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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의 삶을 통해 한일관계의 변화를 살피다-‘작은 오빠’를 단초로-
이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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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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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8ㆍ15광복절 기념으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재일동포 100년의 삶과 꿈을 담은 특별전시회에 즈음하여,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최한 '역사 영상 심포지엄'에 발표된 글임을 밝혀둡니다. 


             < 재일동포의 삶을 통해 한일관계의 변화를 살피다 >

[ 이성시 /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 교수 ]


머리말

이번 심포지엄에서 다뤄지는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감독의 작품 ‘작은 오빠’가 제작된 것은 1959년이다. 영화의 시대 설정이 1953년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일본에서 태어난 것이 1952년이고, 9살이 되던 196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에피소드와 사건이 마치 내 주위에서 벌어진 동시대의 동일한 경험으로 받아들여지는 작품이기도 했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영화 ‘작은 오빠’는 문부대신상을 수상했다고 되어있어, 당시의 관행으로 본다면 초등학교 시절 학교 행사의 일환으로 이 영화를 봤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지만 전혀 기억이 없다.

이 영화와 내 경험 사이에 큰 차이점이 있다면, 같은 일본이지만 내가 자란 고장은 태어나자마자 이사를 가게 된 요코하마였다는 점이다. 주인공 ‘작은 오빠’(다카이치)는 어느 날 폐광을 앞둔 탄광촌 고향을 떠나 고향과는 정반대로 전후 부흥을 이룩한 도쿄를 잠시 경험하게 되는 반면, 나는 그런 도쿄의 가까이에 위치해 있고 나날이 풍요로운 삶을 실감할 수 있게 된 요코하마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우라시마오카(浦島丘)에서 내려다본 요코하마(横浜)항 주변은 그 당시 공습으로 인해 큰 건물이 남아 있지 않았고, 우리 집 근처에는 2차대전 때 만들어진 방공호와 폐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영화에 그려진 가난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제껏 공적인 자리에서 나의 성장과정에 대해 얘기하거나 글로 쓴 적이 거의 없다. 오늘날까지 그런 과거를 말해야 할 의미를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와 함께 개최되는 심포지엄‘영화가 말하는 한일관계의 심층’에서 발표를 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도 그런 이유 때문에 즉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심포지엄의 첫 번째 후보작에 오른 ‘저것이 항구의 등불이다(원제‘あれが港の灯だ’)’를 비롯하여 ‘작은 오빠’등 상영 예정 작품 가운데 몇몇 영화를 새로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그 영화에 그려진 재일조선인의 삶에 깊이 공감하기도 했고, 또 내 인생에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해서 내 개인사를 생각해 보는 계기로 삼는다는 의미로 심포지엄 발표를 맡기로 했다. 따라서 영화 ‘작은 오빠’를 단초로 ‘재일동포의 삶을 통해 한일관계의 변화를 살피다’라는 심포지엄의 과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영화‘작은 오빠’에 그려진 사람들과 동시대의 기억

