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삼오 / 한국일보 호주판 편집고문 ]


새해가 밝아 온지도 벌써 한참 지났다. 새해 각 분야의 단체와 개인에게는 새로운 일이 기다리기 마련인데, 해외에 사는 필자의 머리에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세계 각 지역 한인사회의 대표기관으로 불리는 한인회의 장(長) 선거다.

시드니한인회도 27대 한인회 회장선거를 금년 6월로 예정해 놓은 상태다. 세계적으로 자그마치 400여 개가 산재하는 이 한인회들 가운데 분명 상당수가 1-2년 만에 돌아오는 회장 선거를 금년에도 치를 것이다.

해외 어느 지역이든, 한인 몇 십 가정이면 한인회가 존재한다. 한인회가 생기고 한인사회가 커지면 한인회관을 건립한다. 없다면 하나 마련하는 게 한인사회 숙원이다. 회한하게도 여기에 예외가 없다. 아마도 한국인의 피 속에 이어지는 조국애와 단체주의와 중앙집권에 대한 애착과 전통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제대로 기능을 하는 한인회의 필요성에 대하여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한인들이 거주하는 해외 어느 지역에서도 이들이 그 나라 시민이 되었다면 현지인과 똑 같은 권리와 의무, 영주권자일 때도 거의 비슷한 법적 지위가 부여되고 있지만, 이민자로서 여러 면에서 사회적 약자인 ‘우리’는 거주국 법 테두리 안에서 ‘우리끼리’ 힘을 모아 따로 해야 할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한인회가 단체 정관에 명기한대로 역할을 잘 해준다면 더 바랄나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어느 한인회든 간에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회장 선거 때가 되면 거창한 구호가 난무하고 요란한 것은 대부분 해외지역이나 고국 모두 같다. 그러나 그 후에는 달라지는 게 없다. 실상 그 한인회는 고국 정부의 충복으로서는 몰라도 그에게 맡겨진 커뮤니티의 발전을 위한 견인차 역할은 못한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역시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한인회가 하는 일이란 연예기획사에 맡긴다면 더 잘 할 것 같은 ’한인의 날’ 등 축제와 행사 주관과 대내외적 의전이 거의 전부다. 언젠가 뉴욕 타임즈가 한인회장 자리를 ‘세레머니얼 포스트’(ceremonial post)라고 부른 게 그것 아닌가.

해외 거주 한인들의 규모가 남한 인구의 10%를 상회하고 있으며, 한국정부가 말하는 대로 이들의 국익에 대한 잠재적 기여가 그렇게 크고, 이들 사회의 지도자들 또한 그 점을 고국을 향하여 강조하는 마당에 이 분야에 대하여도 문제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과 연구, 그에 따른 종합적인 대안 제시와 구성원 간 합의를 위한 활발한 교육과 보도가 있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이 분야의 보도는 늘 사건 중심, 단편적인 게 특징이며, 그것도 마이너 매체에나 실릴 뿐이다. 연구는 더더욱 그렇다. 필자는 호주 시드니에 살고 있으므로 자연히 1차적으로 여기 현장 경험이 바탕이 되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필자가 직접 가보았거나 매체보도(특히 세계한인신문)를 통해 알게 되는 미국 등 대표적 해외 한인사회와 한인회 및 유관 단체들의 현황과 문제는 거의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공통분모가 많다. 이 글의 대상은 주로 해방 후 이민으로 조성된 호주,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서방지역의 한인회와 한인사회에 대한 것이다.


대통령학(大統領學)

미국풍을 따라서인지 요즘은 독자적인 이론의 정립(학술 영어로는 theoretical model, theoretical formulation, theoretical construction theory building 등 용어가 많다) 없이도 실용과 취업 전망만 좋으면 학문으로 불린다. 여성학, 이민학 또는 소수인종학(ethnic studies)에서부터 듣지도 못했던 의상학, 화장학, 카지노학, 꽃꽂이학, 승마조련학, 장례지도학, 박물관학, 심지어 바둑학과까지 생겨났다.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대통령의 권력과 백악관, 혹은 청와대의 정치를 따로 연구한다면 당연히 대통령학(presidential studies), 청와대학이라고 불리고도 남는다. 실제 미국에서 그것으로 학위를 받아 한국에서 대학 교수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통령의 권력(대권), 얼마나 막강한가. 그리고 대통령과 백악관(또는 청와대)의 여러 비서실장과 그 스태프들이 휘두르는 권력과 이들이 직간접으로 주무르는 나라 돈의 규모가 얼마인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그 권력 측근과 청와대와 주변 실세들이 한창 잘 나갈 때 받은 뇌물 사건으로 얼마 전까지 한국이 들끓었었다. 그래도 그 정권은 비교적 청렴했다고 생각되니 과거 역대 대통령과 청와대 고위직 인사는 어떠했겠는가)

