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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훈 선생 현창준비회 이정림 회장, 그는 누구인가
김도균 기자  |  kdg@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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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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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림 회장
10월 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5회 세계한인의 날 기념식. 고 조규훈 전 재일민단중앙단장에 대한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여식이 있었다. 고인의 장남 성현 씨(73세)가 대신 수장(受章)한 이날 훈장 수여식을 지켜보는 사람 중에 남다른 감회와 눈물을 흘린 이가 있었다.
조규훈 선생의 훈장 추서에 3번 도전해 결실을 맺게 만든 장본인, 고 조규훈 선생 현창준비회 이정림(李正林) 회장의 이야기다.

지난 8월 하순 재일동포 민족교육의 선구자인 고 조규훈 선생이 정부의 재외동포 유공자 추천대상자로 선정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잊혀진 인물, 그것도 고인이 된 분에게 훈장을 추서한다는 것은 사실상 쉽지 않은 일인데 추천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에 다행스럽다는 마음을 갖고 있을 즈음 제주출신 한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조규훈 선생의 훈장 추서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을 추진해 온 분을 소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조국과 민족에 이바지한 훌륭한 인물에게 국가가 훈장을 수여해 그 업적과 정신을 기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잊혀진 인물을 발굴해 후대에게 알리고 공적을 기리는 사람의 수고와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재일 민족교육의 선구자 조규훈 선생과의 인연

시내 한 호텔 식당에서 이정림 회장을 만났다. 건네준 명함에는 ‘조규훈선생현창준비회 이정림’이란 직함과 전화번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연배로 봐서는 정년퇴임을 넘긴 나이여서 그동안 다양한 활동을 했을 듯 한 풍모임에도 경력과 이력사항에는 일체 다른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이정림 회장을 소개해 주신 분으로부터 재일동포로서 재일동포사회 금융에 관계 일을 했다는 사실을 들은 터라 조규훈 선생과의 인연이 더욱 궁금해졌다.
이정림 회장에게 현재 하는 일을 묻자 조규훈 선생을 재조명하게 된 이야기부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조규훈(曺圭訓, 1906~2000) 선생.
재일교포 사업가이자 민족교육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업적과 삶이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2000년도 이후여서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06년 12월 16일 제주도 조천읍 신촌리에서 출생한 조규훈 선생은 17세인 1923년 혈혈단신(孑孑單身)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의 온갖 박해와 차별을 무릅쓰고 사업가로 성공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우했다. 교육자였던 아버지는 독립운동 한다며 출가한 뒤 실종됐고, 어머니마저 병사하는 바람에 고아로 친척집을 전전하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향학열에 불타 있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한 그는 17세 때에 다짐을 하고 신천지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고베(神戶) 고무공장에 일자리를 얻은 조규훈 선생은 민족차별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은 후 22세 때 작은 회사를 차려 독립했다. 그의 오기어린 열성과 끈기는 일본인 사회로부터 신용을 얻었고 조국의 광복전후에는 큰 사업가로 명성을 날렸다.

조규훈 선생이 재일동포 사회와 본격적인 연연을 맺게 된 것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7월이었다. 한 친척으로부터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듣고 거절했는데, 그 친척의 밀고로 ‘공산당원’이란 누명을 쓰고 고베 현병대에 불려가 48일 동안 구금된 사건이 있었다. 무혐의로 풀려나면서 당시 헌병대장으로부터 효고현에 있는 19세에서 22세까지의 조선 징용공 2천여 명의 파업문제를 의뢰받고 해결해 준 것이 조국의 젊은 징용자들에 깊은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조규훈 선생은 그의 자서전에서 “종전(終戰)의 혼잡을 틈타 영리사업으로 돈을 벌기는 쉽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업가라 할 수 없다. 그래, 지금이야말로 젊은이들과 조국의 발전을 위해 헌신할 때다.”라고 썼다. 본격적인 사업사회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그러한 선택은 파란만장한 사회사업가로서의 인생을 살게 하였고, 죽는 날까지 그 인생의 신념을 위해 살았다.