작품 속에 재일조선인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20세가 된 맏형 기이치, 16세 언니 료코, 12세 차남 다카이치, 각본상 주인공인 10살 스에코, 이 4남매와 남매 주변에 사는 조선인 할머니(사카타), 폐품수거를 업으로 하는 청년(가네야마 하루오), 세상을 뜬 아버지의 친구(민 씨) 부부 정도밖에 없다. 도입부의 장례식 장면에서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오기는 하는데, 이후의 장면에서는 등장하지 않아 평소 4남매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결코 많지 않은 재일조선인 등장인물들이 스스로 조선인임을 강조하는 부분은 이 장례식 장면뿐이며, 전편에 걸쳐 그들이 재일조선인임을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이 매우 적다. 폐품수거 일을 하는 청년 가네야마가 다카이치의 형 기이치에게 하는 대사(“힘내라! 어차피 우리 조선인은 제일 먼저 해고되니까.”)와 할머니가 스에코에게 하는 대사(“힘내거라…… 옛날 조선인들은 더 힘들었단다.”)라는 두 부분이 고작이다. 다만 이 대사를 내뱉은 두 사람은 평소 한국어가 섞인 일본어로 대화를 나눔으로써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공동체 속에서 그들이 조선인임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확연히 알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영화의 무대가 된 사가현(佐賀県) 쓰루노하나(鶴ノ鼻)탄광의 광부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에서 그들의 존재에 특별한 상징성은 없다. 노동쟁의가 끊이지 않는 가난한 탄광촌의 일상생활 속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차별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점을 뒷받침하는 것은 그들의 일상 속에 등장하는 선의에 찬 일본인들이다. 4남매를 친족처럼 챙기는 아버지의 직장동료(헨미 겐고로), 광부들의 목욕물 데우는 일을 하는 아저씨(기타무라 고로), 간호사 호리 가나코, 스에코의 담임교사인 기리노, 다카이치가 아르바이트하는 상점(건어물가게)의 딸 등이 애정으로 4남매, 그 중에서도 특히 다카이치와 스에코에게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이러한 상황은 결코 예외 없이 전후 일본 각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즉 전후 재일조선인은 이를테면 식민지시기의 연장선상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야스모토나 가네야마처럼 창씨개명이 된 성을 쓰고 있어서 조선인 집단거주지역이나 혹은 특별한 상황이아니라면, 다수집단(majority)인 일본인 사이에서 확연히 구분 짓기 어려운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존재로 일본 사회에 융화되었던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전후 일본, 특히 1950년대 내가 어렸을 적에는 재일조선인 간에 상호 유대관계가 강해 서로의 생활을 위해 관계를 소중히 했으며, 한편으로는 일본인사회 속에서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었기에 이웃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이웃 간에 매일같이 음식이나 생활용품을 서로 빌려주기도 하고 빌리기도 했으며, 또 아이들이 당시 점차 보급 중이던 TV를 보기 위해 이웃집을 찾는 일도 다반사였다. 내게는 그런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노골적인 민족차별을 받은 경험이나 기억이 거의 없다.
다만 지금도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것은 5~6세 무렵 동네 개구쟁이에게 ‘조센징’이라는 욕설을 듣고 아버지에게 이르자 아버지가 그 집에 찾아가서 아이의 아버지에게 주의를 줬던 기억이다.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났던 것은 아니기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한다.

영화 ‘작은 오빠’을 보고 강렬하고 선명하게 연상되는 것은 일본어가 어설픈 할머니의 모습이다. 한 때는 아버지 친족 중에 내가 ‘한메’라고 부르던 할머니와 우리 집에서 한동안 함께 생활한 적이 있었다. 맞벌이였던 부모님은 ‘한메’에게 갓 태어난 남동생과 여동생을 돌보도록 했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할머니의 행동이나 말투가 내 기억 속의 ‘한메’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한메’는 일본어를 생각만큼 잘하지는 못했지만, 신기하게도 한국어와 일본어가 뒤섞인 말을 알아듣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 외에도 우리 집에는 아버지의 생활력에 기대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많은 친족들도 같이 살고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맏형 기이치처럼 어른이 되었는데도 일정한 직업을 구하지 못해 일자리를 찾아 우리 집을 찾은 어른 남자들이 늘 4~5명 있었던 것이다. 미혼인 이모들도 우리 집 가사 일을 돕는 한편 직장을 찾기도 했다. 결코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친족이 서로 의지하며 돕고 살던 시절이기도 했다.

1961년 타계한 아버지 장례식 때 일본 각지에 흩어져 살던 친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우리어린 형제의 미래를 걱정해 줬던 일이나,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4남매가 아버지를 여의고 난 후 느꼈던 불안감도 내 경험과 거의 일치한다. 장례식을 통해 친족과 동포간의 유대관계가 얼마나 강한지 느꼈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온 친족 간의 갈등이 친족들에 대한 불신감 또한 크게 만들었다.
친족뿐만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폐품수거 일을 하는 가네야마 청년처럼 비록 혈연관계는 아닐지라도 당시 재일동포사회에서 동포의 자녀들을 위해 힘이 되고 격려해 주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도 있었다. 특히 총련 산하에 있던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상부상조 정신이 강해 우리 가족은 그들과 친족 이상으로 친밀하고 서로 배려하는 일상적인 교류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2. 재일동포의 삶을 규정하는 일본 사회

영화 ‘작은 오빠’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이웃에 사는 아버지의 직장 동료였던 헨미 겐고로, 간호사 호리 가나코, 교사 기리노 등이 야스모토 남매에 베푼 절대적인 선의일 것이다.
그러한 선의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영화평이 있어 소개한다.

