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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우호 기원 ‘한일축제 한마당 2012 in Tokyo’ -(2)
이수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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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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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과 박유굉, 박무덕, 그리고 잊지 못할 미우라 고로

   
▲ 이수경 교수
한일 근대사를 전공하는 제자와 함께 다시 김옥균 추모비를 찾았다. 8월의 뜨거운 태양보다도 선선한 초가을 날씨라서 약간 우중충한 가을 하늘이었지만 나름대로 걸어 다니기에는 시원했다. 외국인 묘지에 세워진 김옥균의 큰 묘비에는 박영효 찬문(글을 지음)과 이준용(흥선대원군 손주)이 글을 적었다고 적혀져 있다.
원래는 묘비를 사방으로 둘러 싼 금속 체인의 장식이 있었으나 지난 8월이나 이번에 갔을 때는 그 체인의 일부는 녹슬어 끊겨져 있었다.
격동의 근대 제국주의 시대 속에 번민하다 처참히 죽어간 김옥균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묵도를 한 뒤, 그 묘비 뒤 쪽 건너편 11시 방향에 피어있는 무궁화 꽃나무 옆에 세워진 자그마한 비석 앞으로 갔다. 21세의 청년 박유굉이 얼마나 슬프게 조국과 자신이 놓인 상황을 한탄하며 목숨을 끊었을지 그의 고뇌가 전해져 오는 [嗚呼 朴裕宏之墓]의 글이 눈에 들어왔고, 묘비 뒤에는 [타루비(墮淚碑)] 라는 세 글자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근대의 격랑기 속에서 일본의 첫 육군사관학교 생도로 들어가 최신 병법을 배워서 다가올 조국에 대비하려 했던 청년은 결국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아오야마에 잠들어 있으니 그 넋은 얼마나 더 떠돌아야 할까?
왠지 숙연해지는 기분으로 스쳐가는 가을바람을 가르며 길 건너 1종으로 분리된 구역으로 갔다. 1895년 10월에 명성황후(당시 민비) 살해의 지도를 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나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획책으로 당시 동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정권 하의 꼭두각시가 되어 조선에 파견되어 일본정부의 사혹대로 그녀를 살해 후, 히로시마 지방 재판소서 무죄를 받았던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의 묘로 갔다. 필자가 미우라의 수기 다섯 권을 비롯해 미우라의 명성황후 살해 과정과 관련되는 상황을 연구한 적이 있기에 꼭 가보고 싶었는데 지난 번에는 다른 근대 인물들의 묘를 뒤지다가 체력 부족으로 미뤄놓았던 터이다. 미우라의 묘는 다른 사람들의 묘와는 달리 한 구역 자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 김옥균의 묘비
한국과 깊이 얽혀있는 야마구치 현 출신자이자 송병준이 은거했던 하기에서 태어나 나중에 관수장군으로 불리는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는 유럽에서 병역제도를 배웠고, 일본의 징병제를 만든 동향 출신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대립하게 된다. 학습원 대학의 학습원장, 귀족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가 1926년에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렇게 오래 살았건만 명성황후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존재로 인해 그 삶을 제대로 살지도 못한 채 처참히 세상을 떠났다. 그런 갈등 탓인지 노후에는 불교에 몰입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미우라의 묘를 보고 있자니 한일 근대관계를 복잡하게 만든 장본인의 영혼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년이 넘도록 해결은커녕 한국인 가슴에 만행을 상기시키는 명성황후 살해 사건과 그 후의 한국 병탄, 그가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배출한 수많은 군인들이 폭압 제어라는 명목 하에 죽인 숱한 한국의 항일 의병들의 비명… 군부에 의해 전쟁 이라는 명목 하에 공적 대량 살상을 반복해 온 인류사의 야만성이 흐릿한 가을 하늘과 더불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여기 까지 왔으니 한 사람 더 확인하고 싶었던 인물이 있었다.

박 무덕(일본 이름 東郷茂徳).
일본이 미국과의 곤란에 처해졌던 1941년의 진주만 공격을 수습한 사람도, 1945년에 연합군의 본토 공격을 피하고 일본의 자존심인 천황제만을 남긴 채 1억 총 일본 국민의 파멸을 막았던 외교관 도고 시게노리. 그의 비범한 머리와 능력을 키우려고 그의 아버지는 도공의 후예로 심수관과 더불어 가고시마의 땅에서 다섯 살까지 한국인 이름으로 키우다가 시대의 상황 속에 도고라는 일본 이름으로 키웠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듯 일본이 난국에 처했을 때마다 최후의 히든카드로서 예리한 판단으로 외교관의 수완을 발휘하여 태평양 전쟁 개전 및 종전을 수습했던 사람이지만, 도죠 내각 및 스즈키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다는 이유로 결국 A급 전범이라는 책임 전가를 당하여 스가모 형무소에서 옥사를 한 비운의 인물이다.

