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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과 다투는 한인들, 유태인을 본받아라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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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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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4.03. 오마이뉴스 / 고은아 시민기자(애틀랜타) ]


   
▲ 미국 내 3000개의 인종적 미디어들의 연합인 '뉴아메리카미디어'가 댈러스 주유소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 뉴아메리카미디어


지난 1월말 일련의 미국 발 뉴스가 한국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다. 텍사스 주 댈러스의 한 주유소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이 자칫 한인 사회와 흑인 사회의 충돌로 번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 LA 흑인 폭동으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던 한인 사회가 긴장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정부도 휴스턴 총영사를 현지로 급파하는 등 사태를 진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인종간 연대 가로막는 배타적 이기주의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말다툼이었다. 한인 박아무개씨가 운영하는 주유소를 찾은 흑인 제프리 무하마드 목사는 "휘발유 가격이 다른 주유소보다 비싸다"고 불평했고, 이에 박씨는 "그럼 다른 곳에 가서 휘발유를 사라"고 맞받아쳤다. 서로 언성이 높아지던 중 무하마드 목사가 먼저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했고 이에 흥분한 박씨는 흑인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었다.

"아프리카로 돌아가라."

주유소 앞이 연일 시위와 불매운동으로 북새통을 이룬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인 비즈니스 전체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번지며 악화일로를 걷던 사태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든 것은 전미유색인종발전협회(NAACP)와 미주한인총연합회가 각각 흑인과 한인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공동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면서부터였다.

지난해 회장으로 선출된 유진철 미주총연 회장은 선거공약으로 '다른 인종과의 연대'를 호소하며 'NAACP 가맹'을 내걸었고 회장이 된 후 가입 절차를 밟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런 사전 작업이 없었더라면 이번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실로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만간 두 단체는 '한흑 결연식'을 갖기로 합의했고, 백악관에 오바마 대통령의 행사 참석을 요청해 놓은 상태다.

뒤늦게나마 소수민족끼리 상생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나 20년 전에 끔찍한 일을 겪고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한인들의 배타적 이기주의를 고치지 않는 한 이와 같은 사건은 언제고 또다시 일어날 것이다.

미국 내 한인 인구는 연방 센서스 집계(134만 명)와 한인회 집계(250만 명)가 크게 차이가 난다. 한국 외교통상부는 2009년에 약 210만 명이라고 발표했는데, 이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미국 전체 인구의 0.67%다. 반면 흑인 인구는 전체의 12.6%다. 이런 현실에서 '아프리카로 돌아가라'는 말이 가당하기나 한 소린가? 아무리 상대가 먼저 자극을 했다고 해도 말이다.

   
▲ 20년 전 LA 흑인 폭동의 계기가 되었던 '로드니 킹 사건'의 당사자 로드니 킹이 지난해 사건 발생 20주년을 맞아 CNN과 가진 인터뷰 기사. ⓒ CNN 홈페이지

유태인과 킹 목사 부자의 오래된 인연

   
▲ 1950년대 에모리대에서 전원 백인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채플 연설을 했던 마르틴 루터 킹 시니어(킹 목사의 아버지). ⓒ 위키미디아 커먼스

얼마 전 <유태계 조지아인>이라는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재미있는 칼럼이 하나 있었다. 애틀랜타에서 자라고 에모리대를 1950년대 중반에 다닌 유태인 랍비 데이비드 게펜이 마르틴 루터 킹 목사를 칭송하는 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인종차별정책이 맹위를 떨치던 대학 시절, 전원 백인인 에모리대 학생들이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의 사건이 일어났다. 킹 목사의 아버지가 채플 연설자로 단상에 오른 것이다. 애틀랜타 시내 흑인 상권이 몰려있던 어번 애비뉴의 에벤에셀 침례교회 목사였던 그는 백인 학생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할 지도자로 선택 받았을 때 모세는 망설였습니다. 말재주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형 아론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우리 니그로가 아는 것은 우리 흑인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말은 매끄럽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들과 같은 백인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제 얘기를 들어주는 것처럼 우리 얘기를 들어준다면 당신은 우리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 흑인들은 학교에서, 사업체에서, 예술과 스포츠 분야에서 자유의 행렬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저를 불러준 에모리가 참 자랑스럽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게펜의 아버지는 1930년대부터 애틀랜타 시내에서 변호사 일을 하면서 흑인 고객들을 대변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이어서 게펜은 1968년에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돕던 사촌을 따라 유태인 랍비 회합 컨벤션에 따라가서 킹 목사의 연설을 직접 들었던 일을 회상했다. 연설에 앞서 명망 있는 유태인 랍비이자 신학자인 아브라함 조슈아 헤쉘이 킹 목사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1960년대 유태인 랍비 회합 컨벤션에서 유태인과 흑인 사이의 연대를 칭송했다. ⓒ 위키미디아 커먼스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는 목소리요, 비전이며, 길입니다. 마르틴 루터 킹은 신께서 미국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산 증거입니다. 저는 모든 유태인들에게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의 비전을 나누어 갖고, 그의 길을 따라 줄 것을 당부합니다. 미국의 미래는 전적으로 닥터 킹의 영향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어 킹 목사는 이스라엘을 '사막의 오아시스'라고 칭송한 후 오래 전부터 흑인들을 지원해 온 유태인들을 찬양했다고 게펜은 적었다.