이야기는 스에코(마에다 아키코)의 눈으로 본 ‘작은 오빠’(오키무라 다케시)가 주인공으로 장남 기이치(나가토 히로유키), 장녀 료코(마쓰오 카요)가 조연으로 포진되어 있고, 간호사 요시유키 카즈코와 선생님 호즈미 타카노부, 이웃 아저씨 도노야마 타이지, 폐품수거 일을 하는 형 오자와 쇼이치 등의 선의(善意)가 전체 구성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치 선의의 천사들이 총출동한 듯한 감이 있어 유감이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한계는 있었을 것이다.

다카이치·스에코 남매에게 한껏 선의를 베푸는 주변 인물들에 대한 연출이 작품으로서 영화의 가치를 훼손한 데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지만, 여기서 유의할 점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그 이유를 지적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문제시해야 할 것은 예술영화로서의 작품론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 ‘작은 오빠’를 통해 본 재일조선인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실화’에 입각한 역사적인 현실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훗날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스에코의 일기를 가지고 영화 각본을 만들 때의 고충을 TV방영 시에 얘기한 적이 있다. 그 발언에 근거해 본다면, 이마무라 감독은 스에코의 감수성이 담긴 일기의 표현 속에서 스에코 가족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선의와 호의를 느꼈기 때문에 영화 각본과 그에 기초한 영상을 통해 그들의 선의가 스에코 남매의 살아가는 희망이 되었다는 이미지를 영화 전체에 반영했다고 봐도 되는 것이 아닐까!
영상을 통해 보여 지는 4남매는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애정으로 보호를 받고 있으며, 주변 인물들은 4남매가 살아갈 희망을 지탱하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4남매는 가난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적어도 탄광촌에서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편 영화 속에서는 민족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려져 있다. 앞서 나는 당시 일본사회에서의 재일동포를 ‘다수집단인 일본인과 구별하기 어려운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존재’라고 표현한 바 있다. 비록 영화 ‘작은 오빠’에서는 주제로 다뤄지지 않았지만, 전후 일본 사회 속에서 재일조선인의 절대적인 빈곤과 더불어 민족차별은 경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를 테면 전후 재일조선인은 식민지시기의 연장선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것은 내가 역사를 배우게 된 이후 당시를 회고할 때 실제로 갖게 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45년 이전의 식민지시기 특히 1940년대 이후에는 황민화(皇民化)정책에 따라 동화가 촉진되어 표면상 법적인 차별은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단 일본 호적과 조선 호적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으며, 양자의 이동(전적)은 인정되지 않았고, 한반도 출신자는 대일본제국의 국민(일본인)이라도 선천적인 일본인=내지인과 구분되는 이른바 2등 국민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해방 후 대다수 재일동포는 일본 성씨를 사용함으로써 조선 출신임을 숨겼는데, 이것은 ‘2등 국민’이라는 차별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

따라서 식민지시기에 일본열도에서 살아가던 조선인들은 차별에서 벗어나 일본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이광수처럼 일본 사회의 이상적인 가치 기준과 일체화하기 위해 결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그러한 노력은 해방 후 재일동포들에게도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내게는 이런 경험이 있다. 자라면서 집 밖에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집안에서 사용되는 말이 정확한 일본어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고, 이윽고 일본어에 대한 공포심과 집안에서 쓰는 말에 대한 혐오감이 강해지게 된다. “부모들의 문화는 저급한 것이며, 그것과 거리를 두려 한다”(제라르 누아리엘)는 경험이 내 기억 깊은 곳에 침전되어 있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교사가 내 일본어 중에 정확하지 않은 표현을 찾아내 여러 번 교정하려 했었던 기억이 있다. 틀린 일본어의 용법을 깨닫기 시작하자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데 대한 관심이 각별히 커지면서 집안에서 사용하는 일본어의 오류에 민감해지고 혐오감을 갖게 된다.
비단 말투뿐만 아니라 생활양식, 행동규범 등을 모방하고 그것을 내면화하면서 피아(彼我)의 차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일본 사회의 규범에 필사적으로 따르려고 한다. 그런 노력이 무의식적이었는지 의식적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노골적인 차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일본적이지 않다는 데에 대한 미세한 차이를 눈치채고, 스스로 그것을 혐오하게 된다‘.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필사적인 순응’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환경 속에서 영화 ‘작은 오빠’에 등장하는 간호사 호리 가나코 같은 도시적이고 계몽적인 사람들은 합리적인 길로 이끌어주는 존재이며, 어딘지 모르게 불합리한 집안과 일본사회에서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가치의 원천이었다.
사실 뒤돌아보면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내 주위의 호리 가나코나 기리노 선생님 같은 분들의 격려가 무엇보다도 삶의 희망을 준 것 같다. 그런 분들의 애정과 승인(承認)이 없었다면, 일본 사회에서 희망을 찾고 긍정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나는 다행히도 어릴 적부터 성장과정에서 언제나 호리 가나코나 기리노 선생님 같은 분들을 만났었고, 그런 분들에게 둘러싸여 자란 것 같다.

