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장교

조지아 주 포트 베닝에 있는 육군장교후보생학교로 갈 수 있었던 것은 영옥에게는 실로 행운이었다. 장교후보생학교는 갖가지 교육과 시험을 계속했는데 시험결과는 영옥이 탁월한 성적으로 백인후보생들을 압도하고 있음을 반복적으로 확인해주었다. 입대전 미국사회가 영옥에게 강요했던 백인의 우월성이란 허상이 한 조각 한 조각 깨질 때마다 그 조각이 있던 자리에 자신감이 들어섰다.

장교교육은 영옥이 군인으로서 천부적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시켰는데 독도법이나 방향감각도 그런 것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영옥은 지도를 보면 머릿속에 실제 지형이 그대로 그려졌다. 처음 가는 곳이라도 일단 지도를 보면 상상한 그대로 실제 지형이 펼쳐졌다. 유능한 장교가 되려면 지도를 능숙히 읽어야 하는데 책상에서 이론으로 아는 것과 실제상황에서 지도를 정확히 읽어내는 것은 전혀 다르다. 방향감각도 아주 중요한 문제로 전쟁에서 장교가 정확한 방향감각이 없으면 자신은 물론 부하들까지 사지로 몰아넣는데 영옥은 동물적이라 할 만큼 뛰어난 방향감각을 갖고 있었다.

3개월간의 장교후보생 교육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후보생들은 4명이 한 조가 돼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동기생 중에서 처음 짠 조 그대로 졸업한 것은 영옥의 조밖에 없었다. 학교가 가차 없이 후보생들을 퇴교시키거나 교육과정이 너무 힘들어 자퇴하는 후보생도 많아 결국 반은 탈락했다.

1942년 11월 영옥이 간부후보생학교에 들어갔을 때 동기생 가운데는 흑인이고 아시안이고를 떠나, 유색인은 혼자였다. 동기뿐 아니라 포트 베닝에서 훈련받을 동안 봤던 선후배 기수 가운데서도 자신을 제외하면 아시아계는 한 명도 없었다. 이듬해 1월 말, 동기생들은 임관식을 하면서 졸업장과 계급장과 보직명령서를 동시에 받았지만 영옥만은 한 자기, 보직명령을 받지 못했다. 임관식이 끝나고 동기생들은 떠났지만 영옥은 그대로 포트 베닝에 남아 며칠을 보냈는데 하는 일도 없이 차일피일 소일하는 게 싫어 학교 측에 항의하자 답변이 돌아왔다.

“귀관은 제100보병대대로 가는데 지금 부대가 캠프 셸비로 이동 중이니 좀 기다려라.”
부대 이름이 이상했다. 미 육군은 보통 1개 연대 아래 3개 대대를 두고 대대 명칭을 1대대, 2대대, 3대대 하는 식으로 붙인다. 그런데 100대대라니••••••. 게다가 대대 앞에 붙게 마련인 몇 사단 몇 연대 같은 것도 없고••••••.
그러나 영옥은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어디건 명령대로 가서 충실히 근무하면 그뿐이었다. 학교는 대대가 캠프 셸비에 도착한 다음, 전출명령서를 발부할 계획이었다. 대대의 이동상황을 확인한 영옥은 열흘쯤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다시 물었다.
“어차피 그렇다면 지금 여기를 떠나 대대가 캠프 셸비에 도착할 때 그곳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열흘쯤 자기 시간을 써도 좋겠냐는 뜻이었다. 학교는 흔쾌히 영옥의 제안을 수용했다. 어차피 그들로서도 영옥이 그곳에서 빈둥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영옥은 전출명령서를 받아들고 열흘간의 말미를 이용해 아칸소 주로 갔다. 아칸소 주는 나중에 클린턴 대통령 때문에 유명해졌지만 당시에는 그다지 알려진 곳이 아니었다. 영옥이 아칸소를 찾았던 것은 제롬에 있는 일본계 이민자 강제수용소로 가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일본계와 놀지도 못하게 했지만 학교에서 만난 일본계들과는 자연히 친구가 됐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미국은 일본계 이민자들을 따로 분류해 미국 본토 여기저기 급조한 강제수용소로 격리시켰다. 있는 재산 없는 재산을 졸지에 내놓고 이렇게 강제수용된 일본계 이민자들이 12만 명이었다. 영옥이 제롬에 있는 일본계 강제수용소를 찾아갔을 때만 해도 수용소는 시설도 완전히 지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수용소는 주위로 찰조망이 둘러쳐지고 높은 망루에 서치라이트와 기관총까지 설치된 채 무장한 경비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육군장교 정복을 입은 영옥이 수용소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하자 초병들이 당황했다. 아마도 영옥이 일본계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 자기들이 가둬두고 지키는 일본계가 장교 계급장을 달고 나타난 것에 당황했으려니 하는데 초병들이 공손히 요청했다.