그런데 서울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한인회장대회 참석자를 보면 각 지역 실세(?)인 한인회장과 지도급 인사들의 수가 400-500명, 그들이 대표하는 나라와 지역을 생각하면 대단하고 막강하다. 그렇다면 그 한인회에 대하여 자료와 지식을 모으고, 더욱 이론화 작업을 시도해본다면 ‘한인회학이 성립될 법한데 ‘역시나’이다. 한 가지 요건이 모자란다. 거기에는 권력과 돈이 없고, 취업 전망이 현재로선 전혀 없다. 그래서 이 분야에 전문성과 전문가는 아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결과는 뭔가? 약간의 지역 차이는 있겠지만, 이들 한인회장은 밥벌이는 딴 데서 하고 직함 하나 필요해서 나온 ‘인물’이고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자칫 그의 하수인, 한인회는 이들의 병정놀이 터로 받아지기 쉬운 것이다. 이 불행한 이미지를 불식시키지 못하고는 어느 지역 한인사회, 어느 한인회든 개혁은커녕 변화와 발전은 없다.

필자가 자주 쓰는 시드니 한인사회나 한인회의 문제에 대한 글을 보고 “박사님은 교민사회를 너무 걱정하시는 것 같습니다”라며 나를 딱하게 여기는 젊은이들이 몇 있었다. 아무리 글을 써도 이 사회는 한 치도 안 바뀐다. “내버려 두어라, 개인적으로 득이 뭔가, 과연 배운 게 있고 능력이 있다면 더 큰 과제를 가지고 놀지, 좁은 한인사회인가”라는 일부 조소 섞인 뜻일 수 있다. 이해하고도 남는다.

아닌 게 아니라, 유학을 가서 대통령 권력, 한반도 주변 정세, 한미관계, 이론경제학을 연구하고 고국에 돌아와 대학에 자리 잡고, ‘조중동’ 칼럼에 자주 나타나 지명도를 높이든가, 대선 캠프에 들어가 두뇌 노릇을 하면 일약 국회의원, 외교통상부장관, 통일부 장관, 경제 관련 각료, 대사로 발탁 되어 저명인사, 거물급 인사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별 볼일 없는’ 한인회에 대하여 자료를 모으고, 안달한다면 얻는 것이라고는 왜소한 이미지뿐인 것이다. 하지만 영특하고 눈치 빠른 사람들이 모두 그런 굵은 것만 바라보고 줄서기를 한다면 우리 사회와 민족은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해외 한인사회와 같은 변방 지역사회는 늘 발전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해외에 이민 와서 자신의 노력으로 거주국의 주 상원의원, 행정부 국장, 대학 교수, 특히 학장 정도의 위치에 오르면 고국에서 봤을 때는 대단한 인물이고 성공 사례다. 고국 정부나 현지 한인사회가 모셔다가 강연도 듣고 칙사 대접을 하는 게 당연하지만 이들은 본연의 업무에 너무 바쁠 뿐만 아니라 거주국 시민이다. “나는 코리아를 위하여 뭘 어떻게 하겠다”는 등의 말을 할 수도 없고, 실제로 대개 무보수로 일해야 하는 현지 한인사회에 나와 명예직은 몰라도 실질적으로 책임이 주어지는 중요한 일을 맡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왜 또 한인회인가?

왜 한인회가 중요한가를 또 한 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 긴 글의 의미가 분명해 질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 한인회의 문제는 한인사회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해외 한인사회의 문제는 상당 부분 고국인 대한민국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식, 비공식 임무로 한인회를 찾는 사람은 거창한 기구와 장 자리, 번듯한 건물과 사무실보다도 그 단체의 실질적 역할과 기여, 그에 따른 혜택을 체험해보고, 그것으로 전체 한인사회의 저력과 수준을 가늠하게 된다.

