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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와 중동, 유럽의 가교 이집트 기행 (4)
이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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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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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관광객에게 낙타를 태우는 베두인족
그 뒤, 6세기경에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사막 원주민인 베두인(Bedouin)족의 습격을 막기 위해 요새와 같은 수도원 창건을 명했다고 하는데, 좁은 바위 계곡의 1570미터에 자리 잡은 이 수도원의 특징은 기독교를 나타내는 교회(그리스 정교회 소속)와 이슬람의 모스크가 붙어 있고, 그 건물들을 둘러싼 높은 벽(성벽 같다)은 유대교 방식이라고 한다. 즉, 사막 속에서 생겨난 원류를 같이 하는 유일신을 모시는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의 세 종교가 하나의 수도원을 이루고 있는 평화적인 시설물이라고 할까? 실제로 이 수도원은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지만 1500년 이상 그 어떤 무력이나 자연 재해를 받지 않고 당시의 상태를 잘 유지 보존하고 있고, 매일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의 미사를 빠트린 역사가 없다고 하니 참으로 평화롭고 성스러운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좁은 문들을 지나서 수도원 내에 들어가면 떨기(덤불) 나무를 쉽게 볼 수 있도록 마련된 2층 전람실 반대편의 전망대로 가서 나무를 보았다. 종교적 전설이 없다면 그냥 무성한 나무일뿐이다. 수도원에서 주차장으로 내려오다 반대편 산에 보면 바위 밑으로 현지 주민들의 마을 같은 것이 보이는데, 그 곳에도 풀이 무성하게 나 있었다. 그렇기에 필자로서는 단순히 오랫동안 살아온 풀 더미처럼 보였지만 성스런 교회 내에서 오랜 세월 견뎌 나왔기에 신비성을 곁들여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성스러운 나무로 알려지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보기에도 멀리서 온 듯한 성지 순례 단체가 오기에 필자는 돌아서서 나왔다. 중간에 벽화가 벗겨진 자그마한 기도실이야 말로 초기부터 있었던 챠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역사를 느끼게 하였다. 그 뒤, 전람실에 들어가서 성화상이나 5-8세기의 성서 사본, 기증된 과거의 유산이나 손으로 곱게 짠 그림 등을 보았다. 이런 성서 사본이나 성화상이 2천장 이상이 보존되고 있다고 하니 인류사의 자산으로 잘 보존 되어 가급적이면 좋은 상태로 남길 수 있도록 디지털 기록이 가능하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물론 종교적 자료이기에 신비성을 곁들이고 보호되어야 할 부분도 필요하겠지만, 빛을 보지 못하는 자료가 자칫 훼손이 된다면 그 또한 자료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가 아닐까? 단순히 벽에서 발견된 [시나이 사본]이란 성서 사본이 러시아로 갔다가 대영 박물관에 10만 파운드에 팔려서 지금은 대영 도서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그런 재산적 가치보다 수많은 기독교 신자는 물론, 서양사/비교사/역사/종교사 등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개하고, 종교를 통해 삶의 인도를 받고 평온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위해 공개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본에서는 지금 박사 논문의 디지털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세계 어디서나 타인의 연구도 보고 자극을 받아서 활용을 할 수 있고, 보존 유지도 편리하게 가능하다면 후학이나 관심 있는 테마를 연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정보 제공이 될 것이다. 물론 학술적 의미와 종교적 의미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 성 카트리나 수도원 내부의 벽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교회에 들어가니 몇 백 년이 넘는다는 오래된 문이 2중으로 보인다. 처음 문에서 두 번째 문 사이의 공간에 성초를 붙일 수 있는 공간이 준비되어 있다. 실내는 사진 촬영이 금지다. 멀리서 온 사람들인지, 교회입구에 설치된 성초에 불을 붙인 뒤, 벽에 걸린 성녀 카트리나의 그림을 보며 감동적으로 기도를 올리거나, 발 등의 그림에 키스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아프리카의 단체도 와서 기도를 올리는 것을 보고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다.

이 교회 안 예배당에는 12사도 혹은 1년 12개월을 의미하는 12개의 기둥이 있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아이콘(Icons)이라 부르는 성화 상을 비롯해 많은 성화가 보관되어 있다. 천정에는 원형 성화상이, 정면에는 성자를 나타낸 거대한 모자이크 작품이 걸려 있다. 종교적 성지 순례의 단체는 예배당 오른쪽 통로로 들어갈 수 있었으나 우리는 예약된 성지 순례자가 아니라서 교회 내부를 본 뒤, 왼쪽 일반인 통로를 통해서 관람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 자체는 필자가 영국이나 이탈리아를 먼저 본 탓인지, 바티칸, 피렌체, 시에나, 베네치아, 밀라노 등지에서 보았던 두오모나 성당의 천정화와 비교하면 의외로 소박하고 투박한 성화가 많았다.

