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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인가
김홍기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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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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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기 박사 / 세계한인변호사협회 명예회장, 대한변호사협회 국제자문위원 ]


   
민주주의가 정치철학 차원의 용어라면 “민치주의”는 정치 공학적 용어라 하겠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하나의 정치체제의 이념과 사상의 산물이라면 민치주의라는 개념은 정치현실의 집행실정을 구사하는 말이다. 때문에 흔히 말하듯 법치주의가 민주주의라는 동전의 또 다른 면이라면, 법치체제는 민치체제의 절대적 첩경이요 선행조건이 되는 것이다.

건국된 지 불과 60여년의 우리 대한민국이 10대 경제국으로 등장하여 민주화와 산업화의 “2마리용”을 한꺼번에 잡은 인류사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세인들의 경탄과 부러움을 사고 있다. 그 뿐이던가. 산업대국으로 10번째를 헤아린다면 오늘날 IT, BT, NT가 선도하는 후산업시대에 있어서는 세계의 3대 선진국으로 도약했다고 우리들이 자화자찬을 할 뿐 아니라 세인들도 이미 그리 평판하며 질시까지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현실에서는 과연 “민주화”라는 측면을 세상의 평가처럼 달성했는가라는 자문을 가끔 하게 된다.

물론 “Magna Carta(영국의 ‘대헌장’,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기본문서로 자주 인용되며 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됨 - 편집자 주)” 이래 근 800년의 역사를 향유하는 서구문명의 현대 민주주의와 반만년의 절대군주주의형 왕정의 뿌리 깊은 문화위에, 그것도 불과 반세기 밖에 안 되는 짧은 역사 속에 이식(transplant)되다시피 갑자기 심어진 소비물질주의적 미국식 민주주의를 직접 비교 한다는 것은 무리가 크겠지만, 굳이 학리적(學理的)으로 따진다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정치주의” 국가이지 “법치주의” 국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일부 혹평가 들은 대한민국 헌법을 가리켜 “아름다운 민주주의 시문”이라고 까지 한다. 이는 아마도 “민치주의 실행”이라는 진면이 정치공학(Political Engineering) 측면으로 투시해볼 때 한참 미흡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프랑스 헌법 서문 16조’에는“3권 분립과 인권보장의 장이 없는 헌법은 헌법이 없는 것과 같다”라고 되어있다.
이 대목과 관련하여 과연 대한민국헌법체제에 민주주의 근간이요 생명이 되는‘3권 분립’이 실질적으로 되어 있는가, 특히 ‘사법부 독립’이 보장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 우리가 다뤄야 할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왜냐하면, 내각책임제나 의회정치체제에서는 행정부가 입법부의 연장권으로 동일권시 되어‘2권 분립’으로 보더라도‘사법부독립’이야말로 모든 민주주의체제의 절대불가결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만인이 주지하는바 대한민국도 3권 분립의 원칙이 헌법상 선언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대법원장의 임명권으로부터 검찰총장의 선임까지 대통령이 직, 간접으로 행사하는 것이 건국 이래 변함없는 전통관행이 아니었던가 해서 하는 말이다.

이에 반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리보다 후진국으로 여기고 있는 남미국가들의 대부분은 사법부의 완전독립체제를 - 60년대로부터 80년대까지의 군사독재시대를 극복하면서까지 - 끈질기게 고수해 왔다는 것은 민주화 투쟁사상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궤도를 병행한 제(諸)민주화국가들의 좋은 선례로서 눈여겨볼 일이다.

20세기 후반 산업화 이래 ‘신봉건주의’의 도시산업화 현상이 낳은 극심한 빈부의 차(Gap)와 이에 수반되는 보수 지배세력의 만성부패에도 불구하고 민주자본주의 시장경제사회를 보전해온 1등 공신은 바로 ‘사법부 독립 전통문화’였다고 단언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렇듯 문제의 해법이 선언적 법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현실적으로 적용되는 법치전통문화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들의 문화는 ‘인디안 문화’도 아니요 ‘아프리카 노예문화’는 더더욱 아니다. 남미문화는 유럽문화의 연장권으로서 4세기 이상의 ‘기독교(가톨릭) 민주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기독교 법치문명의 근간이기도한 바티칸의 교회법(Canon Law)에서 비롯된 ‘법치문화’의 혜택을 16세기 식민초기시대부터 철저히 물려받은 ‘법치 문화인’들이다. 아마존(Amazon) 원시림 한복판에 근 200년의 역사를 가진 ‘오페라 극장’이 있다면 놀랄만한 일이 아닌가.