   
▲ 박무덕의 묘비
필자가 편집한 책 [한일 교류의 기억]에서 자신의 신념으로 일본의 호전주의 군부정권과 당당하게 맞섰던 인물이었고, 강한 책임감으로 평화주의를 관철하며 합리적인 내외 정세로 현명한 판단을 했던 인물이었기에 소개를 한 적이 있었던 터라 그를 찾았더니 외국인 묘지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잠들어 있었다.
도고 시게노리의 이름이 크게 적혀진 비석과 그 옆의 도고 가문의 묘는 한국식 적송 사이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의 묘비 뒤에는 쇼와 25년(1950년) 7월23일에 몰했다고 적혀져 있었고, 가족의 묘비 뒤에는 그의 부인과 자식이 합장된 시기를 적어 놓았다. 박 무덕의 조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때 끌려왔던 조선 도공이었고, 시마즈번이 권세를 누릴 때는 정중히 대접을 받았던 기술자들이었다. 몇 백 년 동안 그렇게 살아오다가 자식의 앞날을 생각하여 일본 이름으로 만들고, 결국 최고의 외교관으로서 육군들과 정부 고관들의 본토 결전 및 1억 자결설을 주장하는 그들에 대항하여 국민 없는 국가는 있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설득을 한다. 미국에 의한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가 계속 되고, 소련 참전의 움직임 속에 현안을 제시한 도고의 의견 외에는 전멸이라는 선택 밖에 없었기에, 1945년 8월14일 당시의 쇼화 천황이 도고를 지지한다며 눈물로서 의사를 표명하였고, 육군 강경파도 이에 의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게 된다. 그 뒤, 패전 후의 내각에서도 유능한 도고를 외무대신으로 유임하도록 권유했으나 GHQ에 의한 전범 지명이 될 경우 모두에게 폐를 끼칠 테니 고사하겠다고 거절하였고, 1946년 5월에 그는 스가모 형무소에 들어가게 된다. 바꿔 말하자면 도고는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전범이라는 불명예차도 자신이 관여한 이 시대의 역할임을 감수하고 옥사를 맞이하였으니 진정한 외교관의 책임 있는 모습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암운의 시대적 희생임을 탓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다.

   
▲ 이케가미혼몬지 경내
혼란스런 시대 속에서 악역이나 중책을 맡아야 했던 인물들의 운명을 생각하다 보니 만주 사변 때 일본의 트집을 국제 연맹에서 지적하자 국제 연맹을 탈퇴하면서까지 일본의 합리화를 주장했던 외교관 마츠오카 요스케(松岡洋右)란 인물도 잊을 수 없었다. 마츠오카도 야마구치 출신으로 13세 때 미국에 유학을 갔고, 그 곳에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시대는 군국주의 전쟁 시대. 외교관으로서의 그의 역할은 전쟁과 국가의 이익이었고, 의원직과 외무대신 등의 역할을 통해 대동아 공영권을 구상하며 군국주의의 브레인이 되었다. 결국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체포를 당했으나 결핵이 악화되어 극동 국제군사 재판 공판 중에 병사를 했고, 지금은 박무덕과 그렇게 멀지 않은, 자그마한 십자가가 새겨진 마츠오카 가문의 묘 속에 잠들어 있다.  

스산한 바람이 넓은 공원묘지를 스치기에 시간이 있는 대로 일단 움직여 보기로 하고, 아오야마 영원을 빠져 나왔다. 간단히 늦은 점심 식사를 한 뒤, 이번엔 오오타쿠에 있는 이케가미 혼몬지(池上本門寺)라는 사찰로 가기 위해 몇 번의 전철을 갈아탔다. 시부야 역 앞에서는 우익차들이 금요일 낮인데도 불구하고 큰 소리로 한국의 독도관계나 중국의 영토 주장에 대한 비판과 그들 나름의 주장을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저녁 여섯 시 까지는 어떻게든 리셉션 회장인 뉴오타니 호텔로 가야겠기에 발걸음을 서둘러서 혼몬지로 향했다.

