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100대대가 편성됐을 때 하와이의 일본계 부모들이 자식들 걱정에 고메타니가 대대에서 자식들 가까이 있으면 했고 미군 당국도 그런 인물이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고메타니를 100대대 특별참모로 임명했다. 병사들은 문제가 생기면 고메타니에게 뛰어갔고 고메타니는 병사들의 애로사항을 대대장에게 직접 전하면서 병사들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됐다. 고메타니는 언제나 인자하게 병사들을 보살폈고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100대대는 독특한 시스템을 가진 셈이었는데 나중에 전쟁터에서 이 시스템은 아주 효과적으로 가동했다.

　첫날 영옥이 만났던 또 다른 한 사람은 마이크 미야키 하사였다. 영옥의 도착에 앞서 영옥이 B 중대로 갈 것임을 알고 있던 고메타니 대위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게 됐는데 미야키 하사는 중대 보급계였다.

　다음날 영옥은 대대장 패런트 터너 중령이 본대보다 먼저 기지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대장에게 전입신고를 하러 갔다. 터너 중령은 영옥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고 영옥을 만나기 위해 본대보다 먼저 돌아온 것이었다. 정복을 챙겨 입고 아침 8시에 대대장실로 들어간 영옥은 대대장에게 경례하면서 말했다.

　“소위 김영옥 전입신고합니다.”

　“곧바로 귀관에 대한 전출 절차를 밟겠다.”

　신고를 받은 터너 중령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저는 방금 도착했습니다.”

　“알고 있다. 그러나 김 소위는 한국계 아닌가. 귀관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부대는 일본계로 이뤄져 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귀관도 알다시피 역사적으로 한국계와 일본계는 앙숙 아닌가? 나는 하와이에서부터 그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귀관도 여기 남고 싶진 않겠지?”

　“아닙니다.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이 부대에 남고 싶습니다.”

　“…?”

　“그들도 저도 같은 미국 시민이며 같은 목적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남을 수 없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이 부대에 배치됐다가 잔류를 희망하는 아시아계 장교는 한 명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출을 희망했다. 그 때문에 우리 부대로 보내진 아시아계 장교들에 대해서는 전출절차가 마련돼 있다. 시간도 이틀밖에 안 걸린다.”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그대로 남고 싶습니다.”

　“......”

　“......”

　“그런가? 그렇다면 남아도 좋다. 그러나 조건부다. 일본계 장병과 무리 없이 지낼 수 있다는 조건이다.”

　처음 영옥이 남겠다고 하자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터너 중령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사실 터너 중령이 직접 사용했던 말은 한국계나 일본계란 말이 아니라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말이었다. 요즘 미국에서는 뿌리를 존중하면서 이민자나 그 후손을 부르는 용어로 ‘코리안 아메리칸’(Korean American)이나 ‘재퍼니즈 아메리칸’ (Japanese American) 같은 말이 널리 쓰이지만 그때만 해도 이런 용어 자체가 없었고 이민자는 시민권을 받아도 법적으로 여러 제약이 가해지던 시절이었다.

　‘나는 남는다. 그러나 오로지 남기 위해 다른 장교나 병들에게 비굴하진 않겠다.’

　영옥은 터너 중령이 잔류를 허가할 때 속으로 다짐했다. 24세의 청년 장교로서 영옥은 자신이 임관하면서 보호하겠다고 충성 서약을 했던 미국의 헌법 이념을 순수하게 믿었고 미국이 추구하는 것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이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믿었다. 영옥이 대대장에게 “우린 모두 미국시민이며 같은 목적을 위해 싸운다”고 했던 말도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저런 것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랬다.

　잔류가 결정된 영옥은 예정대로 B 중대에 배치됐고 영옥이 B 중대장 클레런스 존슨 대위에게 신고하자 존슨 대위는 영옥을 2소대장에 임명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이던 시절에 한국계가 일본계 부대에서 장교 노릇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없는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맹목적 신뢰였다. 영옥이 병사들로부터 그 같은 신뢰를 얻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려야 했다.

　영옥이 2소대장으로 임명됐을 때 2소대는 훈련을 받으러 나가 기지에 없었기 때문에 다음날 처음으로 소대원들과 대면할 수 있었다. 소대를 처음 본 영옥은 기가 찼다. 지난 2년 동안 17연대에서 병사 생활을 하면서 군에 익숙해 있었고 불과 2주 전 장교후보생학교를 졸업한 영옥의 눈에 병사들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선임하사 다카시 기타오카의 명령에 따라 집합하고 있는 소대원들은 군인이라 불러주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리가 치렁치렁하거나 제멋대로 수염도 길렀다. 윗도리를 바지 속으로 집어넣지 않거나 바지를 군화 속으로 집어넣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군화 대신 단화를 신었거나 아예 맨발도 있었고 신발을 신었어도 끈을 제대로 매지 않은 자들이 태반이었다. 다림질 자국이 선명한 군복이나 반짝이는 군화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선임하사로부터 다른 부사관들을 소개받으면서도 영옥은 황당하기만 할 뿐 무어라 할 말을 잃은 채 간단히 형식적 인사만 주고받고 소대를 해산시켰다. 소대는 바로 식사를 하고 훈련에 들어갔는데 영옥은 밥을 먹을 때도 훈련을 할 때도 선임하사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묵묵히 이들의 대화를 듣고 지켜보기만 했다.

　이렇게 이틀을 보낸 영옥이 선임하사 기타오카를 불렀다. 기타오카는 텍사스 법대를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징집된 인물로 영옥보다 나이도 일곱 살 많은 아주 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영옥이 2소대를 맡은 후 첫날부터 잘 지냈던 유일한 소대원이었다.

　“도대체 2소대는 뭐 하는 거요?”

　“솔직히 말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글쎄, 그런 것 같아 하는 말이오.”

　“저희는 기본 군사훈련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벌써 세 번째입니다. 병사들은 진주만 기습이 있기 전에 징집된 하와이 주 방위군 출신인데 처음 방위군에 들어갔을 때 기본 군사훈련을 받았고, 100대대가 편성된 후 캠프 맥코이에서 다시 기본 군사훈련을 했는데, 이번에 캠프 셸비로 와서 세 번째 반복하고 있습니다.”　

▲ 한우성 재미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