사회에 기여하는 '정의로운 의무감'

내가 이처럼 장황하게 유태인 랍비의 칼럼을 소개한 이유는 반 세기 전에 이미 공고했던 유태인과 흑인 사이의 연대를 거울 삼아 작금의 한인과 흑인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풀어 나갈 실마리를 찾고 싶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은 언제부터 흑인들을 돕게 되었을까? 일부 엘리트 백인들은 백인 우월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우생학'과 같은 학문에 뒷돈을 대던 시절에 왜 가진 것 없고 배운 것도 짧은 흑인 편에 서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일까?

여기에는 내적인 요인과 외적인 요인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내적인 요인은 선민사상으로 무장한 유태인이 태생적으로 가진 '정의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미국의 공영방송 PBS가 2008년에 방송했던 <유태계 미국인들>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는 유태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 덕목으로 교육과 정의를 꼽고 있다. 여기서 정의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유태교에서는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을 그저 '관대한 자선행위'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의무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이런 마인드를 갖고 있었기에 유태인들은 빈민굴의 개선을 꾀하는 복지사업을 지원하고, 병원과 도서관을 짓는 데 열을 올렸다. 이러한 지원들은 유태인들끼리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과 인종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미국 사회 전체를 위한 것이었다. 유태인들이 흑인 인권단체를 지원하고 인종차별정책 철폐를 위해 앞장선 것도 이런 정의로운 의무감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던 듯하다.

한편 외적인 요인은 이민 초기부터 겪은 유태인 차별에서 기인한다. 1654년 23명의 유태인들이 처음으로 신대륙을 밟은 이후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태인들이 박해를 피해 속속 미국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럽 이민이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미국에서 유태인의 정착이 순탄할 리가 만무했다. 그럼에도 유태인 특유의 교육열을 바탕으로 세대가 넘어갈수록 유태인의 영향력은 커져 갔다.

그러던 중 1913년 4월 애틀랜타에서 아주 미묘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연필공장에서 일하던 메리 파간이라는 13세 백인 소녀가 주급을 받으려고 공장에 갔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한밤중에 순찰을 돌던 경비원이 잔인하게 멍들고 피투성이가 된 시체를 공장 지하실에서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자 애틀랜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죽기 전에 성폭행을 당했다는 루머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그날 메리에게 주급을 건넨 사람은 공장 감독관이었던 뉴욕 출신 유태인 리오 프랭크. 살아있는 메리를 마지막으로 봤다고 시인한 사람이다. 사체를 발견한 경비원과 옷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다가 붙잡힌 흑인 청소부 짐 콘리까지 세 명이 용의선상에 올랐는데, 결국 콘리의 우왕좌왕 하는 진술을 받아들여 프랭크가 범인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프랭크가 사체를 유기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진술한 짐 콘리를 증인으로 하고 말이다.

남북전쟁 패배 이후 극도의 좌절감과 북부에 대한 피해의식에 빠져있던 당시 남부 사람들은 프랭크를 '양키 자본주의'의 첨병쯤으로 간주하고 여론재판으로 몰고 갔다. 지역언론들도 이를 부추겼다. 프랭크의 친구이자 북부의 유명한 변호사가 도움을 주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모든 항소가 기각되었다.

마지막으로 프랭크의 변호인단은 주지사에게 감형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는데, 사건 기록을 검토한 주지사는 무죄라고 보았지만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후일 무죄가 입증되기를 희망하면서.

   
▲ 1915년 애틀랜타에서 성난 군중들에 의해 처형당한 유태인 리오 프랭크의 생전 모습.
ⓒ 위키미디아 커먼스

주지사의 결정은 성난 군중들에게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다가 결국 1915년 8월 감옥을 습격한 군중들은 프랭크를 납치하고 죽은 소녀의 고향인 마리에타로 끌고 와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마리에타 지역의 저명인사들까지 가담했다. 그리고 이때 이후로 KKK 같은 폭력집단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 4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200만 명에 불과했던 유태인들이 느낀 공포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들 폭력집단의 주요 처단 대상은 흑인과 유태인, 그리고 가톨릭교도들이었다.

조지아 주 밖에서 프랭크를 지지하며 들끓는 반대여론을 '북부의 유태인들이 돈과 영향력으로 정의를 훼손하려 한다'고 일축하고 유태인에 대한 혐오를 극단적으로 실천에 옮긴 이 사건을 겪으면서 남부 유태인 사회는 더욱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그렇지만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활동과 행동 하나하나를 돌아보고 유태인 사회의 존립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로 삼았다.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하여

이로부터 50년 후에 본격화되는 인권 운동에 유태인들이 적극 참여하게 된 것도 차별 당하고 고통 받으면서 얻은 교훈의 산물은 아니었을까? 아무리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유태인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사는 미국 땅에 차별이 존재하는 한 눈에 보이는 성과들은 언제고 다시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교훈 말이다.

이스라엘 중앙통계국의 2009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 유태인의 수는 1342만 1000명으로 세계인구의 0.19%를 차지한다. 남북한을 합친 인구를 7000만이라고 할 때 우리 민족의 5분의 1도 안 되는 숫자다. 하지만 미국 거주자의 수는 약 650만 명으로 전체 유태인 인구의 35.2%가 넘는다. 이는 이스라엘 인구 585만 명(31.5%)보다도 많다. 참고로, 유태인들은 자국보다 타국에 사는 인구가 더 많은 유일한 민족이다.

650만 유태계 미국인은 미국 전체 인구의 2.1%에 해당한다. 하지만 미국 사회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이들의 영향력은 아마 그 열 배도 넘을 것이다. 미국 내에는 정계, 재계, 언론계에 미치는 유태인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번 댈러스 주유소 사건 같이 다른 소수민족과 다투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20년 전 LA 흑인 폭동에 이어 또다시 흑인들과 갈등을 빚은 한인 사회는 유태인 사회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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