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경 교수 / 도쿄가쿠게이대학, 캠브리지대학 방문 교수 ]

     'guy'의 원어가 된 가이폭스와 불꽃놀이의 캠브리지 밤

▲ 400년 전통의 장작태우기 풍습-가이폭스 데이

영국에서는 11월5일되면 400여 년간 이어온 전통적인 풍습인 불꽃놀이와 산더미처럼 쌓아올린 장작 등을 태우는(fireworks and bonfires night) 가이폭스 데이(Guy Fawkes Day)가 펼쳐진다.

1605년에 로마 가톨릭교도를 탄압하는 제임스1세 왕을 암살하려고 가이폭스 등 13명의 카톨릭 신자들이 36통의 화약통을 설치하여 웨스트민스터 궁전(국회의사당) 개회식 날 폭파를 계획했으나 밀고로 인하여 11월 5일 미명에 사전 발견된 이 사건을 화약 음모사건(Gunpowder treason Plot)이라 한다.

화약에 불을 지르기 위해 국회의사당 지하실에 숨어 있던 가이폭스 등은 다음 해 1월말에 반역죄 등의 대역죄로 공개 처형(Hanged, drawn and quartered; 매달아서 사지와 성기를 찢고 참수하는 아주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 능지처참과 비슷함)을 당했다.

영국 정부는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였다고 하여 매년마다 이 날을 기념하여 전국에서 불꽃놀이를 하거나 가이폭스의 인형 같은 것을 태우며, 오랜 세월동안 왕권에 대한 저항적 반역적 행위를 엄두도 못 내도록 국민들에게 널리 의식을 심어온 것이다.
그래서 이 날은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Guys라고 불리는 인형(effigy)을 들고 다니면서 동전을 달라고(a penny for the guy)외치며 거리를 활주하는데, 가이폭스 인형은 너덜너덜한 넝마 같은 옷을 걸친 지저분한 인형이 일반적이라서 대역죄로 죽어간 가이폭스를 비유한 ‘guy’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지금 사용되는 guy의 원어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이 용어가 남성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이미지화 되어 있는데, 1950년에 나온 Lonely Place라는 영화 속에서는 ‘She is a good guy’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했고, 지금도 영미권에서는 여자 친구들한테도 ‘애들아!’하는 식의 ‘Hi, guys!’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가이폭스 데이를 즈음하여 약 1주일 정도는 일반인들의 폭죽놀이도 용인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자그마한 도시 캠브리지의 곳곳에서 밤늦게까지 폭죽소리와 불꽃 터지는 소리가 나는 탓에, 캠브리지의 지인들은 시끄러워서 연구 집중을 못 하겠다고 연락을 주기도 한다.

▲ 비오는 날 펼쳐진 불꽃놀이 야경

필자는 오랫동안 일본에서 살면서 주로 여름철에 불꽃놀이를 경험해 왔기에 겨울이 다가오는 11월의 불꽃놀이에 대해 약간 흥미를 가졌다. 그래서 금요일 저녁 불꽃 소리가 나기에 비가 내리는 저녁 무렵에 우산을 들고 어두워진 시내로 향했다. 한적한 주택지인 우리 동네에 사람이 그토록 많은 것을 처음으로 느끼면서 그들과 더불어서 잠시 걸었다. 하지만, 버스 정류소 근처에 이르자, 평소에는 지독히도 시간을 안 지키는 시티 버스가 마침 왔기에 얼른 리턴(왕복표)을 끊고서는 트리니티 칼리지 앞까지 갔다. 어둠 속에 내렸지만 수많은 캠브리지 대학의 학생들이 불꽃놀이가 열리고 있는 지저스 그린(Jesus Green)으로 향하면서 샤우팅을 즐기고 있었다. 학교 축제와는 다른, 무엇보다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그들의 전통 문화에 참가한다는 의미가 강한 듯이 모두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캠브리지 대학은 몇 개의 넓은 잔디밭에 둘러싸인 곳인데, 필자가 옥스퍼드 대학보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지저스 그린을 2년 전에 방문 했을 때 눈부실 정도로 푸르고 아름답게 나를 맞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올 8월에 이곳의 숙소에 짐을 숙소에 내리자마자 찾아간 곳이 지저스 그린과 캠강이었다.
넓은 그린과 캠강이 어우러지고, 곳곳에 어둠을 밝혀주는 불빛과 더불어 가을 밤비 사이를 뚫고 하늘에 온갖 모양새를 뽐내는 불꽃을 아름드리나무들 사이로 보는 것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맑은 날씨도 아닌 빗속이건만 사람들도 많았고, 햄버거 등을 구워서 파는 이동식 판매차도 많이 나와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에 맞춰서 유원지 시설도 정비되어서 현란하게 각종 놀이 기구가 돌아가고 있었다.