이케가미 혼몬지에서 만나는 영웅 김신락(역도산)

이케가미 혼몬지는 약7만평의 넓은 땅에 세워진 오래된 사찰이다.1282년에 명승 니치렌(日蓮)이 병 치료를 위해 가던 도중, 이케가미 무네나카(池上宗仲)의 집에서 생애 마지막 20 여일을 지내다 타계한다.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였던 이케가미는 그의 가르침에 감복하고, 그의 사후 7주기 때 그의 동상을 만들어 안치하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곳이 이케가미 혼몬지의 시작인데, 이케가미는 불교에 귀의하며 저택이나 주변 토지를 모두 절에 기증하여 사찰 영토로 만들었다고 한다. 역사가 깊은 사찰인 만큼 수많은 인물들의 묘가 있지만, 이곳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복으로 지휘를 하여, 조선의 민중들에게서 ‘귀신, 개’ 등의 명칭으로 불렸을 만큼 잔인하게 많은 조선인들을 살상 하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와 그 가족이 안치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본당 외에 큰 대문, 본당으로 가는 96칸의 돌계단 등은 오오타쿠의 지정 유형 문화재이고, 붉은 색으로 안정감 있게 세워진 오중탑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본전 정면 좌우의 인왕상은 역도산의 제자인 레슬링 선수 안토니오 이노키가 그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광대한 토지 위에 건립된 큰 사찰 건물들과 중요 문화재들과 수많은 석탑들과 종각 등이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하게 느껴지는 곳인데, 이 사찰에는 네루 수상이 우호의 표시로 부처의 사리를 기증하여 보존하고 있다고 하니 불교 신자에게는 신성하고 의미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 역도산의 묘
넓은 사찰 뜰 안을 걸으며 이곳의 본당 왼쪽 안의 숲 속에 39세로 영면 중인 김신락의 묘를 찾았다.
근대 19세기 제국주의를 달리며 아시아 최고의 국민이라며 교육칙어로 세뇌를 받아 왔던 일본이 미군과 연합군에 패전을 당한 후, 일본에 남겨진 국민감정의 패배감을 자그마한 체구로 링에서 거대한 서양인을 물리치며 대리 보복을 하여 일본 사회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던 레슬링의 영웅 역도산의 묘이기도 하다. 그 역시 필자의 책에서 소개를 한 적이 있지만 묘를 찾아 올 기회를 만들지 못 했기에 이번에 추석도 겸하여 그를 성묘하였던 것이다. 다행히 유일하게 그의 묘가 있다는 표식이 붙어 있었고, 중간에 산책을 즐기던 어느 분이 자세히 안내도 해 주셔서 넓은 공간 속에 맞이해 주는 역도산의 흉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옆의 추모비나 그의 묘에는 오늘도 사람이 다녀갔는지 싱싱한 꽃이 꽂혀져 있었다. 심한 차별이 남아 있던 일본 사회에서 스모 선수로 그 자질을 높이 평가 받던 그가 레슬링 선수가 되면서는 스포츠 선수 이전에 아시아의 자존심으로 굳히게 되고, 비록 39세에 흉한의 칼에 맞아 목숨을 달리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김일,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 등의 레슬링 선수들은 시대를 짊어지고 스포츠 문화 교류를 이어갔다. 그런 역도산이 나중에 한반도 출신이고 재일 교포라 하여도 그들 가슴속의 영웅임은 변함이 없었다.

함경남도 출신으로 나가사키의 모모타 가문의 양아들이 된 김신락의 존재는 남북한은 물론 일본을 잇는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의 홍보 대사로 생전에도 생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는 비록 이케가미 혼몬지와 나가사키의 모모타 가문의 묏자리에 분골을 했으나 그의 넋은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민족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존재이고, 아시아의 스포츠 문화 교류에도 소중한 존재로 계승 될 것이다. 그렇게 역도산의 삶과 넋이 진정 원하는 게 뭔지를 나름대로 생각하며 넓은 왼쪽 묘지에서 본당 오른 쪽 뒤편에 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묘도 가 봤다. 어두운 시간이 되던 터라 묘비는 물론 석탑조차도 어두운데다 모기도 많아서 결국 간단히 주변과 그의 묘비만 잠시 읽다가 나왔다. 이미 많은 시간을 걷고 확인하며 보다 보니 「한일 축제 한마당 2012 in Tokyo」의 전야제 시간이 다 되었기에 후문으로 들어갈 때와는 달리 정문 돌계단으로 내려서 전철역으로 향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지만 그나마 추석을 앞두고 묘지를 찾아가서 확인하려 했던 묘비를 확인했다는 마음으로 뿌듯함과 충족감을 느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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