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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의 일생
최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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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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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호 / 영산대학교 교수  ]


   
▲ 최영호 교수
지난 6월 26일 세계적인 건축미술가 이타미 준(伊丹潤) 씨가 도쿄의 병원에서 뇌출혈로 타계했다. 향년 74세. 6월 30일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장례식이 열렸고 한국에서는 오는 7월 19일 아이티엠(ITM) 건축연구소 방배동 사옥에서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따로 열릴 예정이다.

이미 한국과 일본의 건축계와 미술계에 널리 알려진 그는 생전에 자연과 호흡하는 건축물을 많이 설계해 왔을 뿐 아니라 자연과 건축,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 등에 관하여 여러 편의 수필을 남겼다. 일본과 한국을 주된 무대로 하여 작품 활동을 해오면서도 그는 항상 국가와 민족의 틀을 넘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한다는 의지를 감추지 않았다. 그의 장녀이자 아이티엠 건축연구소 한국지사장인 유이화 소장은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그가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가족과 성장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의 저서와 건축 관련 잡지에 실린 대담 기록을 참고하면서 그의 일생을 대강 훑어보고자 한다. 그는 생전에 ‘재일동포 2세’라고 하는 호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경남 거창 출신의 부모님을 둔 재일한국인 2세임에 틀림없다. 본명은 유동룡(庾東龍)이며 이타미 준은 예명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본명을 사용하다가 건축사무소를 내면서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유(庾)라고 하는 한자가 일본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일반 인쇄소에 활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타미(伊丹)라는 성은 그가 첫 번째 해외여행에 나갈 때 이용한 공항의 이름에서 따왔고 준(潤)은 예술가적 브랜드에 맞을 것 같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그는 생전에 우리말을 그다지 잘하지 못했다. 한국인 지인이 많은데다가 말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활동을 자주 하면서도 우리말을 듣고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말하는 것에는 어려움을 느꼈다.

   
▲ 재일동포 건축가 이타미 준 
그는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생후 얼마 안 되어 온 가족이 이사함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후지산(富士山)이 가까이 보이는 시즈오카현(靜岡縣) 시미즈(淸水)에서 자랐다. 일제말기 양철 지붕의 간이 주택 같은 허름한 집에서 온 식구가 같이 살았고 해방직후에는 집안에서 어른들이 밀주를 담그다가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그가 성장한 지역에는 대체로 보수적인 풍토가 강하기도 하여 조선인에게 차별과 멸시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훗날 어린 시절에 주위의 차별을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자신의 세계를 추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 회고를 남기고 있다.

그는 1964년에 무사시(武藏)공업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그가 이 대학에 입학한 것은 도쿄대학에 도전했다가 실패하여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다. 사립대학 가운데 비교적 수업료가 싼 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평소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미술학과가 아니라 건축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은 “그림을 그려서는 가난을 면할 수 없다‘는 부친의 반대가 크게 작용했고, 같은 지역 출신의 미술평론가 이시코 준조(石子順造, 1928-1977)가 건축학과 입학을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시코는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했으며 1950년대 후반 시미즈에 돌아와 유통회사에 근무하면서 미술평론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유동룡은 나중에 자신이 대학시절 불량학생이었다고 농담 삼아 회고할 정도로 그다지 성실하지 않게 학창생활을 보낸 것 같다. 재수생 시절부터 심취하게 된 재즈 음악에 이끌려 대학 재학 시기 내내 도쿄의 재즈 바를 여기저기 전전했다. 섬세한 예술 감각을 가지고 있던 그는 시미즈에서 의사 일과 함께 재즈음악 평론 활동을 하고 있던 우치다 오사무(內田修, 1929-)의 권유가 계기가 되어 재즈음악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취업하려고 해도 쉽사리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그가 희망하는 건축설계사무소에 자리가 별로 없었고 재일한국인 청년에게 일본 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취직을 기다리면서 아르바이트로 커피숍 설계를 하게 된 것이 훗날 그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고 한다.