그 후 조규훈 선생은 조국이 광복을 맞이했으나 귀국하지 못한 징용자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돕고 상담해주면서 뜻을 같이한 징용자 60여명과 함께 ‘일본에 남아서 조국부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실행에 옮기자’며, ‘머리가 하얗게 되어도 이 신념이 살아있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모임인 ‘백두동지회(白頭同志會)’를 만들었다.
‘조국 부흥의 밑거름이 되자’는 백두동지회의 설립목적에 맞춰 조규훈 선생은 설립발기인들과 함께 학원설립에 나섰다. 처음 공업학교와 여학교 병설로 출범한 학교는 후에 건국소⋅중⋅고등학교로 바뀌었다. 건국학교의 운영은 사업부진으로 자금 지원이 어려워진 1950년 여름까지 조규훈 선생이 사재를 털어 운영해 나갔다. 건국학교는 종전의 혼란한 틈바구니에서 자치 폐교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1949년 5월 일본 문부성으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은 ‘재단법인 백두학원’으로 거듭났다. 재일민족학교로는 유일하게 일본문부성의 정식 인가를 받은 학교인 것이다.
조규훈 선생의 백두학원 설립은 재일동포의 뿌리를 지켜온 것이며, 민족 얼을 지킨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 지난 10월 5일 조규훈 선생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장 기념 파티에서 이정림 회장이 조규훈 선생 유족과 제주도민 향우회 관계자들과 기념쵤영을 하고 있다.

조규훈 선생의 조국사랑에 대한 열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49년 1월 개설한 주일대한민국대표부 설치 때도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 정부수립 초기 돈이 없어 변변한 대사관이나 영사관 건물조차 마련하지 못한 한국정부를 위해 당시 1300만 엔을 지원했다. 이밖에도 조규훈 선생은 전쟁 피해자 원호 사업일환으로 일본에 남아있는 징용자(백두동지회 회원)들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에 채용하고, 일본인 전쟁 피해자를 위한 원호사업에도 앞장서며 일본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조규훈 선생이 재일대한민국민단(재일민단) 중앙단장에 출마하게 된 것은 우연처럼 보인다. 박열(朴烈) 단장이 임기만료 4개월을 앞두고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건으로, 공산주의파와 아나키스트파(무정부주의자) 등의 대립으로 혼란에 빠진 민단을 수습할 적임자로 일본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조규훈 선생이 부각됐다. 조규훈 선생은 무정부주의자인 원심창(元心昌) 씨를 근소한 차이로 이기고 선출됐다. 그 후 조규훈 선생은 차기 중앙단장에 큰 표 차로 당선됐다. 그가 선출된 후 기울어져 가는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 자리에서 물러나려하자 일본 정부는 민단에 2만 엔을 지원할 테니 남아있어 달라는 요청을 해 오기도 했다. 그가 혼란스러웠던 시기 민단단장을 맡은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조규훈 선생은 1950년 고향인 제주도 조천읍에 조천중학교를 건립했고, 후학양성에 힘쓰다 2000년 6월 95세 나이로 별세했다. 조규훈 선생의이 일본에 설립한 백두학원은 재일동포의 뿌리를 지켜온 것이며, 민족 얼을 지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토록 조국사랑과 민족교육에 앞장서 왔건만 그는 고향을 떠난 후 한 번도 제주도 땅을 밟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업적과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조천중학교 출신들조차 조규훈 선생이 이 학교를 설립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

이정림 회장은 누구인가

이정림 회장.
그는 1940년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15살 때 고향을 떠나 연고 없는 신의주로 갔다. 개방적이고 도전정신이 강했던 그의 아버지는 20대 시절 홀로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다녀오곤 했다. 그가 부모님과 같이 고향 제주에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제주4.3사건이 터져 마을을 휩쓸었지만 가족들은 무사했다. 6.25전쟁이후 팔순이 다가오는 아버지는 그에게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빨리 하라고 재촉했다. 아버지는 “일본에 의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구두닦이라도 할 생각 없으면 가지마라!”고 하셨지만 이정림 회장은 일본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던 터라 따를 수가 없었다. 끝내 아버지를 설득해 일본행을 감행했다. 어쩌면 이 회장에게 아버지와 같은 개척정신의 피가 끊고 있었는지 모른다.

