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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양성과 교육ㆍ문화사업에 생을 다한
고(故) 김희수 이사장을 추모하며
이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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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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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구홍 /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


   
▲ 고(故) 김희수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찬란히 빛나지 않아도 좋다. 희미한 빛이라도 좋으니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리라."
후진양성에 전 생애를 바쳐 온 고(故) 김희수 수림재단·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이 생전에 입버릇처럼 해오던 말이다.

질곡 많은 우리 역사에 나라 잃은 큰 설움은 없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 전 국토를 꼬박 3년 동안 핏빛으로 물들게 했던 동족상잔의 비극 6.25 한국전쟁.
이런 비극의 역사의 근본 원인을 따지고 보면 배우지 못하고 무지하여 국력이 쇠약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반면 전쟁의 폐허 속에서 불과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세계경제강국으로 우뚝 서게 한 것 또한 교육에 대한 열정과 배움의 결과였다.

재일교포란 신분으로 평생 조국의 인재양성에 몸 바쳐 온 김희수 이사장. ‘배워야 산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 실천해 온 선각자 그가 지난 19일 타계했다. 자신의 죽음을 전혀 세상에 알리지 않고 가족끼리 조용히 장례를 치렀다는 후문이다. 이 또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고인의 생활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향년 88세.

조촐히 장례를 치른 유족들의 유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뒤 늦게나마 그의 타계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그리고 조국의 경제발전, 조국의 점철된 역사와 삶의 궤적을 같이 했던 그 평생의 삶이 결코 잊혀서는 안 된다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김희수(金熙秀). 그는 1924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했다. 조선말기 벼슬을 하던 그의 할아버지는 나라를 빼앗기면서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전답을 모두 빼앗긴 채 가난하게 살면서도 “나라가 이 꼴이 된 것은 백성이 배우지 못하고 무지해서 그렇다, 배워야 산다.”는 할아버지의 교육을 받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13세 때 부친의 손에 이끌려 도일(渡日), 휴학을 반복하는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내며 동경전기학교에서 전기공학에 필요한 공부를 익혔다. 29세 만학도가 되어 동경전기대학 공학부 전기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 한동안 양품점을 운영하는 등 주경야독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일제의 징병대상자가 되었다가 징병 1주일 전 일본이 패망하는 바람에 징병을 피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광복 이후 건국추진위원회에서 1년간 활동을 하기도 했다. 광복이 되자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넘쳐나도 무대책으로 일관하는 일본의 무책임함을 보면서 동포들을 위해 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나서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전쟁복구 사업이 본격화 될 것을 예상해 철강공장 운영에 뛰어들었지만 여의치 않아 1961년 공장을 매각한 돈으로 동경 시내 가장 번화가인 긴자(銀座)거리에 있는 건물을 매입했다. 전후 복구로 인해 부동산시장이 활발히 전개되는 시점이어서 부동산사업을 본격적으로 손대게 된 것이었다. 이것을 발판으로 그는 한 때 수 십 여개의 빌딩을 소유했고, 빌딩관리 회사만 해도 5개나 될 정도였다.

고인이 차별 많은 일본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거짓말 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정직한 한국인이 되자'는 신조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자수성가한 유수사업가로서 고인은 늘 조국 교육을 향한 일념을 놓지 않았다. 고인의 이러한 애국심과 사명감에 대한 결실이 본격적으로 맺힌 것은 1987년 중앙대학교를 인수하고부터이다. 한국의 군사정권 시절 연일 이어지는 학생들의 시위와 당시 중앙대학교의 부채 급증으로 인한 학교운영의 위기를 지켜보면서 평소 가지고 있던 교육에 대한 꿈을 펼치기로 하고 아무도 인수하려 하지 않는 이 대학을 인수한 뒤 사재 1천억 원을 내 놓았다.
고인은 2008년 두산그룹에 경영권을 넘기기까지 21년간 중앙대학교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이 대학을 한국 사립대학 중에 부채 없는 유일한 대학으로 그리고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도록 민족사학의 튼튼한 기반을 조성해 놓았던 것이다.

부채도 없고 대학병원까지 새롭게 건립하며 키워온 이 대학을 대기업에 넘긴 이유는 더 많은 투자를 통해 꼭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대학으로 우뚝 서길 바라는 고인의 염원 때문이었다.

이후 고인은 중앙대학교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중앙대 명예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장학재단인 수림재단과 우리문화의 계승발전과 세계화에 이바지 하는 수림문화재단을 설립해 후학육성과 우리문화발전에 이바지해 왔다.

고인의 몸에 밴 근면과 근검절약 그리고 항상 남을 배려하는 정신은 고인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결같이 숙연한 마음을 갖게 한다. 반반한 자동차 하나 없이 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생활했던 고인의 삶의 모습은 체면과 외향지상주의에 빠진 우리사회에 경종이 되기도 했다.

고인은 1988년 체육훈장 청룡장, 1994년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장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재림 씨와 아들 양호(현 수림재단 이사장), 딸 양삼ㆍ양주 씨 등 1남2여가 있다.

대학 때 일본 지도교수의 끈질긴 귀화 요청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임을 고수했던 고 김희수 이사장. “5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녀온 뛰어난 문화인,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되뇌었던 고인의 숨결이 고국산천에 길이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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