그 맥락에서 ‘남미의 미국’이라는 브라질의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브라질 헌법 제95조에 ‘판사에 관한 3대 신성불가침권’이 보장 되어있는데, 그것들이 바로 민주주의 대륙법권으로부터 유래한‘종식직권’, ‘좌천불가권’, 그리고 ‘감봉불가권’의 3권이다. 즉, 판사는 임명된 지 2년의 숙년기간이 지나면 중죄에 의한 확정판결을 받지 않는 한 70세 정년이 될 때까지는 절대 해임 될 수 없고, 좌천될 수도 없고, 감봉될 수도 없는 ‘3대 특권’을 헌법이 보장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어떤 독재가 통치를 하더라도 군사독재시대에 일시 있었던 ‘헌법발효정지처분’등의 독재령이 없는 한, ‘목줄’과 ‘주머니’에 대한 신상의 절대보장을 받는다. 그들이 복종할 상관이 있다면 ‘하나님과 법의 양심(God and Juridical Conscience)’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법원 사건배당도 법원장이나 부장판사 등 상부조치에 의한 것이 아니고 로또(Lotto) 당선자를 정하듯이 당일 추첨식에 의하여 배당이 되는 제도이기 때문에 정실배당형의 폐단도 불가능한 제도인 것이다. 이런 제도가 도입되어야만 사법부의 완전독립이 가능하고 민주주의 안착이 가능한 것이다.

검사직도 업무상으로는 사법부에 예속된 직분이기 때문에 검찰청 상부와의 위계질서상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행정적 운영질서에 국한 될 뿐이다.
따라서 남미 검사들은 사건상의 ‘기소권 행사’를 함에 있어서 각자의 법지식과 양심만 이 지침이 될 뿐, 행정적 상부나 외부의 압력은 물론 간섭조차 불가능한 제도적 장치로 운영되는 민주주의적 검찰체제에서 봉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들의 ‘법조3륜’의 중대한 한 가닥인 변호사와의 관계는 어느 정도의 민치 주의적 관계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와 같이 브라질의 예를 들면, 브라질 ‘변호사법 제6조’에 법조3륜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판사, 검사 그리고 변호사는 법조의 불가결한 3대 요원으로서 동급, 동격이며, 상하의 위계관계는 전무하여 서로 존경하고 배려하며 협력해야한다.”고 명기 되어 있다. 그리고 ‘제7조’에는“변호사의 업무상의 비밀은 절대보장 해야 하며, 그 사무실이나 사무실내에 있는 서류 및 집기는 판사발부 수색영장 없이는 수색대상이 될 수 없다. 단, 수색영장 하에 수색을 할 때에도 변호사협회의 대표인 참관 하에 집행하여야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한국에서는 변호사를 소위 “재야법조인”이라 칭하며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존중은 고사하고 그들을 대표, 대변하는 ‘대한변호사협회’를 법무부 산하 피감독 기구로 두고 있으니 민주 국민들의 법적보호자, 나아가 공권을 상대로 하는 인권옹호자들을 정권에 예속시켜 독재국가처럼 법의 종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시각도 존재할 만 하다고 보인다.

그 단계까지는 아니라 해도 사법을 정권하에 두는 관습, 사법부가 전관을 예우하는 폐습, 그리고 재야법조인들을 정권으로 지배하려는 악습들은 모두가 일제의 군벌관료주의 법률문화의 잔재가 사회전반에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법문화이기 때문에 개혁이 절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법문화 뿐 아니라 실은 우리 의식저변에 깔려있는 ‘법 생리’와 ‘법정서’로부터 성찰이 필요한 일대 문화적 개혁이 요구되고 있다 하겠다.

그러기에 이번 대한변호사협회가 사법개혁 선봉에 서서 기치를 높이 들었다는 것은 아주 고무적이고 시기적절한 일로 기대하는 바가 크다. 더욱이 과거에는 늘 청와대가 주도하는 형식에서 끝나곤 했으나 이번에는 때를 같이하여 국회가 주동이 되어 일련의 법 개정을 시도 한다는 것도 매우 반가운 일이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미국, 영국 등 모든 민주 산업 선진국처럼 ‘판결문정보공개제도’를 우선 도입실시하고 전관예우 등 특권계급의 차별대우의 악습을 없애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 시민에 대한 법률서비스 폭은 넓혀질 것이고 질은 향상될 뿐 아니라 원활해진 법률문화 정보를 통하여 국민들의 법률교육이 자연 향상됨으로써 법률과 사법제도에 대한 일반인의 지식수준이 제고되어 법률서비스 선택능력도 높아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률서비스의 고가 횡포도 줄어 들 것이며 서비스료의 낭비도 줄어들 것이다.
또 판결정보공개라는 개념은 민주사법행위를 논하기 전에 우리가 현재 앞서가고 있는 인터넷 시대에 가장 걸맞은 필연적 문화현상이기도하다.

