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석 / 한인유권자센터(KAVC) 상임이사 ]

▲ 김동석 상임이사

공산권의 힘이 중동에 뻗치는 것을 우려한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 기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때가 카터정부 당시인 1970년대 후반이었다. 마침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이 발발하자 사우디의 무기구입 요청과 맞물려서 사우디 내 미군기지 설치 사업엔 탄력이 붙었다.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유태계였다. 아랍국가의 첨단무기 소유는 이스라엘에겐 거의 독약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 AIPAC의 실패와 그 후

카터 대통령은 1980년 선거 막바지에 유태계의 반발을 우려해서 사업승인을 주저했다. 그러나 80년 선거결과 백악관의 주인이 된 공화당의 레이건 대통령은 감세정책 등을 통해 여론의 지지를 얻고 이에 힘입어 사우디 무기 판매 건을 의회에 상정시켰다.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이 워싱턴으로 달려와서 레이건을 설득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오히려 이스라엘 정부의 미 의회 접촉과 같은 정부 차원의 로비나, 이스라엘 선거를 앞두고 감행한 이스라엘의 이라크 핵시설 폭격은 백악관을 자극하는 효과만을 불러왔다. 이스라엘 정부가 나설수록 일은 점점 꼬여만 갔다.

이제 이스라엘의 마지막 희망은 유태계 미국시민들이 주도는 ‘에이펙(AIPAC)’뿐이었다. 에이펙은 이스라엘 정부와는 별개로 발 빠르게 움직였다. 30년 이상의 노력과 경험이 사우디 무기판매 건에 집중되었다. 에이펙은 어차피 의회를 통과해야 할 사안이기 때문에 의회로비에 집중했다.
그동안 에이펙은 각 지역에서 철저하게 풀뿌리 로비력을 강화했기 때문에 하원은 문제가 안 되었다. 문제는 행정부와 상원이었다. 행정부와 상원을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을 움직여야 했다. 에이펙은 공화당원이거나 공화당 인사들과 가까운 유태인들을 소집했다. 유태계 공화당원들이 활동해서 상원 54명, 하원 224명으로부터 무기수출 반대서명을 받아냈다. 미국 정부의 무기판매에 대해 다른 나라의 안보를 이유로 상·하원 과반 수 이상의 의원들이 반대의견에 서명을 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은 군산복합체의 로비에 의해서 무기판매 법안을 의회에 상정을 시켰다. 표결결과 찬성 52, 반대 48이었다. 에이펙은 군산복합체의 로비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에이펙 창립 이후 최대의 시련이었다. 에이펙 지도부는 이에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했다. 공화당에 소속된 유태인들은 미국 내 유태계 안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공화당에서 활동하던 유태계들이 일제히 이탈했고 공화당에 정치자금을 기부했던 유태계들은 일제히 회개의 성명을 내고 정치권과의 관계를 절연했다.

◆ 철저한 풀뿌리운동으로 물갈이

누구나 실패하기 마련이다.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는가, 아니면 주저앉는가의 차이다. 모국 이스라엘의 상황은 에이펙이 패자로 남아 사치를 누릴 수 없게끔 했다. 새로운 지도부는 에이펙의 지난 활동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반성했다.
이들은 에이펙이 유태인의 영향력이 높고 유태인 사회가 자리를 잡은 편안한 지역에만 안주했음을 반성했다. 유태계를 대표한다고 하면서 정치인들과 가까이 교제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던 것을 통렬하게 반성했다. 유태인들의 정치기금을 바탕으로 자기 사업 부풀리기에만 열중했던 커뮤니티 대표격인 사람들은 반성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에이펙에 헌납하기도 했다.
각 지역에서의 반성은 더 철저했다. 워싱턴 중심의 로비에서 탈피해 지역으로 파고들어 풀뿌리 로비를 통해 워싱턴을 움직이기로 새로운 방향을 결정하고 이를 위한 체계적인 준비와 대대적인 자금 모금에 들어갔다.
이들은 정치인들을 접촉하는 유태인들의 자질을 철저하게 검증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했다. 검증되지 않은 유태인이 선출직에 도전하면 오히려 후보직을 사퇴토록 했고, 거절하면 유태인을 동원해서 비유태계 상대후보를 당선시키기도 했다. 이들에게 유태계 정치인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오직 유태계에 주목하고 유태계 커뮤니티를 위해서 일하는 정치인이 목표였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유태계 정치인들을 철저하게 평가했다. 자기 커뮤니티의 현안에 주목하지 못하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정치인은 아예 없는 것만 못하다는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절치부심(切齒腐心), 그들이 당한 수모를 설욕하고 철저한 반성 속에서 몇 년간 강화된 로비력을 시험할 기회가 레이건 정부 2기 첫해인 1985년에 찾아 왔다.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15억 달러의 무기구입을 미 정부에 희망해왔다. 49개주를 석권하며 재선에 오른 레이건 대통령은 주저 없이 의회에 이를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에이펙은 지난번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았다. 언론이 이 문제에 대해서 논란을 벌일 사이도 없이 신속하게 74명의 상원의 서명을 받아서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양적증가는 질적 증가를 동반했다. 이들 반대성명에 서명한 상원의원들은 유태계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치켜세웠는지 어떠한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백악관은 고민 끝에 결국 의회승인 요청을 철회했다. 곧바로 이어진 30억 달러의 사우디 무기구매 요청도 에이펙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군산복합체의 대표적인 거대기업인 ‘백탤’은 갖은 수단으로 로비를 시도했지만 유태인들의 풀뿌리 로비는 철옹성 같았다. 백탤은 당시 국무장관인 죠지 슐츠가 회장을 지냈고 국방장관인 캐스퍼 와인버거가 책임변호사를 맡았던 기업으로 걸프지역의 각종 이권사업에 개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에 집중되어 있는 군산복합체 로비스트들은 의원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탄탄하게 다져진 에이펙의 로비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뉴저지 주 대법관에 지명된 한인 필립 권 씨가 주 상원 사법위원회의 인준청문회에서 찬성 6, 반대 7의 1표 차이로 통과하지 못했다. 이는 필립 권 지명자의 대법관으로서의 자질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한인 커뮤니티의 정치력의 한계다.

필자는 연좌제를 적용하는 인사청문회를 경험한 적이 없다. 더구나 아시안 커뮤니티의 열화와 같은 지지와 성원을 확인했으면서도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민주당 소속 상원들이 일제히 거부를 했다. 찬성표를 던진 꼭 한 명의 민주당 의원은 저지시티에서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펼치고 있는 윤여태 씨의 작품이었다. 윤여태 씨는 유권자센터에서 확보한 1천여 명의 서명지 카피를 요청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평소 친분이 있는 상원의원을 졸랐다. 허드슨 카운티의 브라이언 스팩 의원이다. 정작 한인밀집지역인 버겐카운티의 의원은 오히려 앞장서서 반대를 했다. 심지어 그들은 ‘필립 권’이 어떤 사람인지엔 전혀 진지하지 않았다.

한인사회는 필립 권 씨 케이스에 관해서 냉혹하고 통렬한 반성 없이는 정치력 결집과 신장이란 구호가 한인커뮤니티에 공염불일 뿐이다. 더구나 한인정치인들은 글머리에 길게 예로든 에이펙의 경험을 반복해서 되씹어 주길 바란다. 정치인이 한인들만 위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한인들의 염원을 전달해서 자초지종은 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는가, 주저앉는가의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