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종건 / 한남대 예우교수·전 서울경제신문 사장 ]

지난 2009년 2월에 국회를 통과한 재외국민투표법이 내년의 총선과 대선에서부터 시행됩니다. 이 법은 제안에서 제정에 이르는 과정에 기대와 함께 우려도 많이 제기됐습니다.

이 법에 대한 기대감은 지난 달 14일부터 17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인회장대회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이 대회에는 세계 80개국 284도시에서 400여 명의 한인회장들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습니다. 지난 2000년 창립 이후 최대 참가 규모였다고 합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이 회의를 세확산을 위한 기회로 십분 활용했습니다. 정당들은 당내에 재외동포 투표문제를 다룰 위원회 및 지역별 소위원회를 가동하고 있습니다. 또 의원들이 현지를 방문하는 기회를 이용해 자당에 대한 지지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700만 재외동포 가운데 유권자는 2009년 말 기준 230만 명 수준으로, 부산의 유권자수와 맞먹습니다. 대선의 경우 기십만 표로 당락이 갈리기도 했던 현실에서 무시 못 할 숫자입니다. 정당들이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법의 시행이 다가오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법적 기술적인 문제점과 함께 법의 취지를 살릴 수 있을까에 대한 근본적인 우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보완책을 강구한다고 했으나 별로 진척이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먼저 법적 기술적인 문제점을 보면 재외동포들은 유권자등록을 위해, 투표를 위해 두 차례 관할 영사관에 들러야 합니다. 한 예로 미국 시카고 총영사관의 경우 13개 주를 관할하고 있는데 관할 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 적지 않은 시간과 금전의 부담이 되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리 상으로 서울사람이 일본가서 투표하는 형국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부담으로 느껴지면 기권으로 직결될 것입니다. 국내에선 집 옆의 교회나 학교에서 행해지는 투표에도 기권율이 30~40%에 이릅니다.

선거법 위반에 대한 단속이나 처벌 절차에도 문제가 많다는 지적입니다. 공권력이 미치지 않아 불법행위에 사실상 속수무책인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참정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재외국민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한 점은 바람직합니다. 정치권이 가장 생색을 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공적 또는 사적인 이유로 해외에 나가 있는 내국인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문제는 이민자 가운데 아직 시민권자가 못돼서 영주권 상태로 있는 재외국민의 경우일 것입니다. 시민권자가 되기 전까지는 내국인 신분이므로 선거권에 제한을 둘 수 없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른 입법이었습니다만 외국을 생활근거지로 하고, 세금도 주재국에 내며, 국방의무도 지지 않는 사람에게 내국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는 게 특혜가 아니냐는 논란은 여전합니다.

과거 이민자들은 대개 경제적인 이유로 조국을 떠났습니다. 거기에 부패와 차별, 억압, 당파싸움, 지역감정 등에 대한 환멸이 덧붙여졌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떠나면서 고국을 다시 쳐다보지 않으리라 다짐한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민 와서 투표를 못하는 설움보다는 과거 국내에서 행했던 투표결과에 대한 환멸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지금은 이민의 동기도 다양해졌고, 내용도 달라졌습니다. 한국은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가 됐습니다. 이민자들이 수구초심(首丘初心)으로 고국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고국과 사업할 기회가 많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이민자들이 주로 선진국에 많이 산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도 있습니다. 거주국의 정치수준으로 투표를 행한다면 한국의 정치발전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재외국민투표법은 이처럼 정치·경제적으로 고국과의 유대를 발전적으로 지켜가는 촉매기능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국내 정치를 생각해 봅시다. 국회는 걸핏하면 몸싸움이요, 길거리 정치로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과 같은 국가안보 상황에 대해 여야 간에 견해의 일치도 못 보고, 사회에 만연한 권력형 비리부패는 재외국민들의 얼굴을 붉히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재외국민투표법이 그들의 잊고 싶은 과거의 악몽을 되살리는 기능만 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이 법의 취지를 살리려면 여야는 초당적인 기구라도 만들어 조국의 발전을 위해 교민사회의 투표동참을 권유하는 형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처럼 정당들이 향우회, 동창회 단위로 각개격파 식의 세 확산을 꾀하는 방식이라면 국내의 잘못된 패거리 정치를 교민사회에 오염시키는 것밖에 더 되겠습니까. 가뜩이나 세계적으로 반목과 질시로 내분을 겪고 있는 한인회들이 많다는 소식까지 들리고 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왕실은 소수의 영국이민자들을 하수인으로 동원해 독립반대를 획책 했다고 합니다. 정당들이 연고주의에 기반하여 교민사회를 국내정치에 이용하려 든다면 그런 우를 범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민은 시집가는 것에 비유됩니다. 이민자는 시집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친정 일에 신경 쓰다가는 시집에서 소박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시집에 정착해서 안방을 차지하는 것, 즉 주류계층으로 진입하는 것이 진정 친정을 돕고 편하게 하는 길입니다. 한미수교 이후 129년 만에 최초로 한국계 ‘성 김’ 씨가 주한 미국대사로 공식 지명된 소식을 접하며 그런 감회를 더하게 됩니다.

(제공 : 자유칼럼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