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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의 대가 정판룡 선생을 기리며
강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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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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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순화 / 연변대학 여성연구중심 연구원, 조선족여성발전추진회 회장 ]


   
▲ 강순화

금년 10월 7일은 우리 조선민족의 걸출한 교육가이며 문학가요 사회 활동가였던 연변대학교 전임 부총장 고(故) 정판룡 교수의 서거 10주기 추도일이다. 중국 조선족 민족문화의 거목 정판룡 선생은 저명한 학자로서 수많은 젊은 후학들을 양성하였으며 우리민족의 진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혼신의 정열과 지혜를 쏟으신 훌륭한 문화지성인이자 우리 민족문화의 대가였다. 한 위인으로서는 너무나도 아쉬운 70세의 인생노정에서 선생은 우리민족의 교육과 문화발전을 위해 그야말로 많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숭고한 정신, 그 드넓은 흉금, 그 자애로운 얼굴, 그 우렁찬 목소리는 수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 가슴속에 아로 새겨져 무시로 우리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운명의 안배였을까? 나는 12년간이나 이렇게 저명하신 민족문화의 대가 정판룡 교수님을 모시고 연구 사업을 함께할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1989년 말, 연변대학 한어학부에서 연구하던 내가 선생의 부름으로 설립 준비 중이던 ‘조선한국연구중심’에 전근했을 때 선생은 대학의 부총장으로서 우리대학 연구중심의 주임을 겸임하셨다.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선생은 연변대학의 민족적 학문적 특성을 살려 중국에서 처음으로 대학교에 ‘조선한국연구중심’을 창립해 연변대학이 중국내에서의 조선한국학의 위상을 정립함에 있어서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 누구든지 처음 선생님을 대할 땐 무척 존경하면서도 또 접촉하기 어려운 분으로 여겼었는데, 선생의 그 후덕한 성격과 너그러운 인품을 접하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친 부모와 같은 뜨거운 정을 느끼게 하였다. 영도이자 스승으로서의 아낌없는 지도와 친절한 가르침은 나로 하여금 항상 신심 가득히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학부사무실에서 교무업무를 보다가 과학연구부문으로 옮겼을 때는 처음엔 어떻게 학술연구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한 나에게 선생은 주저 없이 임무를 맡기고 과감히 실천하도록 고무, 격려해주기도 했다.

기억에도 새로운 1990년 10월 한국의 한 사회학회에서 우리 연구중심과 함께 《중국조선족사회연구》 학술토론회를 가졌는데 10여 가지 연구항목 중 《여성의 사회적 지위》라는 항목이 있었다. 선생은 “이 문제는 강동무가 맡아해야 하겠소. 여성문제가 아니요?”라며, 대담히 연구해 보라고 하였다. 선생의 고무와 격려에 힘을 얻은 나는 열심히 사회조사를 하고 자료를 찾고 정력을 쏟아 부으며 연구하고 집필한 끝에 학술회에서 좋은 평가와 인정을 받은 한편의 논문을 쓸 수 있었다.

이것이 나의 첫 논문이 되어 그 후 수년간 많은 연구 과제를 완성해 나갈 수 있었으며, 이러한 실천 과정에서 학문의 법칙과 규범을 모색하고 연구방법을 찾아내 몇 년 만에 30여 편의 중국조선족연구와 여성연구 논문들을 국내외 학술간물에 발표함으로서 1997년 1월에는 파격적으로 부연구원이라는 직책까지 오를 수 있었다.

선생님의 참다운 가르침과 지도가 오늘의 나를 이끌어주셨고 키워주셨음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으며, 젊은 시절에 정판룡 교수님 같은 참 스승을 만난 것에 평생의 행운으로 여기며 항상 자랑을 하고 있다.

선생은 민족의 전당인 연변대학의 발전을 위하여 뛰어난 행정력을 과시함과 동시에‘연변대학의 특색은 조선한국학연구’임을 강조하였고, 반드시 이 유리한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고 발전 제고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곤 했다. 그는 친히 ‘연구중심’을 세우셨을 뿐 아니라 교내의 각 사회학과 연구기구들과 연합하여 20여 차례의 국제학술회와 국내외 학술활동들을 활발히 조직 지도함으로써 수많은 학술성과로 연변대학 위상을 드높였다.

1999년 5월, 청천벽력으로 불치병 진단을 받으신 후에도 선생은 의연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완강한 의력과 투지로 병마와 싸우셨고, 한두 번도 견디어 내기 어렵다는 항암치료를 열 두 차례나 기적같이 견디어 내셨다. 그런 와중에도 선생은 우리를 보고 “아직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죽지 못하는가 보오.”라며 조금만 정신이 들면 필을 들어 글을 쓰시곤 했다. 아마 생명에 대한 굳은 신념, 불타는 삶의 정열이 선생을 그렇게도 버티게 한 것 같다.

