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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계관의 뉴욕방문 바로보기
김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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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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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석 / 한인유권자센터(KAVC) 상임이사 ]


   

1994년 미국은 평양정권이 러시아 산 낡은 원자로에서 나온 부산물로 플루토늄을 추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적대적이고 전투적인 반미국가, 북한이 핵무기를 갖게 되는 것을 미국으로서는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북한이 원자탄 몇 개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촉발된 위기는 그 해 ‘Agreed Framework'란 협정으로 해소 되었다.

평양이 구 원자로를 쓰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조사를 허락한 대가로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은 핵무기 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 핵분열 물질을 산출하지 않는 두 개의 원자로(경수로)를 제공해 주고, 고립된 북한과 외교. 경제적 관계를 열겠다고 약속했다(강석주와 로버트 갈루치의 협상). 미국은 또한 북한에 원유를 공급해서 원자로 폐쇄로 부족한 에너지를 대체하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당시 북에게 에너지를 제공하려고 만든 국제 컨소시엄이 KEDO이고 그 KEDO에서 가장 출중한 실력을 발휘했던 외교관이 현재 김영목 뉴욕총영사다). 그러나 그 후 3년 동안 클린턴 행정부는 협정의 이행을 중단했다.

주민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전 국가가 고도로 군사화 된 북한 정권이 곧 붕괴 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북한정권붕괴론”이 틀렸다는 결론이 난 것은 클린턴행정부의 수명이 다 끝날 때인 2000년이 되어서다. 2000년 6월 한국의 대통령은 미국과는 한 마디 의논도 하지 않고 세계가 경이롭게 주목한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으로 역사적인 화해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마지막 냉전의 흔적을 씻어 버리고자 노력한 그의 평양 방문으로 돌파구가 뚫렸고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는 마치 1971년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수백만 미국인들의 기대를 받았던 것과 같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으로 북한과 서방세계와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개선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고 곧바로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추진하기 시작했다(국무장관의 북한방문을 재촉한 것이 ‘페리 보고서’이고 그 페리보고서를 만든 주역이 ‘웬디 셔먼’이다. 지난 6월말,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내 가장 적극적인 ‘대화파’인 북한 전문가 웬디 셔먼‘을 국무부의 서열3위인 국무부정무부장관으로 임명했다).

2000년 11월 미국의 대통령선거 결과는 패자를 법원에서 승자로 만들게 했다. 서울과 워싱턴에서 대북한 우호적인 분위기는 정지 되었다. 2001년 3월 워싱턴을 방문한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에 의해 대단히도 무례하게 퇴짜를 맞았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미국의 호전적인 성명서에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2002년 9월 부시 대통령은 국가안보 전략으로 “예방전쟁”을 언급했고 그 대상인 ’악의 축‘에 북한을 포함시켰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북한의 김정일은 부시의 ’예방전쟁‘ 과 ’악의 축‘이란 수사법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북한은 가장 고립된 정권하의 국가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위수단을 채택하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핵 확산 금지 조약에서 탈퇴하고 국제 사찰관들을 추방했으며 이전의 원자로를 재개했다.

이미 전쟁 하나(이라크)를 치루고 있는 부시 행정부의 외교. 안보 전략가들은 자신들의 호전적인 입장을 철회내지 완화한다거나, 아니면 협상을 제시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네오콘이란 이름자에 걸맞게 ‘선제공격’이란 언급으로 전쟁개시 직전까지 먼저 갔다. 김정일 정권은 이라크 다음 순서가 자신들이라는 거의 확실한 결론에 도달했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그리고 북한의 핵위협 등의 긴장분위기를 십분 활용해서 재선에 성공한 부시 대통령의 인기가 2005년 초에 들어서면서 급락했다. 대테러전이란 명분들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급기야 2006년 중간선거전에서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었다.

워싱턴의 완벽한 여소야대가 되었다. 주전론자들인 네오콘들이 급속하게 퇴조했고 부시행정부내 비둘기파들이 등장했다. 강경파인 ‘딕 체니’부통령의 발언이 크게 약화 되었고 럼스팰드 국방장관이 자리를 내놨다. ‘곤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과 ‘로버트 게이츠’국방장관이 등장해서 북한과의 유화국면을 만들었다. 장거리 미사일을 일본의 상공으로 날려 보내고, 핵실험까지 해 대던 북한이 미국의 손짓에 반응했다. 주변국가와 이해당사자 국가들로 다자협상을 하자는 공감대가 6자회담이다. 그러나 6자회담도 조지 부시 행정부의 레임덕 때문에 더 이상 진전이 어려웠다. 협상론 자들은 오바마 행정부의 ‘스마트 파워’란 외교전략’에 기대를 걸었지만 금융위기와 의료보험개혁이란 정권의 국내 과제로 인해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이외의 국제문제는 모두 정체되었다.

   

집권 후반기로 들어선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문제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욕심을 부리고 있다. 백악관 내 실무담당자를 전격 교체했다. 자동적으로 국무부와 국방부내 북한 담당자도 교체되었다. ‘페리보고서’의 주역이었던 ‘웬디 셔먼’이 가장 중심이다. 북한과 적극적 대화의지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7월1일 민주평통 제15기 출범식에서 “지난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사태로 불안한 정세가 조성됐지만 우리는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대북관계에서 먼저 나가지 말아 달라는 한국 측의 요청에 의리를 지키는 미국은 지난 24일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에서 남과 북의 직접 접촉을 놓치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화의지가 나오기가 무섭게 그리고 동시에 남과 북의 직접 접촉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평양의 김계관 부상이 뉴욕을 향해서 출발했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을 넘어 이제는 ‘불안하지 않은’정세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한 대통령의 의중은 개인차원의 권력의지를 뛰어 넘는 분단국가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분단된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로서 남북 간에 제대로 된 대화를 하겠다는 대국적인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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