한인회가 취약하다면 한인사회가 취약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한인사회는 훌륭한데 한인회만 엉망일 수는 없다. 한인회가 잘 운영되지 못한다면 한인사회의 자율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흔히 많은 교민들이 ‘한인회가 뭘 하든 관심 없다’고 말한다. 한인회가 대외적으로 망신당하면 자신들도 덩달아 망신당하는 것인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드물다. 이게 ‘한인회의 문제=한인사회의 문제’이기에 한인사회가 잘 되기 위해서는 한인회 역할이 중요하고, 역으로 한인회가 잘 되기 위해서 한인사회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첫째 이유이고 포인트다.

둘째 이유 설명은 좀 길다. 시드니의 경우 시드니, 더 넓게는 호주 한인커뮤니티는 누가 뭐래도 우리가 삶의 둥지를 튼 제2의 고향이고 고장이며 극히 일부를 빼고는 삶의 터전과 소득원이 역시 여기에 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의 다른 민족, 즉 본사에서 파견 나온 상사직원들로 된 일본인들의 호주, 미국, 또는 캐나다 커뮤니티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그 둥지와 고향과 고장부터 먼저 잘 가꾸어야 우리 자신과 후손들이 잘 살 수 있고 고국과 다른 커뮤니티로부터 인간 대접을 제대로 받을 것이다. ‘내 손안에 있는 한 마리의 새가 숲 속의 두 마리 보다 더 값지다(A bird in the hand is worth more than two in the bush)’는 영어 속담과 같은 이치다.

처자식은 헐벗게 놓아두고 번지르르한 옷치장을 하고 고급 자동차를 타고 밖으로 나도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해외 한인커뮤니티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속하는 커뮤니티는 내팽개친 채 고국에 나가서 뽐내고 다닌다면 우스운 일이다.

대중매체는 질이 높고 낮고 간에 한 사회의 거울이다. 해외 한인사회 대부분 교포매체를 보면 여기 사회의 여러 가지 숨겨진 기막힌 고충을 알게 된다. 그 하나는 매체의 지면과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많은 영세한 생계형 비즈니스가 내는 광고다. 거기에 나오는 문구들을 읽어보면 처절한 생각이 든다.

좁은 교민 시장을 늘리는 정책이나 노력은 없고 모두가 파먹으려 한다면 모두가 크지 못하는 도토리 키 재기가 될 수밖에 없다. 새로 진입한 업자가 공격적으로 광고를 크게 내서 고객이 그쪽으로 몰린다면, 그만큼 다른 업자의 고객은 줄어드는 게 오늘의 사정이다. 그야말로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 아닌가.

어떤 교민 경제학 교수는 “해외 한인사회는 지지고 볶고 하다가 시간이 가면서 자연히 발전하는 것이니 내버려두어도 된다”고 말한다. ‘아담 스미스’적 견해이다. 그게 맞는다면 왜 한인회와 같은 기구가 존재하며, 그 수장 선거 때가 오면 거창한 선거관리위원회를 가동하는 등 온 커뮤니티가 난리법석을 벌여야 하는가?

여기 한인사회는 큰 돈벌이 시장도 큰 표밭도 아니다. 교포 참정권 시대가 오고 있지만 필자는 여기에 크게 기대를 걸지 않는다. 정치인들이 누구인가? 이 사회가 지금대로라면 약삭빠른 정당인들은 무성한 공약(空約)으로 얼마 안 되는 표나 굵어 가고, 거기에 매달리는 교민의 품위는 추락되고 허탈감만 남을 공산이 크다. 이는 호주 정치인들과의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이민자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외면당하기 쉬운 커뮤니티(the most neglected communities in the world)’라는 학자들의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여기 호주정부만 해도 이민부가 주관하는 정착 서비스 및 지원과 정치적 립 서비스 말고는 이민자 사회를 질적으로 격상시키기 위한 별도정책은 없다. 해외 한인사회의 문제는 자체의 지력과 재력으로 자율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런 환경과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다. 첫째 발전을 자극할 공금이 없다. 한인 회비를 징수할 공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금이 잘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한인회와 한인사회 대한 연구, 분석의 필요성을 언급했지만 자체적으로는 어림도 없다. 한인사회에 남아 있을 관련 분야 전문인이 없다. 한인2세는 물론 유학생도 공부를 마치면 한인사회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단체나 재정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서울에서는 재외동포재단, 학술지원단체와 대학 등의 지원으로 재외동포 관련 연구나 학술대회 사례가 과거에 비하여 늘었지만 보도되는 결과를 보면 필자에게는 현지 실태와는 너무 먼 달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