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경 /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 

필자는 지금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정지로 인해 ‘도쿄전력’이 대안을 제시한 각 지역 [계획 정전]의 제3그룹에 해당되기에 학교에서 교수회의 보고 후 학교 업무를 서둘러 마치고 불 꺼진 도로를 달려 귀가했다. 귀가 도중인 오후 6시 45분이 되자 갑자기 거리 전체의 불빛이 꺼졌다. 물론 승용차로 통근하는 터라 차량 불빛은 있었지만 신호등 불빛이 사라진 상황이라 경찰들이 직접 교통정리를 하였고, 그들의 신호를 받으며 일사불란하게 운전하는 많은 차들의 차분한 움직임 속에 무사히 돌아왔다.

현대 문명을 당연하듯이 향유해 온 터라 불빛이 없는, 그야말로 ‘부자연스런 현상(?)’ 속의 도시에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오늘따라 유난히도 거센 바람 탓에 꽃가루 알러지를 가진 필자로서는 방사능과 꽃가루를 씻어내려고 어둠 속에서 수도꼭지를 찾아 틀었다. 하지만 정전과 더불어 물도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목욕탕 욕조 속에 미리 받아놓은 물을 찾아서(지진이 많은 일본에서는 이런 경우, 많은 사람들이 욕조에 물을 받아 놓는다) 간단히 노출 피부를 씻고, 실내복을 찾아서 갈아입었다. 마침 봄이 되면 심각해지는 삼나무 꽃가루 알러지 현상에 대한 대응책의 계절이기도 하여, 언론에서는 후쿠시마 원전 방사선 유출에 대한 개개인의 기본적 대응책으로 꽃가루 알러지 대응책을 역설하였다. 즉, 마스크, 꽃가루 방지용 고글(선글라스), 귀가 후 옷에 묻은 꽃가루 털기, 모자 등을 사용하여 피부 노출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인데, 이것은 매년 봄마다 일본 곳곳에 무성히 자란 삼나무 꽃가루로 인해 알러지를 앓는 사람이 많기에 이미 익숙한 대응책이기도 하였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필자는 외출하면서 책상 위에 충전 해 두었던 컴퓨터를 찾아서 열었다. 노트북이지만 어둠 속 불 빛 치고는 상당히 밝고, 잠도 안 오는데 3시간을 견디기 뭐해서 최근에 겪은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려고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다. 물론 계획 정전은 각 지역마다 평균 3시간 전후로 그렇게 오랜 시간이 아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동북 지방의 지진해일(쓰나미-Tsunami, つなみ)의 희생이 되어 불빛도, 난방도, 개인적인 공간도, 제대로 된 음식도 옷도 없이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불편함에 불평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어떤 개인이나 조직의 영달을 위한 인내의 요구가 아니라, 자연재해로 인해 평소에 은혜를 입던 전력 회사의 송전 상태가 최악이 되었다는 현실과, 도호쿠 지방의 이재민들을 생각하면 물심양면의 협력은 물론, 이 정도 쯤은 모두 감수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시민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물을 배급 받기위해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일본 시민들.