“리틀락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습니다.”
“방금 내린 버스가 막차고 리틀락에는 호텔방도 없다.”
영옥이 거부하자 초병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검문소 밖에서 1시간 이상을 기다리니 초병 한 명이 다시 나왔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수용소 내부는 엉망이었다. 일본계 이민자들을 몇 가족씩 한 건물에 몰아넣고는 가족과 가족 사이를 구분하는 벽조차 없이 양쪽 벽에 못을 박고 철사로 연결하고는 담요 몇 장을 옷핀으로 연결해 걸어 세대를 구분했다. 미국은 독일이나 이탈리아와도 싸우고 있었으나 같은 백인인 독일계나 이탈리아계는 다른 백인들과는 차별하지 않았지만 유독 일본계에 대해서만은 대통령을 발동해 법적 근거까지 만들어가며 철저히 차별했다. 영옥은 그곳에서 1주일 정도 일본계 친구의 가족과 함께 지냈다. 영옥은 일본계 수용자들 특히 아이들에게 우상이 됐다. 고압적 자세로 자기들을 감시하는 무장한 백인병사들이 장교복을 입은 영옥에게는 깍듯이 대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이러니

그 사이 알고보니 100대대는 지휘부는 백인이고 일반장교들은 백인과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계 2세가 섞여 있지만 사병들은 대부분 일본계 2세로 구성된 부대였다. 군대에서도 철저한 인종차별 정책을 시행해온 미국은 전쟁이 터져 백인만으로 병력이 모자라다 싶으면 유색인만으로 부대를 만들곤 해서 1차대전 때에도 일본계만으로 중대를 편성한 일이 있었다. 이 같은 미군의 인종별 부대 편성은 2차대전 때까지는 널리 퍼져 있다가 2차대전이 끝난 후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한국전쟁에서도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은 관행이었다.

100대대는 일본의 진주민 기습 전에 하와이에서 징집돼 하와이 방위군으로 있다가 진주만 기습 후 일본 해군이 미드웨이로 항진해오자 일본계의 충성심을 의심한 미군 지휘부가 일본계 1,400여명을 전부 골라내 만든 부대로 비밀리에 미국 본토로 이동해 오랫동안 훈련을 받고 있었다. 부대의 존재나 기원, 특히 초급 장교 다수가 일본계 2세라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친 채 1942년 10월부터는 10일간 사전 통보만으로 언제라도 전투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한다는 지침 아래 훈련을 받고 있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아이들과는 놀지도 말고 일본 음식은 먹지도 말라고 교육받고 자란 영옥으로서는 이 부대로 배치된다는 것이 참으로 큰 아이러니였다.

영옥이 이 부대로 배치된 것은 미군 당국이 영옥을 일본계로 오인했기 때문인 것 같다. 영옥의 어머니가 처음 미국에 입국하던 때는 한일강제병합이 있고 6년이 지난 다음이라 조선인들은 일본 여권을 갖고 다녀야 했다. 이로 인해 어머니도 일본 여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듯 미군은 처음 영옥을 징집하면서 신상서류에 모국어가 일본어라고 기재했는데, 이 때문에 장교후보생학교도 영옥의 신상카드를 보고 일본계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신생아의 인종을 분류할 때 어머니의 인종을 따라가는 나라다. 영옥이 제롬의 수용소에 있던 친구와 그의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미시시피 주에 있는 캠프 셸비에 도착했을 때 100대대는 이미 며칠 전 기지에 도착했다가 야영훈련을 나가고 기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몇 안 됐다. 미시시피 주는 겨울이면 비가 많이 오는 곳인데 일요일인 이날도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첫날 그곳에서 영옥은 두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군의관 고메타니 대위였다. 고메타니 대위에게 전입인사를 마친 영옥은 그와 함께 너덧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오후 늦게 도착해 따로 할 일도 없었고, 덕분에 영옥은 고메타니 대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치과의사였는데 당시 대대급 부대에는 치과의사가 별도로 배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는 군사훈련도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에 대대에 고메타니 대위 같은 인물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