다. 요즘 잘 쓰이는 영어 표현을 빌리면 정치적 비전 (vision)과 그 구체적 실천 방안이다. 비전이란 앞을 보는 시력, 말하자면 눈이다. 그 시력이 길게 멀리 넓게 볼 수 있어 원대하다면 나쁠 건 없지만, 가깝게 보이고 자질구레하게 들려도 비전은 비전이며, 구름 잡기가 될 수밖에 없는 거창한 수사(修辭)보다 우리 사회의 실정으로 봐 더 값질 수도 있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대통령 축사 원고는 대통령 자신이 쓰지 않는다. 연설 기안자(요즘 스피치 라이터/speech writer란 영어가 더 실감이 난다)가 따로 있다. 대통령이 자신 나름대로의 긴 안목이 없고 훌륭한 연설문을 쓸 문장력이 없는 게 오히려 정상이다. 하지만 그게 이유 전부가 아니다. 그는 바쁘다. 또 그 내용에 들어갈 사항은 남이 써주어도 엉뚱할 수 없고, 전문 기안자로 하여금 쓰게 한다면 더 효과적이다.

어떤 나라가 잘 사는 나라며 바람직한 사회인가 모르는 사람 어디 있나.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일자리가 남아돌아가고, 모두 잘 사는 나라, 거기다가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이어서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 강자와 약자, 부자와 가난한 자 간 갈등이 없어 사회가 안정되어 있는 나라, 그래서 국민대통합이 이뤄진 나라, 그보다 더한 이상향, 유토피아가 어디 있겠는가.

비리의 백화점

그래서 그 축사 내용을 뜯어보면, 그런 사회를 위한 멋진 용어와 개념과 표현을 적절히 섞어 잘 쓰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도 전문 스피치 라이터만은 못하지만 하나 쓸 수 있다.
이렇게 장황하고 달콤한 국정 청사진의 발표와 국민의 뜨거운 열의와 기대 속에 출범하는 정권이 5년 동안 갈팡질팡하다가 말기에는 ‘그게 그거였다’라든가 ‘이전 정권보다 더 못했다’와 같은 국민의 원성으로 끝나는 이유는 물론 원대한 비전과 실천 계획이 틀려서가 아니었다. 말뿐이지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실천은 안 되는가? 왜 실천을 해야 할 자리에 있는 자는 실천을 안 하는 건가?

이미 오래 전 사회심리학 연구에서도 밝혀졌지만, 그런 학술 이론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 일상생활 경험에서 쉽게 알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실천 안 하는 것, 말뿐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 변수는 자기 이익, 즉 이권이다. 공직자의 올바른 결정과 집행을 가로막는 이른바 비리의 백화점에 나열되는 많은 아이템을 보자. 한마디로 말해서 전체 사회가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위한 것들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흔한 여론조사나 전시용 학술대회, 전시용 행사 대신 거기에 쏟아 붓는 돈으로 ‘우리 국민은 왜 그런가’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를 한다면, 사회 전체에 정말 좋은 교육이 되고 사회문제 해결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언제나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게 하나 있다. 한국인들의 운전 매너다. 영국 더 타임스의 서울 특파원을 지낸 마이클 브린이 그의 저서 ‘한국인(The Koreans)’에서 한 한국인의 운전 매너 묘사가 압권이다.“lawless, selfish, rude”- 우리말로 바꿔보면, ‘무법천지고, 자기 이익 밖에 모르며, 무례하다’가 될 것이다. 금년에도 나는 한국에 가서 몇 달을 지내면서 그 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꼈다. 사람의 행태는 내부 일관성을 갖게 마련이다. 운전은 누구나 눈으로 쉽게 지켜 볼 수 있는 행위다. 그러한 운전 매너를 가진 사람이 밖에서 잘 보이지 않는 정말 중요한 영역인 국정과 사회를 이끈다고 생각해보자.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게 한국의 실체가 아닌가 한다.

또 다시 개헌인가

지도자를 뽑는 선거는 언제나 구성원의 지대한 관심을 끌게 되어 있다. 대선이라면 말할 것 없다. 하지만 이번 유력 대선 후보 3인이 매일 쏟아내는 공약과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모아지는 온 국민의 뜨거운 관심은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세 정치인 가운데 실천의 문제를 뼈아프게 공약으로 들고 나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 대통령이 되면 ‘이걸 하겠다 저걸 하겠다’라며 잡다한 법과 제도의 도입 아니면, 개편을 제안하는 것 등 과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그간 한국에서 제도와 법규정 미비로 잘 안 되는 게 몇 가지나 될까?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전 고대 초장의 강의를 직접 듣는 등 헌법학을 공부한 나로서는 대한민국의 헌법은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을 따라 이른바 ‘경제조항’을 따로 두어 경제민주화를 구체화했고 그 정신과 원칙은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그간에도 재벌 규제를 위한 법과 제도가 또한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크게 실효를 거두지 못한 이유는 그 법과 제도가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원인은 서로가 재미를 본 정경유착, 정관유착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대통령의 임기, 권력의 분산 또는 집중, 국민의 기본권을 놓고 그간 헌법을 한두 번 뜯어 고친 것이 아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그걸 가지고 또 논쟁을 벌이겠다니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들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어느 쪽 대선 캠프 할 것 없이 참모, 자문 등으로 영입된 정치인, 전문인, 학자들의 면면을 보라. 그들의 과거 배경이나 성향을 보면 도의와 윤리가 바로서지 않은 한 가능한 실천의 문제들은 새 정치를 위한 새로운 이슈로 거론될 여지가 없다. 상당수 정치인은 청렴이 의심되는 인사들이다. 학자들 면면을 보면 법이나 제도만을 기계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태반이다. 국민행태에 관심을 갖고 깊이 연구를 한 사람은 눈 씻고 봐도 없다.

국민도 마찬가지다. 윤리, 도덕, 행태, 실천과 같이 왜소하게 들리는 명제를 새로운 정치적 철학과 이슈로 내세우면 국민들에게 잘 먹히지 않는다. 당장 실익을 좆는 국민들에게는 실현될 확률이 적더라도 화려한 프로그램이 훨씬 호소력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의 정치 아래 못사는 국민이 겪는 고난은 자업자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