그러나 바위계곡에 덩그러니 세워져 1500년의 길고도 긴 역사를 지켜 온 수도원의 존재 자체가 성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종교 단체나 개인으로서 차를 빌려서 현지에서 허가서를 받지 않으면 쉬이 갈 수 없는 곳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 곳이기에 다른 관광지를 다니듯이 쉬이 다닐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 성 카트리나 수도원은 수도사들을 위한 수도원이고, 역사 속의 수도자들이 잠드는 경건한 장소일 수밖에 없는 곳을 경제적 현실에서 외부인을 받아들이는 곳임을 이해하고 차분히 구경해야 하는데, 역시 관광객들이 많다 보니 질서 정연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타문화의 존중, 그건 향후의 격조 높은 문화 교류를 위한 기본적 자세이자 타문화를 돌아보는 관광객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매너임을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졸부처럼 자기 문화 우선주의에 기인한 태도나 물질 공세로는 결코 통용이 안 되는, 타인의 정신문화도 존중하는 내실이 성장하는 문화권의 필수 기초 교육이 될 것이다. 필자로서는 바티칸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서 사본이나 성화상 등을 보존하고 있는 도서관 등을 보고 싶었으나 비공개였고, 설혹 그 것을 본다 하여도 라틴어 등이 능숙하지 않기에 되레 귀중한 사료를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자성도 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다 매점에 들어가서 몇 권의 책과 기념품을 조금 구입하였다. 의외로 이탈리아나 영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제품들이 많았다. 오면서 봤던 많은 현지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서 이곳에서 나오는 제품으로 특산품을 개발하여 현지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그 지역 토지의 물건을 제공할 수 있다면 일석 다조 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비쇼이에게 그런 말을 하니 자산가들의 기술학교 제공 등의 인프라 정비가 안 되어 있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다음 날, 우리는 현지 사람들과 만나서 어우러지는 프로그램에 참가 하였다. 카이로에서 만났던 런던의 신혼여행 부부를 우연히 같은 호텔에서 만나서 베두인족과 함께 하는 저녁 시간이 상당히 좋았다고 추천을 받은 것도 있지만, 현지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싶기도 하여 그 기획에 참가 하였다. 오후 즈음에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갔더니 베두인족들이 낙타를 몰고 와 있었다. 낙타를 처음 타 보면서 해가 넘어가는 사막을 잠시 가려니 사막의 바위 뒤에 마을이 나왔다. 어린 아이들도 낙타를 잘 탔었다. 옥스포드에서 온 가족 팀들과 함께 갔더니 소박한 빵을 바위 위에서 구워주는데 그런대로 베두인족의 차와 어울렸다. 그러고 나서 음악을 듣고 저녁 식사를 하고 나니 베두인족이 만들어 판다는 기념품 판매 시간도 있었다. 이것만큼은 필자도 잘 못 구입했었다. 사용할 만 해서 학교 직원들 선물용으로 구입했지만 촛불 밑에서 보던 것과 달리 밝은 불 빛 아래에서는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니었기에 씁쓰레한 기분만 남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발상의 문제. 선물을 구입하려고 지불한 것은 이 곳 아이들이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돈이었으니 조금이나마 공헌을 한 것이라고 위로를 했다. 정말 어린 아이들조차 학교보다도 낙타 태우기에 진력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만나면 모두 착하고 맑은 눈망울이고 친절하다. 그런 아이들이 가난이란 이유만으로 생활도 생각도 많이 어긋난다면 그 환경을 탓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기본적인 교육 환경이 되어 있다면 걔들도 굳이 그런 일들을 좋아할까? 둥근 나무에 3줄을 매단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기에 즐기다 보니 밤이 왔고, 일행들은 사막으로 걸어 나갔다. 세상에 그렇게 아름답고 조용한 밤이 있을까? 별이 너무나 총총했고, 둥근 달이 고요히 사막의 바위 산 위로 떠올라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 곳에 천문학을 한 전문가가 와서 쥬피터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천체 망원경으로 쥬피터를 보여줬고, 그 옆의 별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 줘서 우리가 뭔가 잊고 살았던 대 자연과 우주의 신비함을 고고히 떠 오르는 달 빛 속에서 한참 즐겼다.