2년 반이라는 기나긴 투병생활, 전후 무려 열네 차례나 병원에 입원하시면서도 선생은 항상 후학들에게 조선족사회 문제들을 피력하며 “내가 알고 있는 일들은 내가 죽으면 다 파묻혀 버리게 되니 살아 있을 때 내가 다 써 놓아야하오.”라고 언급했다. 우리문단의 우수한 작가, 평론가들의 일화 30여 편을 매일 만여 자씩 써서 《장백산》잡지에 연재해 인생철리가 빗발치는 감격적인 글들로 독자들을 감동시켰다.

또 중국 조선족의 문화교육사업을 자신의 평생사명으로 간주하고 투병 중에도 그 힘든 몸으로 사회의 각종 지성인활동에 참가해 지도와 연설을 했으며, 한국 우리은행 비즈니스 클럽의 자금을 쟁취하여 ‘중국조선족아동장학회’를 설립. 금년에 이르기까지 이미 9년간이나 이 기금으로 만여 명의 실학아동을 구하고 극빈학생들을 도와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도 선생은 연변대학의 곤란한 학생들을 위해 병상에서 6명의 학생들에게 ‘정판룡교육기금장학금’을 마련해 주었다.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어려운 생의 마지막 시각에도 선생의 그 뜨거운 마음은 식을 줄 몰랐던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힘들게 장학생들의 손을 일일이 굳게 잡아 주던 그 모습은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더욱더 사람들을 경탄케 하는 것은 선생의 유언이다. 평소 장학금의 운영을 걱정하던 선생은 치료하고 남은 돈을 몽땅 장학금으로 내 놓았다. 참으로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거동이요 천사의 마음이었다.

선생께서는 또 당신이 수십 년간 수장하시고 아껴 보시던 도서 2000여권을 몽땅 ‘연구중심’에 기증해 후학들의 학문연구에 이바지 했다. 선생의 서가에서 한권 한권의 책들을 뽑아 등기하고 정리하면서 우리는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가물가물 꺼져 가면서도 유난히 밝게만 빛나던 한대의 굵직한 촛불,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몽땅 불태우던 그 맑은 영혼, 추호의 사심도 없이 민족교육사업에 혼신을 바쳐온 그 모습 그 덕성은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훌륭한 한 스승을 잃었다. 선생께서 이끌어 주고 키워주었던 수많은 제자들은 평생 우리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하시다 너무도 일찍 우리 곁을 떠난 정판룡 선생을 존경하며 한없이 그리워하고 있다.

정판룡 선생 서거 10주기를 추모하면서 우리는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꼭 훌륭히 사업해 나갈 것이며 민족의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 모든 정력과 지혜를 다 바칠 것이다. 존경하는 스승께서 하늘나라에서라도 항상 굽어보시길 바라고 있다.

아래에 ‘정판룡 문학편’ 출간 기념 모임에서 발표됐던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사장 한석윤 선생의 시를 재삼 읊어 보면서 정판룡 선생에 대한 추모의 글을 마친다. (조글로신문)


                     < 스승님께 올리는 시 >

                                                                    한석윤


멀리서 바라보면 산 이었습니다
하얀 구름 서리서리 허리에 감고
하늘을 떠받치고 선
아아한 산 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서보면 냇물 이었습니다
키작은 풀들과 눈 맞춤하며
도란도란 정다운 이야기 끝이 없는
살가운 냇물 이였습니다.

민족문화산맥의 제일봉에 오르시어
세기의 아침 해 남 먼저 마중하며
민족의 앞날에 채운을 뿌려 주시면서도
만인의 입에 도인으로 칭송받으면서도
언제나 언제나
맨발바람으로 고학의 길 떠나시던
그날 그 농부의 아들로 살아오신 스승님

스승님의 그 거룩한 모습에서 저희는
잘 익은 이삭일수록 머리 숙이고
물이 찬 병일수록 소리가 작다는
참인간의 정도를 깨칠 수 있었고

스승님의 그 거룩한 행실에서 저희는
싱싱하게 피여야 할 우리 민족의 길에
내가 설 자리, 내가 해야 할 일
불씨로 받아 가슴에 피울 수 있었으니

아, 정녕 산이면서도, 우람한 산이면서도
한뉘 민초들과 이웃하여 냇물처럼 살으신 스승님
스승님은 언제나
민족의 산으로 우뚝 솟아있을 것입니다
민족의 좌표로 영원할 것입니다.

(2001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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