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편에 이어)

▲ 암스테르담 풍경

한정된 시간 속에서 비교적 많은 시간을 이준 열사 기념관에서 보냈기에 조금이라도 네덜란드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서둘러서 헤이그와 암스테르담을 달렸다. 아름답게 꾸며진 공원과 연못가에 자리한 마우리츠호이스 왕립 미술관에 가는 도중에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De Ridderzaal에서 머뭇거리며 당시의 밀사들을 가슴으로 느낀 뒤, 미술관에 들어가서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나 렘브란트의 작품성이 물씬 풍기는 ‘해부학 강의’등을 관람하였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고흐나 렘브란트, 베르메르 등은 일본에서도 종종 전시회가 열렸지만 필자의 도쿄 생활은 그야말로 식사 할 시간조차 없는 바쁜 시간이기에 이렇게 주어진 시간들은 그야말로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

▲ 네덜란드 헤이그 시립 미술관

왕립 미술관의 중후한 작품들을 즐긴 뒤, 헤이그 시립 미술관으로 옮겨서는 인상적이고 독특한 현대 미술이나 피카소, 에곤 실레, 세잔느나 드가, 로댕의 작품과 더불어 왕실의 미술품에 파묻혀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는 반 고흐 미술관이나 캠브리지의 피츠윌리엄 뮤지엄 등을 제외한 명화를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 박물관의 대부분은 프래쉬를 터뜨리지 않으면 사진 촬영은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래서 좋은 작품들은 디지털 카메라에 많이 담아왔다. 하지만 야속한 폐관 시간이 왔기에 우리는 비 내리는 잔세스칸스로 향했고, 넓은 초원과 호수를 바라보며 촉촉이 젖어있는 장난감 같은 풍차를 보면서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은 맑은 날씨(유럽 날씨는 정말 변덕스럽다)였고, 우리는 반 고흐 미술관에 들러서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미술 애호가들 틈에서 고흐나 고갱, 세잔느, 르노와르 등의 거장들 작품에 넋을 잃는 순수한 영혼과도 만났다.

또한 렘브란트가 17년간이나 거주했던 [렘브란트의 집]에서는 그의 빛의 기법을 도입한 많은 작품들과 판화 작업실, 생활공간을 엿볼 수 있었다. 렘브란트 코너를 나와서 암스테르담 중심가의 담락 거리와 담 광장의 댄스 이벤트를 경호하던 기마경찰들과 왕궁 주변의 인파들에 휩싸이며, 성적으로 개방적인 네덜란드답게 애정을 과시하던 커플들(동성 커플도 참 많았다)과는 무관하게 굵은 감자튀김을 입에 넣으며 우리는 이방인 소녀마냥 즐기고 있었다. 복잡하기 그지없던 암스테르담의 도로 사정 땜에 급한 성격의 현지 드라이버들에게서 서양식 욕도 기꺼이 들었지만(네덜란드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그들의 감정 표현조차도 싱그러웠다. 하지만 솔직히 암스테르담의 교통 표기는 정말 복잡하였고, 세계적인 관광 도시 치고는 불친절한 느낌도 들었다), 날씬한 건축물과 곳곳마다 흐르는 강물 위를 달리는 수상 버스와 트램과, 골치 아픈 스트레스를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는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 깊어가는 유럽의 가을 풍경을 마음껏 즐겼다.