1968년 31살이 되던 해 그는 伊丹潤 건축연구소를 설립하고 프로 건축가를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무소 개설과 함께 첫 번째로 그에게 건축설계를 의뢰한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다. 그가 데뷔작으로 설계한 ‘시미즈의 집’은 당대 유명한 사진작가 무라이 오사무(村井修, 1928-)의 카메라 렌즈에 실려 세상에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그의 작품성이 세상에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무라이는 김수근(1931-1986)의 건축물을 30년간 추적하며 모두 사진으로 담아내기도 한 인물이기도 하다.

1968년에는 그에게 또 하나의 중대한 일이 생겼다. 난생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자연 풍경을 직접 체험하고 이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흙이 살아있는 한국의 민가에서 그는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시골 마을의 조용함에는 흙의 냄새가 그윽했다. 그리고 멀리 뻗어있는 투명한 땅과 완만한 굴곡을 이루는 산기슭이 봄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뿌옇게 주변의 산하에 녹아있고 사람들의 기척조차 없는 고요함에 넋을 잃게 되었다. 집이 들어설 곳의 자연 풍토와 전통 추억을 아우르는 지역성을 중시하는 그의 건축에 대한 평생 꿈이 이때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후 그는 한국과 일본, 프랑스 등을 무대로 하여 열정적인 작품 활동에 몰입했다. 1975년에 도쿄 아오야마(靑山)에 ‘Trunk'라고 하는 건물을 지을 때에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해체되면서 나온 벽돌을 사용했다. 한국에서 벽돌을 배에 실어 옮기면서까지 번거로운 작업을 강행한 것은 소재를 중시하는 현대미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같은 해에 완성한 자신의 아틀리에 ’먹(墨)의 집‘에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공간에 조선 백자 몇 점과 조선시대 가구를 배열하여 명상에 깊이 잠길 수 있는 사랑채를 구성하기도 했다.

   
▲ 이타미 준이 설계한 제주도 포도호텔 전경
그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그는 재일한국인 1세 화가 곽인식(郭仁植, 1919-1988)과의 각별한 교분을 생전에 깊이 추억했다. 대학 졸업 직후 취직을 하지 못해 방황하던 시기에 당시 신문기자였던 누나의 소개로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한다. 곽 선생은 그를 친아들과 같이 여기며 첫 개인전을 열도록 주선했다. 그는 저서 ‘돌과 바람의 소리’(학고재, 2004)에서 “곽 선생이 없었다면 나는 미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을 것이고 건축가로서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분 없이 현재의 아타미 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내게 큰 영향을 끼친 그 분은 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게 언제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회고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다음과 같은 그의 언어에서 잘 엿볼 수 있다. “온갖 시각적 언어로 표현되고 있는 현대 건축에서 조형의 순수성을 획득하려면 작가는 그 토지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문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추출해야 하며 강인한 염원을 담은 조형 감각과 자유로운 시대정신을 겸비해야 한다.” 재일한국인으로서 그는 일본과 한국의 자연으로부터 작품의 모티브를 발견했다. 그가 일본에서 배운 것은 자연과 대화를 나누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는 건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배운 것은 자연과의 조화와 공존을 비롯하여 자연과 문화의 중간 지점, 즉 중용을 철학으로 하는 사상, 멋이라는 말의 정신적인 깊이와 다양한 의미 등 무궁무진하게 많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고미술품 수집과 건축 작업을 통해 일본과 세계에 한국의 미를 널리 알려왔다.

그는 일본과 한국에 무수한 작품을 남겨놓고 갔다. 그 중에도 제주 핀크스 골프클럽의 클럽하우스와 게스트하우스 ‘포도호텔', 그리고 '두 손 미술관' 등은 제주도의 토착성과 지역적 소재를 활용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지난 2009년부터 제주영어교육도시 개발사업과 관련하여 건축 총괄책임(Master Architect)을 맡기도 했다. 일본 위키 사전에는 그의 수상 경력이 다음과 같이 열거되어 있다.


1980년 일본 디자인협회상
1992년 GID Competition 우수상
1992년 National Oceanic Museum 국제 Competition 최우수상
2001년 한국 건축가협회 작품상
2002년 한국 명가 명인상
2005년 프랑스 최고훈장 레종 도뇌르 수상
2006년 UN HABITAT 주최 아시아 문화경관상
2006년 한국 김수근 문화상
2008년 한국 건축문화대상 우수상
2010년 村野藤吾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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