그리고 또 중요한 개혁대목은 모든 법문화 선진국처럼 판사들의 ‘평점제도’를 채택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한한국 헌법 제 105조는 ‘외부평가제’를 뜻한 것이니만큼 ‘법관연임심사’에 미국처럼 변호사협회가 반듯이 관여해야 할 것이다. 인사행정을 집안 식구 끼리로만 국한 하는 것은 민주 사법제도가 아니다.

한국 사법계 조직상 오랜 논란이 되어온 또 하나의 이슈는 1심 판사들의 연령과 경험미숙의 문제였는데, 연수원에서부터 판사, 검사, 변호사 세 갈래로 직접 갈라지는 한국과 달리 우리와 같은 ‘선진개도국’인 브라질의 경우도 판검사 시험 응시자격을 5년 이상의 변호사 경험을 기본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브라질 법조계의 현실은 최소 5-10년 이상의 경험을 쌓은 변호사들만이 그 관문의 개별 국가고시에 응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법대를 나오자마자 법률생활은 고사하고 인생경험도 없는 초립동들에게 간단치 않은 인생들의 신변과 재산에 대한 운명적 판단을 내리게 한다는 것은 단연코 크나큰 사회적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시정이 시급히 요구되는 항목이다.

덧붙여서 조직개선에 대해 살펴보면, 대법관 수를 대폭 늘려야 할 것이다. 단순논리로 “미국도 3심제이며 9명밖에 안 되는 대법원으로도 50주를 통괄 하는데 우리라고 대법관 숫자를 늘릴 필요가 있느냐?”라고 반문 할 수도 있겠으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뉘앙스가 있다.

미국의 대법원은 헌법재판소나 마찬가지로 헌법사건만 취급하는데 반하여 우리 한국 대법원은 미국의 2심(고등법원)처럼 ‘법률심’이기 때문에 ‘사실심’을 1, 2심에 맡겼다 해도 한국의 대법관들은 법률심을 다루어야한다.

그래서 현재 한국의 대법관은 1명당 2,500건 이상을 다루어야할 정도로 사건이 밀렸다고 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니 재판의 질이 형편없이 낮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졸속판결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와 같은 대륙법권인 독일과 프랑스는 전문분과 장치가 잘되어 있을 뿐 아니라 100명 이상의 대법관들이 있어 능히 분담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법관 수를 늘리지 않겠다는 고집이 법원에 있다면 이는 희소의 가치에 도취된 관료주의사상이란 세평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치는 판결의 능력(Capacity)과 질(Quality)에서 찾는 것이 아니었던가. 민주 사법권은 민중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서비스로 국민을 섬기는 것임을 이제 늦게나마 통감 했으면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해묵은 폐습의 전관예우, 상고심의 졸속재판, 편향판결 등이 시급이 개선되어 우리법률문화도 이제는 민주화를 내세우고 있는 10대 경제문화에 걸맞았으면 한다.

그리고 근래 우리 사회에 논점(Hot Issue)로 대두 돼왔던 ‘경찰독립수사권’에 대해 한마디 부언 한다면, 민주국가에서 판사가 소송사건의 주인(Ruler of litigation)이라면 검사는 법의 검찰관으로 ‘기소권(Le Droit de Prosecution)’을 고유권한으로 갖고 있다. 그렇다면 그 연장권에서 수사권 역시 ‘사건추궁권(Le Droit de Persecution)’이란 원리론 적인 기소권의 선행조건(Pre-condition)으로 직접 행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고유권한에 속하는 일이다.

경찰수사권은 다만 그들의 권한 및 의무행위를 함에 있어 필요에 따라 보좌하는 역을 담당(Auxiliary Role of Investigation)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경찰의 본래의 의무는 사회치안(Preservation of Social Security)에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극우든 극좌든 간에 파시스트나 공산독재정권 같은 경우와 같이 소위 ‘경찰국가(L’etat de Gendarm)’가 되는 것이다.

끝으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은 말은 사법개혁은 사법관들이나 법원을 위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재민주권을 위한 것임을 이제라도 모두 절감 했으면 한다. “늦게라도 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better late than never)”가 아니겠는가.
이제 우리 대한민국도 힘의 법(Law of Force)은 안통하고 법의 힘(Force of Law)만이 통하는, 그리고 정치국가(State Under the Political Rule)가 아닌 법치국가(State Under the Rule of Law)가 하루빨리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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