▲ 네덜란드 빗속의 풍차마을 전경

갓 구은 다양한 소스의 팬케익과 하이네켄(술 맛을 모르는 필자에게는 밋밋한 맛이었지만 그렇게 유명한 술인지 여기저기에 하이네켄 간판이 걸려있었다), 맛있는 요리 끝에 미래까지 점 쳐주는 기분 좋은 서비스의 터키 음식점의 주인아줌마의 미소를 가슴에 담은 채, 우리는 또 다시 퍼붓는 비바람 속에서 영국행 기차 시간을 의식하며 서둘러 프랑스로 달렸다. 조마조마하며 겨우 까레항에 도착하였으나 영국을 출발했을 때와는 달리 엄격한 패스포트 검사를 하기에 결국 열차 시간을 놓쳐버렸다. 게다가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곳은 열차 타는 곳이 아니라 바로 옆 지역의 배타는 곳이었다. 덕분에 국경을 넘어도 여권에 도장조차 찍어주지 않는 EU의 기념으로 패스포트에 출국 도장을 찍어 준 항구의 관리원들이 가르쳐준 도로로 서둘러서 유로 터널 쪽으로 갔다. 다행히도 그 전 기차를 놓쳤다고 설명을 하자 추가 비용 없이 다음 열차행 티켓을 발행해 줬다.

새벽 1시 39분 행을 기다리며 우리는 심야의 커피와 면세점의 프랑스 향수 화장품을 실컷 구경한 뒤, 무사히 열차를 타고 도버 항에 도착하였고, 일행들은 이미 잠에 취한 어둠 속에서 겁나게 달리는 트럭들 사이를 헤치며 캠브리지에 도착하여 그녀들을 바래다주고 숙소로 왔을 때는 새벽 다섯 시를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리한 체력과 기력으로 추억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도쿄에서 결코 여유 있게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명화⋅명작 속에 파묻히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고, 어릴 때 책에서나 보았던 풍차나 나막신, 수상버스와 각종 전통적 건축물이 가을의 단풍과 어우러지는 도시 환경에 흠뻑 젖어서 정신적 충만감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마냥 피곤하지만은 않았다.

▲ 관람객에게 이준 열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송창주 관장

단지 시간이 흐를수록 헤이그의 이준 열사 기념관을 안네 프랑크의 집처럼 세계적인 역사 시설로 알리고 재정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외국의 역사 문화 시설을 비교적 많이 방문하는 편인 필자가 평소에 느끼는 것은 한국 언론이 부추기는 만큼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배낭여행하며 해외로 나오는 많은 한국인조차도 한국의 역사를 잘 모르는 경향이 많다는 점이다. 국제화, 세계화란 용어가 범람하는 인류의 이동이 늘어가는 시대이건만 정작 자신의 나라나 세계의 역사・문화에 대해서는 기초 지식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해외에 나가서는 되레 망신당하기 일쑤가 아닐까? 그건 어떻게 보면 국제화 시대에 걸맞은 교육에 주력하지 않는 사회, 나아가서는 국가의 무책임한 태도와도 직결하는 것이라 지적할 수 있다. 적어도 영어를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며 국제화 시대에 대비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했다고 자부한다면 내 나라의 역사적 특징과 세계사의 흐름 정도는 철저히 교육시켜서 세계의 흐름 속에 한국의 역사 사회가 걸어온 길을 인식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하는 책임이 있을 것이다.

▲ 도버해협을 횡단하는 차량운반 유로열차 내부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 문화나 역사를 알리고 상대를 알려고 노력하면 상대도 우리 문화를 알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이고, 나아가서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한국을 찾고 한국 문화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곧 자신의 위상을 알리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사회 전체가 기본적인 대인 외교소양을 갖추고 국내외 관광 인프라를 촉진 시킨다면 우리의 사적지, 각종 문화재, 음식 소재 등도 충분히 세계 시장의 경쟁력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엘리트 두뇌의 유출을 막고 확보하는 전략도 중요하지만, 기초적인 국내외 역사교육의 필요성과 더불어 해외공관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한국 홍보를 현지에서 담당해 주고 있는 우리의 역사 문화 시설물 관계자에 대한 물심양면의 협력과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위한 정부 혹은 기업체의 시대적, 사회적 역할이 절실함을 느낀다. 외국에 있는 현지 시설 방문을 통해 자국의 존재를 보고 느낄 수 있는 역사탐방 프로그램의 적극적인 도입과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정부 차원에서 시급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