필자가 태어난 서울의 어린 시절엔 별 빛이 참 아름다웠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서울의 별 밤을 본 기억이 없었다. 달빛도 기억이 아련했다. 비록 일본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서울에는 자주 간 편이었다. 그런데 서울의 밤이 기억이 없었다. 물론 밤에 하늘을 바라볼 여유도 없이 과로로 일찍 잠들었던 탓도 있겠지만 이렇게 영롱히 반짝이는 별 빛도, 아름다운 달 빛 속의 고요함을 느낀 기억도 없었다. 그렇기에 고요한 사막에서 눈부실 정도로 빛을 발하던 달과 별의 아름다움이 계속 가슴에 남았다. 그리고 베두인족들이 경제적 윤택함은 없을지 모르나 참으로 부유로운 자연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크고 있다는 생각도 했고, 단순히 물질만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거만한 잣대에 대해 진심으로 일방적인 잣대였음을 자성하였다. 그들은 내가 향유하지 못 하는 대자연에 안겨서 살고 있으니 분명 내가 그리워도 못 보는 이 풍경을 만끽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쇼이의 말에 의하면 사막에서 숙박도 하는 기획도 예정하고 있다고 한다. 언젠가 정세가 안정이 되면 필자는 룩소르와 샤름 엘 셰이크, 무엇보다 베두인족의 마을에서 밤을 지새우고 싶고, 시나이 반도를 다시 한 번 천천히 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중동과 아프리카, 유럽을 잇는 이집트의 여정을 마치고 다음 날 우리를 처음부터 안내 해 줬던 Trail finder의 가이드가 공항에서 수속을 해 주기에 샤름 엘 셰이크에서 카이로 공항으로 돌아 왔다. 무엇보다도 우리랑 같이 여행을 했던 카이로에서 만났던 신혼부부들은 폭설로 돌아갈 수 없어서 5일간을 호텔에서 더 묵고 가는 형편이었기에 우리도 케임브리지는 무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샤름 엘 셰이크에서 비행기가 연착은 했지만 카이로 공항에는 무사히 왔고, 혹시 런던 행은 불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카이로에서는 No Problem이라고 단언을 하기에 영국행 비행기를 안심하고 탔다. 비행기 속에서 몇 편의 영화를 보면서 따스했던 이집트 각지의 추억을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였다. 이미 밤11시를 넘는 상황이었다. 내리니 히드로 공항에는 눈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 현실이었다. 가져갔던 코트로 중무장을 하지만 역시 추웠다. 게다가 이 교수와 함께 케임브리지로 돌아오니 무릎이 시리고 떨려올 정도로 추웠다. 우리는 숙소가 다르기에 케임브리지 코치 스테이션에 내려서는 서로 안녕을 한 뒤, 그 곳에 와 있던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갔다. 새벽까지 공부를 하던 옆 방 아가씨가 화색을 하면서 반겨주기에 인사를 한 뒤, 히트를 켜고 여독을 풀었다. 케임브리지가 춥게 느꼈지만 그래도 영하 3-4도란다. 샤름 엘 셰이크를 출발 할 즈음에는 20도 전후였다. 서울에서 친구가 영하 16도라며 무척 춥다고 전한다. 도쿄는 영하 2도라고 한다.

   
▲ 베두인 족과 함께한 이수경 교수
모두 다른 환경, 모두 다른 문화…그러나 우리는 조금씩 그 상황을 이해하며 서로의 좋은 문화를 즐기며 우리의 단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을 풍요롭고 가치 있게 향유하려고 한다. 환경이 달라도 그 환경에 적응하려고 정보력도 많이 입수를 한다. 그런 면에서 이집트에서 본 물질 중심주의적 환경은 동남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고, 필자가 어릴 때 한국에서도 봐 왔던 풍경과 오버랩 된다. 우리도 사회의 개선을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르며 각고의 노력을 해 왔고 지금은 한류 문화의 선진 문화 발상지가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복지문제와 평화 인권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 문화에 대한 성찰과 발전을 모색한다. 이집트의 움직임도 우리가 걸어 온 전철을 답습하며 자신들의 삶을 보다 민주적이고 풍요롭게 살기 위한 사회로 거듭나려는 산통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듯하다.

부디 평화적이고 세계적인 움직임과 다양성도 인정하며 자신들 고유의 문화를 계승하고, 교류적인 국제화 사회의 현실을 받아들여서 더 발전적이고 안정적인 사회가 되길 진심으로 빌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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