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석 / 한인유권자센터(KAVC) 상임이사 ]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고 하늘을 보면서 마음껏 꿈의 상상을 펼쳤던 10대의 소년기가 필자에게도 있었다. 비록 조국근대화의 기치아래 잠꼬대까지 ‘새마을 노래’를 강요받았었지만 하늘만은 맑고 파랬었다.

◆국제사회의 적과 동지

모든 상황에 대한 궁금증을 ‘가난 극복’이란 명제가 해결을 해 주었다. 초등학교 시절 미국에 대한 고마움은 전쟁에서 우리를 지켜준 일 때문이라기보다는(솔직히 필자에겐) 시시때때로 보내주는 구호품 때문이었다. 학교를 대표해서 출전한 반공웅변대회에서 ‘미국이 공산당을 물리쳐 주어서 고맙다…’란 원고를 외웠지만 속으론 미국이 더 많은 밀가루를 보내줘서 학교에서 급식으로 나누어주는 빵의 크기가 커졌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장마 때에 홍수피해 이재민에게 보내온 밀가루 포대와 동네 상·하수도 공사장에 쌓였던 시멘트 포대에 그려졌던 성조기가 기억에 생생하다. 어릴 적 필자에게 미국은 그렇게 다가왔다.

초등학교의 입학식에도, 그리고 교복을 처음 입었던 중학교의 입학식 때에도 필자는 ‘3·1절 ’을 경험했다. 3·1절과 입학식이 겹쳤기 때문이다. 과목마다 선생님이 별도인 중학교의 첫 (국어)수업에선 독립운동에 관련한 시를 배웠고 (역사)시간엔 독립선언 33인을 배웠다.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 초등학교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구체적으로 동시에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꼬리가 되어서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과 미국의 관계체계가 필자의 뇌리에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분단체제의 극복’이 모든 한국인의 시대정신이어야만 한다고 규정하고 ‘통일’이 모든 것의 우선이어야 한다는 20대 펄펄 청년 때의 논리도 그러한 오랫동안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모국어를 떠나 50대가 된 지금의 결론은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고 아주 냉혹한 힘의 논리만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현실적인 힘의 열세에서는 과거의 정리를 철저하게 미래지향적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과 현실을 갈등의 관계로 볼 것이 아니고 서로를 정당화 시키는 논리개발의 긴장관계에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지도자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한-미-일 관계와 한인이민자

미국에 사는 한국계 미국시민으로 한국과 미국의 충돌하는 이익관계에서 과연 어떻게 처신하고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할지에 고민이 깊어만 간다. 더 깊숙이는 일본계 미국기업에 생업을 의존하는 한국인들이 지금 한-미-일 관계에서 어떠한 처신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정말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두 나라가 아니면 세 나라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 배짱이 편하기 짝이 없지만 지금처럼 안보, 경제의 문제에서 상충되고 충돌하면 하늘 아래 천하의 고아이기 십상이다.

20세기 지난 100년 동안엔 미국 중심의 서구사회와 소련 중심의 동구사회로 확연하게 전선이 구분되었을 때엔 이편과 저편만 정해지면 그냥 눈감고 있어도 저절로 ‘고(Go)’이었다. 큰 틀의 전선은 무너졌는데 하위전선인 한반도는 아직 분단이다. 국제사회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분단국가 신세지만 그저 개인 입장에서 눈감고 모른 척 하면 그냥 ‘고’일 수 있다.

그러나 모국어를 떠난 재외동포 입장에선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것은 심각하고 더욱 복잡해진다. 더구나 다인종이 모여 사는(출신국가 간 이익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미국에선 점점 더 미묘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현실을 피할 도리가 없다.

◆미국의 ‘모범시민’ 돼야

강자의 관대함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온 미국이 이제 '제 코가 석자'가 되었다. 미국으로부터 밀가루 배급의 은혜를 입었던 필자가 이제는 미국에게 밀가루 원조를 해야 할 판이니 실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은혜를 입고 부자가 되었음에도 나누지 않고 끝까지 받으려고만 한다면 살찐 돼지에 불과할 것이다. 국제사회도 다르지 않다. 그동안 미국(물론 패권을 통해서 살을 찌웠지만)은 가진 만큼 나누어 왔다. 오히려 나누어 주는 재미에 도취되어 선·악을 가리지 않고 퍼 주었던 예도 없지 않다.

그런데 미국이 어느덧 바닥이 났고 거덜이 났다. 한 세기 동안 세계의 맏형 역할에 취해있는 동안 도무지 스스로를 돌보질 못했다. 강자의 관대함이 서서히 피해의식의 배신감으로 돌변하는 중이다.

미국과 한국 사이에 갈등이 있다면 미주한인들은 그 문제를 풀어야 할 당사자다. 미국과 한국의 이익이 충돌하면 미주한인들은 우선은 미국시민이어야 한다. 미주한인들은 쉴 사이 없이 한·미간 이익관계를 일치시키는 논리를 만들어야 한다. 하물며 우리가 미국과 중국,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선 미국이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미주한인의 입장에서 한국이 튼튼하게 미국의 편을 들고 나오는 일은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미주한인들의 최선은 모범시민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