1958년 2월 당시 18세였던 이 회장은 부산 영도를 출발 대마도를 거쳐 2달 후 오사카에 도착했다. 패전 후 일본의 경제사정도 어려운 처지여서 돈 벌이가 쉽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만드는 선반공 일을 하며 근기대학 법대에 합격해 대학을 수료했다. 그러나 외국인에게는 사법시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아 사법시험에 필수인 공법, 민법보다 이 회장은 국제해양법을 전공으로 택했다. 대학에서 법학부장까지 지냈다. 사법시험을 위해 법학대학장이 일본국적 취득을 하라고 권유했지만 이 회장은 국적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일본에서의 막막한 삶이 이어질 쯤 돈을 벌려면 은행 일을 해보라는 주위의 이야기를 듣고 무조건 은행 문을 두드렸다. 그가 찾아간 곳이 바로 신한은행 설립자인 이희건 회장이 있던 일본신용조합 오사카흥은(大阪興銀)이었다. 이정림 회장의 경력을 보고 “채용도 마감됐고, 화려한 경력과 학력을 가졌으니 따분한 은행일보다 외교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어떠냐?”는 오사카흥은 상무의 말에 이 회장은 “우리 아버님도 쇠붙이는 일을 하실 분은 아니셨지만 죽도록 그런 일을 해 오신 분이다”라고 답했다. 은행에서 꼭 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희건 회장은 그를 다음날부터 출근하도록 해 총무부(비서실)로 발령을 냈다. 오사카흥은 설립자인 이희건 회장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정림 회장은 만 35년을 이희건과 함께했다. 이희건 회장은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까다롭다고 알려진 이희건 회장의 측근 비서로 35년간을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이희건 회장은 과제를 주고 실패에 상관없이 열심히 하라고 하는 타입입니다. 비서는 모든 일을 정확히 보고만 해야 하는 것이지 상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도 하셨어요. 아마 그런 부분에서 제가 조금 인정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한번은 뮌헨 올림픽(1972년) 때 오사카총영사로 있던 김진홍 총영사가 이희건 회장에게 올림픽 참가비 10만 엔을 요구해와, 지출보고 없이 자의적으로 송금을 하는 바람에 이희건 회장이 관리통장과 인감을 모두 회수해 간 일이 있었다. “잘 해보려고 한 일을 두고 그렇게 나무라면 되느냐”는 사모님의 변호로 무마되기는 했지만, 이희건 회장은 “잘한 일이라도 그렇게 조치하지 않으면 앞으로 저 친구는 500만 엔도 쓰게 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 후로 이정림 회장은 철저히 제 역할에 충실할 수 있게 됐다고 회상했다. 이 회장은 이희건 회장에 대해 주변인물을 잘 쓰는 인물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정림 회장은 1966년 오사카흥은에 입사해 지점장과 융자부장을 거쳐 1991년 전무이사에 취임했다. 이후 관서흥은(關西興銀) 대표이사, 부이사장, 이사장을 역임했다. 2001년에는 신한금융주식회사 공헌이사. 1990년 재일동포 경제발전 및 금융계 발전에 공헌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장하기도 했다.

조규훈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현창준비위원회의 활동

2009년 11월 제주의 한 호텔에서는 조규훈 선생을 기리기 위한 설명회가 있었다. 재일동포, 향토사학자, 지역유지 등 70여명이 모여 조규훈 선생의 공덕을 재평가하자는 데 뜻을 모으고 있었다. 조규훈 선생 사후 9년만의 일이었다.
이 모임의 중심에는 이정림 회장이 서 있었다. 제주 조천읍 출신 재일동포로 구성된 (가칭)조규훈선생송덕사업회가 주관한 모임이었다.

