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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미국의 자존심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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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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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2.22. 한국일보 <편집국에서> / 고태성 국제부장 ]


"컵에 물이 절반 정도 차 있다."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작년 12월 바레인을 방문했을 때 했다는 말이다. 클린턴 장관이 이런 비유를 한 것은 바레인의 정치적 상황을 전향적,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뜻을 담기 위해서였다.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컵의 물이 줄어들지 않고 불어나면서 반을 채웠다고 본 것이다. 클린턴 장관은 보다 직설적으로 "모든 분야의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면서 "바레인의 변화는 중동이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변화보다 훨씬 크다"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소수인 이슬람 수니파가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시아파를 지배하는 군주국가 바레인이 보여준 실제 변화는 '퇴행적, 반동적'이었다. 지난해 여름 수십명의 시아파 지도자들이 체포된 데 이어 민주화 활동을 해온 인권운동가와 변호사들이 줄줄이 투옥됐다. 지난해 10월 치러진 총선에 대해서도 부정선거 시비가 잇따랐다. 컵의 물이 채워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새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클린턴 장관이 이런 실정을 몰랐을 리 없다. 그의 '컵속의 물'발언이 오판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미 5함대 주둔지인 바레인의 안정을 우선시해 현실을 호도한 것에 가깝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미국은 튀니지에 이어 이집트에서 본격적으로 민주주의의 새 역사가 쓰여지기 시작했을 때에도 '오판'과 '호도'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이집트 반정부 시위 초기에 미 행정부에서 "이집트 정권은 안정적이다", "무바라크는 독재자가 아니다"는 등의 얘기가 나온 것이 대표적 예다. 미국은 이렇게 머뭇거리며 시간을 끌다가 그들이 자처해온 민주주의 가치의 수호자임을 증명할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는 이후에도 계속 한 박자나 반 박자씩 늦는 일이 되풀이됐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지난 16일 중동지역 민주화 시위에 대한 폭력적 진압시도를 경고하면서 이란은 거명했으나 바레인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클린턴 장관이 "바레인 당국의 움직임을 심각히 우려한다"며 '사후약방문'을 낸 것은 17일 새벽 바레인 경찰이 시위대 강제해산 작전을 벌여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나서였다.

구겨진 미국의 자존심은 회복이 어려워 보이는데 다소라도 만회해 보려는 시도들에도 큰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이집트 무바라크의 퇴진 이후 미 행정부에서는 백악관과 국무부간 불화설이 흘러 나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무바라크의 퇴진을 앞당기려 했지만 중동의 안정적 관리라는 현실적 필요를 앞세운 국무부의 반대로 정책결정이 실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독재자를 옹호하려 했다는 불명예로부터 오바마 대통령을 분리해내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착안이지만 이렇다 할 근거가 제시되지는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해 8월에 이미 아랍권 정세보고서 작성을 지시했다는 보도도 일종의 '오바마 구하기'에 해당한다. 보고서는 전면적인 정치적 변화가 없다면 바레인부터 예멘까지 아랍권 국가들에서 대중적 봉기의 분위기가 팽배해질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보고서가 오바마 대통령의 '선견지명'이 될 수 있었으려면 아랍권에서 시민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전에 미국의 영향력에 의한 뭔가 의미 있는 변화가 진행됐어야 했다. 미 뉴욕타임스는 최근 미국의 지식인 진 샤프 박사의 저서 '독재에서 민주주의로''비폭력 저항방법 198개' 등이 이집트와 튀니지의 반정부 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주장했다. 그래도 이것이 미국의 자존심을 다독거리는데 그 중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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