▲ 캠브리지대 의약대 캠퍼스

불꽃놀이가 거의 끝날 무렵, BBC 캠브리지 라디오가 주변 은행이나 대학 출판사 등, 22개의 스폰서를 받아서 오늘 이 행사를 진행했다는 안내를 하고 있었다. 불꽃놀이가 어느 정도 끝나자 가운데 마른 나무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곳에 불이 지펴졌다. 장소에 따라서는 이 불에 가이폭스 인형을 태우기도 하는데, 캠브리지에서는 그냥 쌓아놓은 나무만 태웠다(bonfire).
다른 행사는 없이 단순히 그 불이 다 타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그 사이 사이로 노란 야광 오피셜 옷을 입은 사람들이 큰 통을 갖고 다니면서 도네이션(기부금)을 하라고 외쳤고, 필자 주변에도 몇 사람이 잔돈 소리를 내며 오갔다. 필자는 왠지 빗속에서도 무서울 정도로 연기를 내며 바람 속에 타오르는 불길의 흔들림 속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같은 느낌이 교차하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일었다. 지저스 그린에서 가톨릭 교도였던 가이폭스의 사건을 미연 방지했다고 축하 불꽃놀이를 하며 가이폭스 인형 대신 나무를 태우는 이 의식…. “아마도 이런 면에서 할로윈과 달리 이 영국의 의식이 한국 사회나 일본 사회에 알려지지 않았구나…”하는 생각과 더불어, 발길을 돌려서 가로등과 나무 사이로 트리니티 칼리지 앞을 걸어서 시티센터로 갔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였다.

불꽃놀이가 끝난 탓일까? 걸어가면서 맞는 비에 씁쓰레한 고독함이 엄습하기에 여기서 공부 중인 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와 같이 영국 전 지역 여행과 프랑스, 암스테르담 등을 다녀 준 그녀는 나보다 더 많은 이벤트를 다양하게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마침 로빈슨 칼리지에 한국의 국회의원들이 와서 강연회를 열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 그랬다. 이 가을에 캠브리지 대학에는 정말 한국 관련의 행사가 다채롭게 열리고 있었다.
중동 아시아 학부에서는 한국이나 일본 중국 등의 문화 행사를 개최하고 있고, 11월 15일부터는 런던 영화제가 캠브리지에서도 개최되어서 임상수 감독이 와서 토크도 하고, [하녀]라는 작품도 상영한다. 한국 문화원의 후원도 있겠지만, 마이클 신과 같은 한국학 교수도 있고, 내 친구 마크 교수도 아시아 영화학 수업을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한국 영화를 상영하면서 아시아 사회에 대해 알리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에는 홍상수 감독을 초청하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상영 후, 의견 교환을 하는 등, 한국 영화 알리기에 동분서주 하고 있다.
이 먼 이국땅의 보수적인 곳에 한국 문화가 다양하게 알려지고 있고, 한국을 이해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비에 젖어 추워지는 몸과 달리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왠지 캠브리지의 땅이 한국과 가깝게 느껴졌다.

▲ 지저스 그린 옆을 흐르는 캠강

다양한 한국 음식이 일반인에게 잘 보급만 되어있다면 캠브리지는 한국인이 살기에도 참 좋은 곳 같았다. 물론 일본보다 심한 습기 문제가 있어서 서머타임이 사라지고 밤이 긴 요즘, 온돌방은 정말 그리운 우리 문화다. 적당한 온기로 차디찬 생활공간을 풍요롭게 해 주는 온돌이야 말로 인류의 소중한 재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온돌방을 대신하는 전기장판과 캐슬린 지역에 사는 친구가 콩나물국과 함께 챙겨다 준 오일 히터로 불꽃놀이를 마치고 돌아 온 썰렁한 마음을 다독거리며, 필자는 내일 새벽에 떠날 이탈리아 여정 준비를 서둘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