또한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나에게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항상 형처럼 이끌어 준 조숙한 친구들도 많았다. 그들의 애정과 승인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큰 힘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다카이치는 초등학교 교사인 기리노의 따뜻한 눈빛과 격려 속에서 힘차고 씩씩하게 살아갈 것을 맹세한다. 실제로 스에코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작은 오빠가 공부를 잘해서 나는 한 번도 어느 누구에게서도 무시를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여유 있게 4학년을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은 오빠는 가난에도 지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동급생한테 절대 뒤지지 않는 머리를 갖고 있습니다…… 작은 오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눈물이 나와 눈앞이 흐릿해져서 앞을 볼 기운이 없어지는 바람에 옆 사람에게 기대다시피 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승인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사회적인 동의(同意)의 형태가 발달 단계의 어느 부분에서 누락되면, 사람의 성격에 정신적인 틈새가 생기고 거기에 치욕과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스며들게 된다(호네트). 때문에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주체 스스로가 자립적인 존재로서 존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승인에 대한 기대는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조건이 되며, 그런 경험에서 얻은 확신은 사회적인 차별을 극복하는 힘이 될 수 있다.

3. 재일동포와 한일관계에 대한 기대

50~60년대에는 재일동포들이 식민지시기의 연장선상에서 살았다면, 상황 변화를 가까이 에서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1970년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재일 한국인·조선인의 일본에서의 법적 지위 개선 등 돌아보면 재일한국인의 일상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전 세계적 차원에서 거시적으로 보면, 구미 각국에서 국가의 복지를 민간에 일임하거나 NGO단체가 비약적으로 급증하는 등 국가의 역할이 약해지는 시대였다. 또한 국제적인 인구 이동이 심화되고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등 국민국가의 틀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다. 당시 7억 명이 1년에 한 번 외국에 나가는 꼴로 왕래가 이루어졌는데, 이런 많은 사람들이 국제적인 규모로 유동화하는 가운데 일본에서도 정착외국인에 대한 협정영주제도가 실시되었다. 따라서 외국 국적을 유지하면서도 일정한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되어 재일한국인·조선인의 법적 지위는 크게 개선되었다.

뒤돌아 보건대 이러한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당시 한국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관심은 전무했던 것이나 다름없었고, 매우 천박한 인식을 가졌던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일본과의 외교적 줄다리기 과정에서 재일한국·조선인 문제가 부상하는 일이 생겨도 그 때 뿐이고, 그저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정도에 그쳤던 것은 아닐까?
내 또래 세대들이 여럿 모이면 종종 화제에 오르는 얘기가 있다. 한국 입국 시에 공항의 입국심사관에게 왜 한국어를 못하냐고 추궁 당하고 한참을 부당하게 설교를 들은 경험이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있는 교포가 적지 않다.

