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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한일관계와 목포 ‘공생원’의 [어머니]
이수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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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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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경 /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


   
필자는 자매대학인 서울교대 및 공주대학교 표경(剽輕) 방문을 마친 뒤, 오랫동안 강연이나 수업에서 소개를 하면서도 현지를 밟지 못했던 이유로 마음 한 구석에 신경이 쓰이던 다우치 치즈코(田内 千鶴子. 한국 이름은 윤학자, 1912-1968)의 발자취를 찾아서 목포로 향했다.

유달산 기슭에 자리 잡은 ‘공생원(共生園)’에 도착했을 때는 붉은 노을이 목포항에 반사되어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을 뜻하는 공생원은 한일근대사의 가장 아팠던 세월 속에서 참된 어버이 마음으로 국경이나 민족을 초월해 인도주의적 사랑을 실천하며 숱한 우리 사회의 가족들을 길러낸 곳이었다. 그 곳을 지켜온 사람은 바로 한일사회의 우호를 간절히 원하였던 [어머니] 다우치였다.

일제 강점기 부유한 집안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난 다우치는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따라 1919년에 고향인 시코쿠의 고치(高知)에서 한국으로 와서, 당시 목포에서 고아들을 키우기 위해 걸식을 하며 아이들을 돌보던 일명 ‘거지대장’이라 불린 윤치호를 도와주다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게 된다. 사랑을 많이 받아 본 사람이 타인을 위해 사랑도 많이 베풀 줄을 안다고 했던가?

1910년의 한일 강제병합과 더불어 일본 정부는 한국의 토지확보를 위해 ‘토지 조사 사업’이란 명목 하에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게 되고, 땅을 잃은 소작인 등은 살기 위해 새로운 터전을 찾아서 만주 땅으로 이주하게 된다. 가족의 목숨 건 긴 여행에서 병들거나 어린 아이들이 버려지자 윤치호는 그들을 거둬들여 보살피며 걸식생활도 마다않았다. 그런 윤치호의 헌신적 정신을 존중하고, 그의 청혼에 서슴지 않고 그의 반려가 될 것을 결단한 다우치는 자신을 돌볼 사이도 없이 아이들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 붓는다.

그러나 1945년에 일본이 패전하고 한국이 해방이 되자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한국 땅에 남기를 고집하는 다우치에게 윤치호는 임신한 아이와 부모님을 돌봐야 하는 그녀의 입장을 배려하여 일본으로 돌아가길 권유하였다. 결국 그녀는 어머니와 두 명의 아이를 데리고 무거운 몸으로 일본에 돌아갔으나, 1년이 조금 못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공생원으로 돌아오게 된다. 성실한 생활로 신뢰를 받아오던 다우치를 ‘공생원’의 아이들은 “어머니가 돌아오셨다!”는 환희로 그녀를 맞았다.

   
▲ 공생원내에 세워진 윤치호, 윤학자 기념비
1950년의 한국 전쟁 발발은 진솔한 사랑과 신뢰로 다져진 이들 부부에게도 많은 고통을 안겨주게 되었고, 전쟁으로 인한 고아들의 증가로 당장 먹을 음식이 없어서 곳곳에 구걸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시련이 계속 되었다. 그런 와중에 음식을 구하기 위해 외출한 남편 윤치호가 행방불명이 되자 다우치는 서툰 한국말로 필사적으로 300 여명의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돈이 되는 모든 것을 다 팔아야만 했다. 구두닦이나 봉투 만들기 등이 가능한 아이들의 도움도 받으며 리어카를 끌고 온갖 따가운 시선과 비방 중상에도 인내하며 아이들 배를 채워야 하는 현실에 매달려야만 했던 것이다.

한국 전쟁의 혼란 속에서 가장 신뢰했던 남편을 잃고 홀로 모든 부담을 짊어지며 혼신을 다하여 고아들을 돌 본 치즈코는 병이 들어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가슴이 아파 울어야 했고, 아이의 주검을 깨끗이 씻어서 하룻밤 같이 잠을 잔 뒤 아이를 직접 산에 묻었다고 하니 이 각박한 세상에 과연 그런 사랑을 어느 누가 쉬이 할 수 있을까?

게다가 1875년 강화도 사건부터 얽혀진 일본과의 불행한 근대사에 대한 울분이 반일로 터져 나올 때도 그녀는 일본인이란 것도 감수하며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혼신을 다하였다. 내 민족 내 부모조차도 버렸던 어린 아이들을 위해 결혼 후 약 30년간 3000명이나 키워냈으니 그녀의 [어머니]의 희생정신과 강한 신념,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언어로 형용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그런 그녀의 인도주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일본인을 초월한 인류애적인 입장에서 1963년에 한국 문화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러나 이미 몸이 만신창이가 된 그녀는 고생의 후유증과 폐암으로 56세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그녀의 숭고한 정신을 기려 장례식은 목포 시민장으로 거행되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던 원아들과 가족들, 관계자 약 3만 명이 참석해 그녀의 마지막 길을 애도하였다. 당시 원아를 대표하여 추모사를 한 이재식 씨의 말에 다우치의 삶이 함축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이란 고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언어도 풍습도 다른 이 나라에, 당신은 무엇을 위해 오셨습니까? 40여 년 전, 탄압 정치가 계속 되던 일제시대에, 울면서 배고픔을 호소하는 고아들을 모아, 당신은 학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밥을 지어, 아이들에게 먹였습니다. 옷이 없는 사람에게는 옷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당신은, 가냘픈 몸속에 매우 강한 의지를 가지고 계셨고, 그 의지 하나로 우리를 키워 주셨습니다. (후략)」

   
▲ 정애라 원장(왼쪽)이 이수경 교수에게 관련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그녀와 윤치호의 교육적 박애정신을 이어받은 후손들은 현재 한일 양국에서 복지사업에 헌신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공생원에서 만난 정애라 원장은 외손녀로서 그 뜻을 계승하려고 노력하지만 할머니의 활동이 너무나 커서 참으로 대단했음을 매일 같이 느낀다며 속내를 토로했다.

사회가 메말라 가는 탓인지 각지에서 아동 학대나 체벌 등으로 신음하는 아이들의 뉴스가 끊이지 않아서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귀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건만 그 생명조차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가 아무리 선진 사회를 표방할지라도 미래는 그다지 밝지 못할 것이다. 과학적 첨단기기의 발전과 더불어 점점 개인주의 성향이 만연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인심과 인정, 인도주의적인 배려가 사회 전체적 차원으로 키워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폭넓은 복지 지원과 교육적 대책이 이뤄진다면, 어른들의 그릇된 감정 표출로 인해 멍드는 아이들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각박한 삶의 쳇바퀴 속에서 이기주의로 치닫는 우리 사회가 다우치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편으로는 ‘사죄외교’라고 외치는 일본 보수파의 이기적인 과거사 해석이나, 오와비(사과)라는 가벼운 용어와 더불어 ‘조선왕실의궤’의 양도라는 형식만으로 미증유의 희생을 치룬 일제 강점기의 눈물 어린 역사를 덮어버릴게 아니다.
진정한 한일 관계를 위해 더 이상 역사의 오점을 남기지 않도록 깔끔한 청산을 위한 과거사 공동 연구 및 공유, 기억의 교육을 통하여 미래 지향적인 화해와 평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진정한 다가서기를 실천하여야 한다.

다우치가 일생을 바친 한국과 일본이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미래가 되기를 간절히 빌어보는 8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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