그리고 대지진 이후 여야 양당의 정쟁을 초월한 협력과 헌신적 태도로 국가 위기 상태를 넘기려고 몇 날 며칠을 제대로 수면도 못 취한 초췌한 모습으로 사회의 안전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정치가들이나 언론인들의 필사적인 모습, 묵묵히 자신들의 일에 여념이 없는 공무원들이나 회사원들의 모습, 죽음을 각오하고 원자로 작업에 임한 기술자들의 희생이 무엇보다 강한 설득력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무수한 사람들이 희생이 되었지만,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피난시키거나 지키려다 죽음을 당한 경찰이나 공무원들도 적지 않다. 국민의 혈세를 받는 공무원들이지만 가족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자식이다. 그렇지만 사회적 정의감과 사명감으로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하다 죽어간 사람도 적지 않다는 뉴스는 이미 잘 아는 바이다. 그만큼 자신들의 위치에 대한 자부심은 물론, 자신들의 역할 및 사명 의식이 투철하고, 사회 전체의 질서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망각하지 않고 업무에 충실하니, 이런 비상사태에서도 사회 전체가 패닉 상태에 빠지지 않고 유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경제적 안정이 중요한 배경이 되는 것은 새삼 지적할 필요가 없지만, 지진 당시에도 편의점의 음식 구입 후 돈을 지불하기 위해서 그 긴 행렬을 기다리는 시민들의 모습은 결코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자신의 분에 맞는 절제된 양심을 그대로 보여준 높은 의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일본 사회는 참 융통성도 없고 원칙주의 우선 사회라 할 수 있다. 정이 없어 보이는 쿨한 사회라서 북적거리는 사회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사람 사는 맛이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최근에 와서야 그것이 안정된 사회적 질서의 반증임을 많이 느낀다. 물론 삶의 목적을 잃고 집에 틀어박혀서 사회를 등진 젊은 친구들(히키고모리)이 현대 사회의 문제는 되고 있지만, 그런 병리적 사례를 제외한다면 이번 이 대지진으로 인해 일본 사회의 저변에 깔려있던 인도주의적 인간성의 결속, 달리 말하자면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는 인도주의 의식’의 재발견의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원자로 문제가 불거지면서 극도의 불안 속에서 개인적인 사재기나 이기적 행동이 나올지 모르나, 필자가 1995년1월17일에 발생한 한신·아와지 대지진 때 느꼈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차분한 상황이 피부로 와 닿고 있다.
한신·아와지 대지진 때는 대학원 논문 제출 때문에 철야작업을 하고 있다가 엄청난 땅의 흔들림을 느끼고 밖으로 뛰쳐나갔었다. 여진의 간격이 조금 생겼을 때, 서둘러 뉴스를 켰으나 자세한 상황은 나오지 않았었다. 그러다 한참 지나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TV에서 믿기 힘든 불바다와 검은 연기로 휩싸인 고베 오사카 도시의 폐허를 보게 되었다. 일단 뭐가 일어났는지 정보 제공에 시간이 많이 걸린 셈이었다.
하지만 당시 소방부대나 경찰기동대의 구조 활동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데다, 자위대 투입에 관해서 주저하는 바람에 희생자가 늘었다는 빈축도 있었다. 또한 외국에서 협력하겠다는 손길을 처음엔 거절했던 것도 여론의 비난이 되었다. 다행이었다면 1923년 9월에 일어났던 관동 대진재의 유언비어로 민족 차별과 잔혹한 학살 같은 야만적 행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부유층이 살고 있는 아시야 지역보다 재일교포들이 많고 목조 건물이 즐비하던 나가다 지역이 처참히 무너졌다. 그 혼란 속에서도 재일교포들과 일본인들이 협력하여 힘든 상황을 버텼지만, 피해자를 노리는 도둑들의 움직임이나 가설 주택에서 지진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한 피해자가 많았다.