   
▲ 전병돈 재외제주도민회총연 부회장, 이구홍 본지 발행인, 이정림 회장 부부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왼쪽부터)
이정림 회장이 고 조규훈 선생을 만난 것은 2001년 어느 날이다. 민족교육의 선구자요 재일동포 사업가인 조규훈 선생이 95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때의 애린 마음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서 한참 후 2007년 그를 다시 만났죠. 백두학원 60주년 행사에서 건국학교에 관한 옛 필름을 보게 됐어요. 충격이었습니다. 젊은 날의 조규훈 선생의 육성녹음을 들었을 때는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
이 회장은 조규훈 선생의 회고담을 전해 듣고 일단 그 가족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같은 고향 어른인 조규훈 선생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의 가족조차 챙기지 못한 부끄러움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2007년경 동경에서 그의 장남을 만났다. 그러나 그의 눈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스런 눈빛이 서려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공한 사업가로 그리고 민족교육에 일념을 다한 그의 아버지가 정작 자식들에게는 물려준 재산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규훈 선생님에 대한 기록이 없냐고 물었더니 종이 몇 장을 주더라고요. 그곳에 기록된 것을 10번 이상 읽었어요. 내가 어릴 적 제주 신촌 바닷가에 떠다니는 나뭇조각들을 붙잡고 헤엄을 치곤했는데, 그 나뭇조각들이 그 분이 학교건립을 위해 보내준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됐죠.”
이 회장은 조규훈 선생의 공적을 널리 알릴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이것이 이 회장으로 하여금 조규훈 선생 현창준비회를 결성케 한 이유이기도 하다.

조규훈 선생에 대한 공적발굴과 재일동포사회에 기여한 공로가 드러나면서 그의 자녀들 또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정림 회장은 조 선생의 아들들이 “어머니 스커트 하나 사주는 것조차 꺼려했던 아버지를 원망했었는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만 잘살아서 뭐하느냐’는 아버지의 신념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고 한 말을 전했다.

이 회장은 조규훈 선생은 알면 알수록 신비하고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고향에 찾아가 물어보니 조천중학교 출신조차도 조 선생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재일민단 단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음에도 그에 대해 민단 관계자들조차 잘 모르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고 했다. 이 회장은 누구보다도 재일동포 사회에 기여하고 민족교육에 앞장선 조규훈 선생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함을 절감했다고 했다. 그는 지난 2009년부터 그동안 발굴된 자료를 토대로 국민훈장 추서를 추진했다. 고인이 된 인물을 훈장을 받게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매년 추서 대상자로 정부에 올렸다.
추서과정에서 권철현 전 일본대사의 도움도 컸다고 말했다. 권 전 대사는 건국학교를 방문해 민족학교 활성화를 위해 60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지난 3년간의 조규훈 선생 현창준비위원회의 활동 결과로 올해 한국정부는 최고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이 회장은 사람의 도리로 고사성어 ‘음수사원(飮水思源) 굴정지인(掘井之人)’이라는 말을 꺼냈다. “목말라 물을 마시면 그 갈증을 해소한 것에 그치지 말고, 그 우물을 판 사람의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광복 후 혼란기에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재일동포 사회에 민족혼을 심어준 조규훈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죠. 저 개인적으로도 그 분이 설립한 학교가 있었기에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오늘날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회장은 故 조규훈 선생을 대신해 훈장을 수여한 가족들을 위해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다. 그간의 노고와 가족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제주 조천읍 출신들과 함께 전하고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참석한 많은 분들이 조규훈 선생의 공적을 치하하면서도 그의 훈장 추서와 발굴에 힘쓴 이정림 회장의 수고에 감사함을 표했다.

이 회장은 향후 조규훈 선생 현창기념사업회를 추진할 계획이다. 훈장 수여로 현창준비회 역할을 다한 만큼 앞으로는 조규훈 선생의 정신과 공적을 알리기 위한 사업에 매진하겠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제주대학에 ‘제주센터’가 들어서면 그곳에 ‘조규훈 선생 기념관’을 마련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일본에 있는 건국학교에도 기념비를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비량(自備糧) 현창활동을 전개하는 이정림 회장. 생색내지 않고 진전한 조국사랑을 실천한 조규훈 선생의 정신이 그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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