일본 사회에서 ‘차별을 벗어나기 위해 현재와 미래를 향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온 결과는 조국의 심사관을 비롯해 ‘진짜 한국인을 기준으로 한 민족성 평가’에서 불량 한국인이라는 판정을 받고 재일동포는 본국의 한국인과는 다른 이질적인 외계인으로 취급된다.
80년대의 일로 기억하는데, 어느 고명한 본국의 역사학자가 일본을 방문해 일본을 대표하는 조선사 연구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는 얘기를 그 연구자에게서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이 선생한테는 미안하지만 그 분이 말하기를 ‘재일동포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본국에서 살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한국인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더군.” 내 눈치를 살피며 신중하게 단어 선택을 하면서 말씀하셨지만 이 말은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당연한 일이지만, 본국 사람들의 이러한 재일동포관은 한국내의 차별에 대해서도 둔감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실제로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일본에 뒤지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열악하다. 국내 외국인 거주자가 100만 명을 헤아리며 ‘다문화가정’으로 불리는 외국인과의 결혼도 급증하고 있다. 어떤 지방의 농업에 종사하는 남성의 결혼 대상은 그 절반이 아시아에서 건너온 외국인 여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주 여성들에 대한 민관의 적극적인 지원은 이제 초기 단계일 뿐이다.

이러한 한국의 현실에 대해 ‘한국 병합 100년’을 맞은 2010년 새해 KBS 특별 프로그램에서는 한국이 이제 100만 명의 외국인과 공생하는 사회이며, 700만 명의 동포가 국외에서 활동하는 세계화 속의 자화상을 강조하고, 세계에 열린사회 만들기를 선언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폐쇄적인 일본 사회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며, 한국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보냈다. 그러나 여기에는 2400만 명의 북한 동포는 제외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 평이하고 단순한 혈통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일본, 한국,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를 하나의 지역으로서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할 것을 제창해 왔는데, 그것은 동아시아 지역이 국민국가의 확대판으로서 정치적 공동체 형성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이 아니다. 국가를 초월한 광역의 범위를 설정함으로써 한 나라가 해결할 수 없는 공통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한‘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였다. 그런‘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를 설정했을 때 이 지역의 특징으로서 인권의식의 희박성이 떠오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 국가들은 외국에서 자국의 동포들이 당하는 수난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지만, 자국 내에 사는 외국인 마이너리티의 수난에 대해서는 매우 냉담하다. 외국인의 인권을 짓밟는다 하더라도 악영향이 없다고 보는 경향이 현저하다.

일본에서는 현재 재일한국인을 중심으로 지방참정권 획득을 목표로 한 운동이 한창이지만, 민주당도 자민당도 이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외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는 대신 귀화를 용이하게 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열심이다.
그러나 문제는 귀화를 촉진하면서도 귀화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여전히 크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귀화인의 경우 본인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감추더라도 언제든지 원래 어느 나라 사람이었는데 귀화했다고 폭로하는 행위가 허용되기 때문에 수시로 귀화인이 아니라는 증거 제시를 요구 받을 수 있다.‘이주(移住)와 이산(離散)’의 시대에는 우선 범 동아시아차원에서 정착 외국인 및 이민자 등 수자 문제에 대해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런 현실적인 문제를 시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일본의 재일동포 문제는 물론이고 재일동포의 삶을 통해 한일관계의 희망적인 미래 같은 것을 얘기할 수도 없다. 재일동포를 통해 한일관계에 대해 얘기한다면, 양국의 공통적인 인권문제와 시민사회를 성숙시키기 위한 방안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 사회에 사는 소수민족이 그 사회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신뢰와 상호인정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양국의 시민사회가 성숙된다면 한일관계의 미래에 대해 자연히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영화 ‘작은 오빠’에는 다카이치가 헤엄치는 장면이 세 번 그려진다. 아버지의 관을 실은 배를 뒤쫓아 바다에 뛰어드는 장면과 다카이치와 스에코가 아버지의 친구 민 씨 집을 뛰쳐나와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스에코와 둘이서 강에서 헤엄치며 잠깐 동안 느끼는 즐거움을 그린 장면, 그리고 귀향한 오빠 기이치가 사가(佐賀)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축제의 밤에 형과 둘이서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는 장면이다. 스에코와 기이치, 다카이치가 웃음 띤 얼굴로 헤엄치는 이 두 장면에 이입되어 있는 감정에 대해서는 이마무라 감독의 진의를 마지막까지 헤아리지 못했지만, 일단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일본 사회에서 사력을 다해 살아가려는 남매를 짓누르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희구하는 심리가 표현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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