그 당시의 혼란 상황과 비교한다면 이번 일본 사상 최대의 지진은 신속한 정보 제공과 적절한 대처 방법이 다양한 소셜 미디어와 언론에 의하여 행해졌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휴대전화로 그런 상황 확인을 할 수 있었던 것이 혼란을 피하는데 큰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대지진으로 인해 생겨난 엄청난 피해 중에서도 긴급히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 동북 지방의 지진해일 피해에 대한 대응과,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의 1호기에서 6호기까지의 원자로에서 유출되는 방사성 물질로 인한 피폭 대책이다.
일단 지진해일로 삶터가 순간에 불모지로 바뀌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동북 지방의 이재민 구조와 복구를 위해 일본 정부는 자위대(1950년에 경찰예비대로 조직. 총 자위대 인원수는 24만 명. 교전권을 갖지 않는 전수 방위용) 10만 명 투입 결정과 경찰, 소방대원 등 가능한 한 모든 구조 인력 배치를 감행하고 있으며, 그들의 구조 활동으로 인해 현재 3만 명을 넘는 인명이 구조되었다고 한다. 희생자를 위해 세계 각국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고, 물에 잠겼던 센다이 공항을 빠른 속도로 복구하여 현재는 물자 공급의 중심 공항으로 활용하면서 복구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 다른 중요 문제는 절대 안전의 신화가 무너진 원자력 발전소의 ‘설마?’하던 일이 현실로 된 것이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도 도쿄를 비롯한 관동 지방을 위협하고 있다.
공포의 지진을 경험하고, 꽃가루 알러지와 방사성 물질 유출에 고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사태로 첨단 과학이란 미명하에서 이뤄진 원자력발전의 안전성이 무너진 가운데, 전력 공급을 위한 절대 안전의 대체 에너지가 없는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원자력 발전소에 대부분의 전력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번 사례를 보더라도 너무 리스크가 크다. 그러나 이미 첨단의 전기 사용 제품에 익숙해 있는 21세기 지구촌 사람들이 원자력 발전소에서 송전하는 전력 대신에 사용 가능한 대체 에너지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수력, 화력 발전소, 풍력, 태양열…모든 것이 미미한 상황에다 석유나 천연 가스 등의 자원은 이미 고갈 상태가 온다는 예측을 하고 있는 터이다. 어떻게 하면 안전하고 부담 없는 에너지 활용이 가능한지, 지구촌 전체의 시대적 우선 과제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사례로 인해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이다. 벌써 많은 기술자들이 원자로의 노심용융(멜트 다운)을 막기 위해 작업하다가 희생이 되었고, 지금도 사투중인 사람들이 많다. 시커먼 암흑 속의 미로와 같은 곳에서 격납용기의 압력계와 수위계 등의 고장으로 인해 연료봉이 노출이 되고 있고, 원자로 1호와 3호는 수소 폭발을 하였다. 시설 내 전원 확보가 가능해지면 방사선량이 높을지라도 조명을 사용하여 내부 대처를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도쿄 전력은 도호쿠 전력의 송전을 활용할 생각이지만, 사람이 파악하지 못한 자연 재해의 폐해로 인해 시시각각 상황은 바뀌고 있다. 게다가 광범위한 이번 지진의 여파인지 300년 동안 폭발 분화가 없었던 후지산(3776m)의 움직임도 화제가 되고 있어서 불안은 끊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민감하다 못해 패닉 상태가 되어 버리면, 사회 전체의 마비는 물론, 1억3천만의 분열로 인해 사회 붕괴를 초래할 위험조차 생길 수 있다. 그것은 곧 이웃 일본이라는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사회는 물론 국제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럴 때 일수록 상처받은 이웃을 격려하고 도와주며, 그 아픔의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파트너십을 발휘하는 것이 성숙한 문화 시민이 가져야 할 지구촌 공생의 태도일 것이다.

필자의 집 근처 초등학교에는 필자가 재직 중인 학교 출신의 교사도 꽤 있다. 필자도 잘 아는 어느 여교사는 어린 아이 셋을 키우면서도 지진 후에 아동들의 귀가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각 집을 방문하여 일일이 확인을 했다고 한다. 그녀의 집은 근무지와 꽤 떨어진 곳이건만 자신이 맡은 아동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밤까지 그렇게 다녔다고 하니 교사의 책임감도 새삼 느껴졌다.

곧 다가오는 18일은 필자가 재직 중인 도쿄 가쿠게이대학교의 학부, 대학원 졸업식이다. 매년 졸업식 후 사은 파티를 연례행사로 해 왔고, 때로는 퇴직한 명예 교수들도 졸업생을 축하하기 위해 참가하는 파티도 열린다. 하지만 교원양성은 물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교사’ 양성을 모토로 하는 학교로서 이번엔 졸업생과 교수들이 파티 회비를 거둬서 이재민을 돕는데 조금이라도 보태자는 의견일치를 봤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자그마한 일이지만, 졸업을 한다는 것은 사회를 짊어지는 약속과도 상통한다. 나 하나 배부르고 즐거우면 타인의 아픔이 보이지 않는 이기성이야 말로 사회를 망치는 원인이 된다. 모두가 나름대로의 역할을 짊어지고 성실히 살면 사회는 훨씬 매력적인 삶터가 되는 것이다.

이시하라 도지사가 ‘천벌’이라는 표현을 썼다가 철회와 사죄를 하였다. 많은 주검과 망연자실한 이재민의 멍든 가슴에 또 한 번 못을 박는 잔인한 언어폭력이 철회했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개념 없이 가장 안전한 곳에서 함부로 말을 내 뱉는 것은 무책임이자 희생자를 조롱하는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이해력과 상상력으로 상대방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조금이라도 용기가 되도록 배려하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역할이 아닐까?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온정이 우리 스스로를 따스하게 만드는 행복의 요소임을 잊지 말고, 이 재앙의 어둠을 헤치고 함께 미래를 걷는 한일 관계를 구축해 나가자.

- 2011년 3월16일 저녁 어둠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